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1월8일(토)■
(로마서 7장)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묵상/롬 7:1-6)
◆ 두 남편의 비유와 율법과 복음
로마서 7장은 6장에 이어져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이 범하는 오류가 7장을 6장과 관계없는 새로 쓴 서신서의 1장처럼 읽는 데 문제가 있다.
6장 마지막 주제가 무엇인가?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씀이다(롬 6:14).
구원받을 때만 은혜 아래 있고, 그 이후는 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도 계속 은혜 아래 있다는 말씀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적인 방식이 아닌 은혜에 맞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법 아래 있지 않다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율법이 아닌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단 말인가?
오늘 본문은 율법과 복음을 두 남편으로 비유하고 있다.
한 여자가 두 남편을 섬길 수 있는가?
없다.
만일 남편이 있는데, 다른 남자에게 가면 그는 음녀(간부)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재혼할 수 있다. 오직 남편의 죽음 만이 자유롭게 한다.
한국인이라면 한국 법에서 자유할 수 없다.
벗어나는 길은 오직 그가 다른 국가 시민으로 귀화하는 길밖에 없다.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율법에서 멋대로 벗어날 수 있는가?
없다. 율법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오직 죽은 자만이 율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선언한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나니"(4).
율법이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죽었다.
성경에는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표현이 두 번 나온다.
하나는 오늘 본문이고, 또 하나는 갈라디아 2장 19절이다.
우리가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과정이 바로 율법에 대해 죽는 것이다.
율법에 대해 죽지 않고, 복음적인 방식으로 살기란 불가능하다.
율법은 죄를 지은 자에게 저주를 선포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모두가 저주 아래 있다(갈 3:10).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이 저주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몸으로 모두 받으셨다(갈 3:13).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와 함께 죽은 자다.
이제 우리는 율법의 저주를 받지 않는다.
더는 율법이 우리에게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형벌이 사라진 법이 무슨 힘을 발휘하겠는가?
◆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가?
바울은 6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조문으로 살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함을 선언한다.
생각해보라.
율법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6절에서 '율법 조문'이란 말은 원어로는 '그라마', 곧 '문자로 쓰인 어떤 것'이라는 뜻이다.
개역성경에는 '의문(儀文-의식적인 문자)'라고 직역되었는데 개역개정은 '율법조문'이라고 의역을 했다. 의문(letter)이란 말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율법 조문으로 바꾼 것은 잘한 일이지만, 이것은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즉 모세의 율법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루터는 아주 적절한 말을 했다.
"바울이 말하는 '의문(letter)'이란 말은 율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라든지 올바른 생활에 속한 규정, 설교 등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
즉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은혜의 영이 임하지 않고, 단지 문자로만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모세의 율법과 다를 바가 없다.
율법과 복음은 두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르다.
그중에 한 가지만 빠져도 당신은 율법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는, 내용 면에서 다르다.
율법과 복음은 한마디로 그림자와 실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할례, 안식일, 각종 의식법 등이 그림자다. 이제는 그림자를 내려놓고 실체를 붙잡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림자와 실체가 똑같을 수는 없다. 따라서 그림자를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면 실체를 붙잡을 수 없다.
또 하나는 지키는 방식 면에서 다르다.
율법 아래에서는 자기 노력과 극기로 율법을 지켜내어서 '의를 획득'하는 방식이었다(신 6:25). 곧 자기 의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복음은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부여받고 믿음에 의해서 그 의를 따라 사는 방식이다. 많은 사람이 이 두 번째 면을 모른다.
사람들은 복음적인 삶의 방식을,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교훈을 모두 율법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열심히 지키는 것으로 착각했다. 결국 내용은 바뀌었지만, 방식은 하나도 바뀌지 않은 '자기 의'에 불과하다.
나도 수십 년간 복음을 가르쳤지만, 막상 나의 삶의 방식은 율법적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살면, 점점 더 세속화되고, 고집이 세지며 교만한 종교인으로 변해간다.
율법적인 방식이 사람들에게는 쉽고 익숙하다.
하라는 것은 하고, 말라는 것은 안 하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복음적인 삶의 방식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오히려 어렵게 느껴진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라(6)고 하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믿음과 그리스도의 신비가 있다.
믿지 않는 자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심지어 이해조차 불가능한 영역이다.
바울은 이제 그것을 설명할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설명한다고 알아듣겠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으나, 우리는 믿는 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 안에는 믿음이 있고, 성령이 계시다. 이 놀라운 선물이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으며 실천할 수 있다. 이것을 이제부터 알아보자.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과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7장과 8장에서 설명한다.
주님,
우리 눈을 뜨게 하셔서 복음의 진리를 보게 하시고,
율법조문이 아닌 영의 새로운 것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