■2022년1월6일(목)■
(로마서 6장)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묵상/롬 6:14-18)
◆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죄(sin)가 주장하지 못한다라는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나의 죄들(sins)이 나를 죄인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과 또 하나는 죄(sin)가 나를 노예처럼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즉 의인이 되었다. 이제는 나의 죄가 나를 죄인으로 만들지 못한다. 비록 내가 범죄했을지라도 의인 됨이 취소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수한 비가 내리고, 샘이 터졌어도 방주 안에 있는 자들은 물 한 방울 옷에 묻지 않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런 죄 용서함의 은총 가운데 있다.
또한 죄를 지으면 죄는 그를 지배하려고 한다.
구제 불능의 죄인으로 몰아가며 절망하게 만든다. 마치 자신이 채권자인 듯 그를 죄의 종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가운데서 한탄하며 말했다.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겔 33:10)
이런 자포자기는 회개에 이르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죄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나는 많은 사람이 이런 자포자기 가운데 타락하는 것을 보았다.
성도는 이런 것과 싸워야 한다.
죄를 범했는가?
분명히 죄가 나를 지배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즉시 주님께 자백하고, "죄가 나를 주장할 수 없다"라는 말씀을 붙들고 대항해라.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겔 33:11)
악인에게도 이러하거든, 하물며 사랑하는 자녀에게야 말할 것도 없다.
일곱 번 넘어졌어도 여덟 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 은혜 아래 있다.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사장과 직원은 법적인 관계다. 그가 일하지 않는데 임금을 줄 이유가 없다. 계약은 깨진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이는 은혜의 관계다. 아이가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어머니는 그를 돌보고, 심지어 잘못해도 덮는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법적인 관계일까, 은혜의 관계일까?
내가 잘하고 있는 동안만 나를 사랑하신다면 그것은 법적인 관계다.
그러나 내가 넘어져도 나를 사랑하신다면 그것은 은혜의 관계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을 트집 잡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 은혜 아래 있다는 의미를 모르는 자다.
내가 부족하므로 하나님은 나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고 계실 것이라고 상상하는 자도 여전히 하나님과 자신을 법적인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
청년 시절에 나는 매일 큐티와 묵상, 그리고 기도 생활을 습관적으로 했다. 입대하게 되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막상 입대하자 고된 훈련 속에서 나는 정신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의 큐티, 묵상, 기도? 무슨 한가한 소리인가? 고된 훈련 속에서 정신없이 자다가 기상나팔에 깨면, 정신없이 이불 개고 옷 갖쳐입고 연병장에 뛰쳐나가기 바쁜데...
허약한 몸이라서 언제나 뛰면 뒤처졌고, 간단한 얼차려도 버거웠다.
훈련 중 잠시 쉬는 시간에는 전도는커녕, 말 한마디 하는 것도 힘들어서 넋 놓고 있었다.
모의 수류탄 던지는 훈련을 하는데, 중대장이 저 멀리에 동그라미 하나 그려놓고 거기 안에 못 집어넣으면 굵은 막대기로 손바닥을 때렸다. 사격에서 몇 발 이상 못 맞추면 쪼그려 뛰기…. 뭐든지 힘들었다.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하나님 아버지,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어왔다.
네 행위를 돌아봐라. 힘들다는 핑계로 기도하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고, 전도도 하지 않는 삶. 이런 너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네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을 성싶냐? 지적하는 사항이 모두 구구절절이 옳았다. 나는 위축되었다. 기도가 막혔다.
그럴 때 내 마음 깊은 속에서 이런 말씀이 들렸다.
"너는 은혜를 누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곧이어서 로마서의 이 말씀이 떠올랐다.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내 마음 속에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 맞습니다. 저는 은혜 아래 있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저를 사랑하십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힘이 났다. 얼굴에 기쁨이 넘쳤다. 입에서는 군가를 부르고 있지만 내 마음속에는 찬양이 가득 찼다. 나는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늘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무수히 체험했다.
◆ 그럴 수 없느니라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죄와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죄를 지어도 용서하고 여전히 사랑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 자식은 망나니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확신하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기꺼이 의의 종이 되고자 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동시에 죄를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단순히 죄책에서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주관하는 죄성에서도 구원받은 것이다. 심리적인 구원이 아니라 실제적인 구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신다.
많은 사람이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지만, 정작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마음에 머물 수가 없다(요일 2:15).
하나님께서는 그를 여전히 사랑함에도, 그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이 어찌 자기 남편의 사랑을 느끼겠는가?
세상을 사랑함을 내려놓아야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다. 이런 것을 추구하는 한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을 체험할 수 없다.
신학 지식이 나를 평안으로 이끌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자.
주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자.
세상을 향해 걷던 삶을 돌이켜서 주님을 향할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평화가 있다.
우리는 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 부르심을 따라 살 때 진정한 평화가 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 시 18: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