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6일(금)■
(창세기 25장)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묵상/창 25:19-34)
◆ 아람 족속과 히브리 족속
(2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아브라함이나 이삭은 아람 족속이다. 아브라함은 같은 아람 족속 중에서 자기 아들의 신부를 데려왔다. 아브라함 시대에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히브리 사람'(창 14:13)이라고 하는데, '강 저편에서 온 자'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지극히 많지만, 후에는 히브리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과 동일시 되었다.
◆ 결혼한지 20년만에 아들을 낳다
(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이삭은 40세에 결혼해서 60세에 아들을 낳았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아직 죽기 전의 이야기다.
이삭은 별처럼 후손이 많을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약속(창 21:12)을 이어받은 자이지만, 결혼한 지 19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었다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배다른 형 이스마엘은 무려 열두 명이나 되는 자식을 낳았다. 그리고 자기보다 늦게 재혼한 아버지 아브라함도 그 늙은 나이에 자식을 무려 여섯 명이나 낳았다.
그런데 막상 약속받은 자신은 자식을 못 낳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삭은 약속만을 믿고 기다렸지만, 계속 소식이 없었다.
나는 이삭의 기다림도 아브라함만큼이나 믿음의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25년이나 기다렸고, 이삭은 20년을 기다렸다.
이삭은 결국 하나님께 자식을 주실 것을 간구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자식을 주셨다.
왜 기도했을 때, 비로소 주셨을까?
그냥 알아서 주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데 꼭 인간의 기도가 꼭 필요할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회복을 약속하시면서 이렇게 덧붙이셨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7)
약속하시고도 '그래도' 기도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기도란 단순히 무엇이 필요할 때 청구서를 집어넣는 것이며 거기에 따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격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조종되는 무슨 시스템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나는 기도란, 마치 자식과 친해지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부모가 자식에게 말 시킬 거리를 만들어놓고 기다리다가 자식이 비로소 자신에게 말을 걸자 기뻐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신다.
그런데도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기회가 아닌가? 그런데도 야속한 인간들은 자기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그나마 필요만 말하고 휙 나가버린다.
기도는 우리와 가까워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바람이다.
기도하고 응답받았을 때의 기쁨은 단순히 응답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내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라는 것에 있다. 그것이 더 기쁘게 한다.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하찮은 인간의 기도 따위를 바라신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광대한 우주에 비해 한없이 작은 우리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모습의 인간으로 오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특별하게 여기신다. 한없이 연약한 갓난아이일지라도 부모에게는 매우 소중한 생명인 것과 같다.
◆ 하나님의 선택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다. 누가 더 착한 삶을 살지, 누가 더 훌륭한 사람인지 미처 확인 되기도 전에 하나님은 야곱을 미리 선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더 훌륭할 것을 아시고 말씀하신 것인가, 아니면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운명을 결정하신 것인가?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인간들은 자신들의 선택권을 매우 중요시한다. 그래서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사실을 무척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라. 인간만 선택권이 있고 하나님은 선택권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누구 선택권이 우선일까? 창조주이신가, 피조물인가? 당연히 창조주이시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졌다고 해서 자유의지를 포기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오늘도 자유의지를 따라 밥 먹고 취미생활 하며 이것저것을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이 우선임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따른 선택을 조화시키는 것은 우리들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다. 다만, 나를 선택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나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따름이다.
하나님의 선택이 우리의 행위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의지에 달렸다는 것이 나는 오히려 너무나 감사하다. 이런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나같은 존재는 평생 하나님을 만날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 야곱은 영광스러운 이름인가, 수치스러운 이름인가?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야곱이란 이름은 '발뒤꿈치를 잡다'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거짓말쟁이라는 의미도 들어있다고 한다. 정말 수치스러운 이름이다.
성경은 이스라엘 사람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그런데 자기 민족 조상의 이름이 이렇게 수치스러운 유래를 가졌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기록한 것을 보면 성경은 인간이 조작한 책이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야곱이란 이름 자체는 매우 수치스러운 이름이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야곱을 택했다고 하는 순간, 그 이름은 영광스러운 이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야곱.
인간적으로는 부족하고, 형보다 열등하며, 겁도 많고 소심한 사람이지만, 오로지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이유로 누구보다도 위대해진 사람이다. 그리고 야곱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고 당신을 선택하셨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