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1월10일(월)■
(로마서 7장)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묵상/롬 7:7-13)
◆ 율법이 죄냐?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복음을 듣다 보면, 마치 율법 타도처럼 오해가 된다.
율법에서 벗어남을 무척 강조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율법에서 벗어남을 강조할까?
여기에 깊은 비밀이 있다. 이것은 앞으로 다룰 것이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란 말씀은 율법에는 아무 문제가 없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율법에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최근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행위구원론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흔드는 자들이 있다. 이들의 이론을 들어보면, 너무나 그럴싸하고, 또 타이틀이 신학박사, 목사라고 하니 더욱 미혹되기 쉽다.
행위구원론은 사람을 반듯하게 하는 데 제법 효과가 있다.
거짓말하면 지옥 간다고 외치면 확실히 거짓말 안 하도록 하는 데 효과가 있다.
십일조 안 하면 지옥 간다고 말하면 당장 헌금 수입이 달라질 것이다.
주일 성수 안하면 지옥 간다고 말해보라. 당장 주일날 출석수가 달라진다.
똑바로 안 살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해보라. 정신이 번쩍 날 것이다.
이런 것이 율법적 효과다. 분명히 반짝이는 효과가 있다.
여기에 취하면 율법 만능주의에 빠진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부패하게 한 원인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교인들이 무책임하고 게으른 사람이 되게 했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그것은 착각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율법적이다.
이슬람교처럼 율법적인 종교가 어디 있는가?
그들은 도둑질하면 손을 자르고, 간음한 사람을 돌로 치며, 정해진 시간마다 같은 방향을 향해 절을 한다. 그들과 생활해본 사람들은 이슬람 사람들이 세속적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정직하고 윤리적으로 반듯하다고 말한다. 과연 이슬람이 더 율법적이라는 이유로 기독교보다 뛰어날까?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대단한 율법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간음하지 않았고, 살인하지 않았고, 도둑질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했다. 겉보기에 완벽할 정도로 반듯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주님께서는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마 5:20). 과연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어떤 의인가? 우리는 더 노력해야 하는가?
율법으로 억제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 부분에서는 제법 효과가 있지만, 인간의 마음 부분, 곧 사랑이나 탐심에서는 무력하다. 결국 위선자만 만들어낼 뿐이다.
바울은 이것을 끄집어 낸다.
◆ 나를 죽이는 계명?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십계명 중에 마지막 계명을 예로 들면서 율법의 의미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낸다.
"탐내지 말라"
다른 계명들은 모두 행위와 관련이 있지만, 탐내지 말라는 말씀은 마음과 관련이 있다. 인간은 의지를 통해서 자신의 행위를 상당 부분 억제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을 제시한 것이 예수님께서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 28)라는 가르침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율법이 간음하는 행위는 막을 수 있지만, 성적인 탐심은 막을 수 없다.
살인은 막을 수 있지만, 마음속의 미움은 막을 수 없다.
원수를 용서하는 척은 할 수 있지만, 진정한 용서를 하게 할 수는 없다.
9절에서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란 곧 율법이 어떤 목적으로 주어졌는지 몰랐을 때다. 바울은 바리새인 시절에는 살리는 계명이라고 믿었다.
노력하면 얼마든지 지킬 수 있고 그것이 바로 나를 살린다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은 율법에 대해 완벽하며, 의인이라고 자부했다(빌 3:5, 6).
그러나 계명을 제대로 깨닫자 비로소 계명이 오히려 나를 죽이는 것임을 깨달았다. 물론 계명은 선하지만, 문제는 내게 있다.
오늘 본문에서 11절에 "죄가 나를 속였다"라는 표현이 흥미롭다. 죄가 나를 속이다니?
죄는 법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죄는 불법이다.
율법이 생기자, 나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고 했는데, 결과는 오히려 죄가 나를 지배하게 되었다. 계명을 통해서 죄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펄펄 살아났다.
죄는 내가 율법으로 살려고 하는 것을 찬성한다.
심지어 박장대소하며 격려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나의 죄성을 오히려 자극하기 때문이다. 안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어지는 인간의 죄성.
탐내지 말라하는 계명이 오히려 탐심을 부추기는 이런 모순이라니!
많은 사람이 율법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죄는 계명을 빌미로 나를 철저히 좌절시키고, 죽일 수 있다.
죄가 계명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것이 좋은 뜻일까?
아니다. 속이는 것이다. 나를 죽이려는 목적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계명이 문제인가?
아니면 나의 문제인가?
율법을 강조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선하게 살지 못한다고?
말도 안된다.
인간의 문제는 율법의 유무에 있지 않고, 인간의 죄성에 있다.
그리고 율법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인간을 죄성에서 건지지 못한다.
7장에서 인간의 죄성부분을 계속 다루게 될 것이다. 로마서 7장 말미와 8장에서 우리는 죄성에서 해방하는 길을 배우게 될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다윗. 시 25:4,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