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1월12일(수)■
(로마서 7장)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묵상/롬 7:21-25)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오늘 본문에는 '법'이 무려 다섯 가지가 나온다.
21절에서 바울이 깨달은 '법'은 일종의 법칙이다. 사람에게 악이 있는 것은 만유인력과 같은 자연법칙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써 타락한 이후에 악해졌다.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다.
22절의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 정당하고 옳다. 신앙을 가진 자라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할 것이다.
23절의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법'은 내 속에 있는 '죄의 정욕'이다.
반면에 '내 마음의 법'은 '양심과 신앙'이다. 그런데 죄의 정욕이 이것을 이긴다. 그래서 죄의 법으로 사로잡아 온다. 즉 죄를 짓는 존재로 전락하게 한다.
여기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인간은 매일 새로운 죄를 짓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마다 약한 부분이 있다. 탐심의 영역이 제각기 다르다. 그리고 같은 죄를 반복한다.
매일 같은 죄를 짓고, 매일 회개하고, 수백 번을 반복하면 나중에는 내 자신도 나를 믿지 못하며 신앙은 약화되고, 정신은 위축된다.
과거 청년 시절에 나는 위축되고 위축되었다.
사도 바울의 탄식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는 말씀이 큰 위로였다.
이 말씀이 내가 피할 바위였다. 이 말씀마저 없었다면 정신줄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사도 바울도 그랬다니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도 바울의 탄식이 온전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열심히 관련 서적을 읽으면 제법 반짝이는 효과가 있지만, 절대로 지속되지 않는다.
엄청나게 많은 설교와 셀 수 없는 조언을 접하지만, 모두 자신들의 경험일 뿐 나와는 관계가 없다.
오늘 말씀은, 종교심이나 신학 지식으로 죄를 극복할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갈등만 부추길 뿐이다.
신학 지식이 나를 죄에서 해방하지 못한다. 지식을 가졌다고 그것이 내게 진리가 된 것이 아니다.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산 중턱에 샘물이 있다는 지식이 어떻게 목마름을 해결하겠는가?
어떻게 하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가?
◆ 해방의 길 1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해방의 길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하나는 로마서 7장 25절이고 또 하나는 8장 1, 2절이다.
7장 25절은 해방의 첫 관문이다.
25절에서 '그런즉'이란 말은 어떤 사실을 이제는 순순히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긴다는 말은 자기 속에 있는 죄의 정욕과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 이런 것으로 더는 고민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죄의 정욕이 올라올 때 놀라거나 괴로워하지 말라. 원래 인간은 그런 존재다. 거기에 지배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인간의 죄성에 너무 좌절하지 말라.
수도원의 창시자 안토니란 사람이 있다.
그는 주후 251년에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로 하고 자기 재산을 다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극단적인 금욕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동굴에 들어가서 10년간 살고 폐허가 된 성에서 20년이나 지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자기 마음속의 악령과 싸웠다. 사람들이 안토니가 있는 곳을 지날 때면 안토니가 처절하게 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망상가, 정신병자로 생각했다.
안토니가 60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마을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그는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후에 제자가 된 수도사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악령들을 상상하는데 바쁘지 말자. 우리가 잃어버린 자인 것처럼 마음을 괴롭히지 말자 . 오히려 구속 받은 자로서 항상 위로받고 기쁨 가운데 있자"
수십 년이나 고행을 한 후에 비로소 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로마서 7장 25절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바울을 본다.
믿음의 선구자들을 통해서 너무나 편하게 이 진리에 도달함을 감사드린다.
하나님은 인간의 속성을 잘 아신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라고 외쳐도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들,
매일 남을 가르칠 생각만 하고 자기는 실천할 줄 모르는 인간들,
형편없으면서도 제 잘난 맛에 우쭐대는 인간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으랴.
아무리 야단쳐도 고쳐지지 않는 인간들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았는가?
당신이라고 다르겠는가? 똑같다.
쳐다볼수록 한숨만 나오는 인간들이다.
이때 하나님의 아들이 나섰다.
이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느니, 차라리 제가 죽겠습니다. 이들을 그냥 용서해주십시오.
죄지은 인간들을 죽이느니 차라리 주님께서 죽기로 하셨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비웃고, 뺨을 치며, 가시관을 씌우고, 손에 못을 박는다.
조금 전만 해도 무화과나무를 말 한마디로 말려 죽이실 수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데 그런 분이 이 모든 수모를 묵묵히 다 당하신다.
인간들은 조금만 억울해도 복수를 다짐하건만, 하나님의 아들은 이렇게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는 것이다.
열심히 단장해봤자 오십보백보다.
길에서 구걸하다가 임금의 잔치에 초청되었다. 이런 옷차림으로 어떻게 가냐고 하니, 예복은 잔칫집에서 주시겠단다. 안 갈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런 잔치 석상에서 여전히 자기 옷을 뻐기느라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이 있다. 오히려 거지는 잔치에 남았는데, 화려한 자기 옷을 고집한 사람은 쫓겨났다(눅 14:21, 마 22:2-13).
주님께 나아오라.
그분께서 나를 고치신다.
나의 부족함에 대해 너무 괴로워하지 말자.
십자가가 바로 나의 부족함 때문이지 않은가?
새삼스럽게 나의 부족함을 변명할 필요가 없다.
우유부단한가? 괜찮다.
죄가 많은가? 괜찮다.
중독에 빠졌는가? 괜찮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로 와라.
주님께서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
내가 나를 고칠 수 없음도 잘 아신다.
그냥 감사하고 그분께 나아가자.
그분의 손에 나를 맡기자.
탕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무언가를 하실 것이다.
이런 나를 받아주신다면 적어도 감사는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받아주시겠다고 하시는 데도 그분을 미워하거나 멀리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주님,
저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