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28일(토)■
(누가복음 18장)
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묵상/눅 18:15-17)
◆ 어린 아이들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종종 어린 아기들도 예수님을 안 믿으면 천국에 못들어가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원죄니, 예정설이니 하면서 나름대로 논리에 딱 맞는 설명을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논란을 한마디로 끝내신다.
어린 아기를 번쩍 드시고 사람들에게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셨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예수님은 아기들을 사랑하셨다. 십자가의 은총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기들에게까지 미친다.
그런데 어린아이의 기준이 몇 살까지일까?
나이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아는 나이가 될 때까지라고 본다(사 7:15). 지능이 낮은 사람의 경우 나이가 많아도 어린아이처럼 행동한다.
◆ 어린아이들의 특징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가리키면서 하나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한다고 단언하셨다. '결단코(never)'라는 단어까지 쓰셨는데, 농담으로 알거나 과장법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
어른과 어린아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일단 어른은 자기 기준이 뚜렷하다. 원죄의 본질이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니만큼 모든 것을 자기 판단 아래에 둔다. 어른들은 설교를 들어도 자기가 만든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는 것만 받아들인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자기 기준이 없다.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가끔 성경의 문제점을 드러내며 오만가지 트집을 잡는 사람을 만난다. 들어보면, 정말 의문이 아니라 그냥 믿기 싫은 핑계일 뿐이다. 이를 보면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임을 실감한다.
어른과 어린아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판단'에 있다.
어린아이는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남을 판단하는 것을 무척 즐긴다. 혈액형으로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믿고, 그 사람을 틀 속에 넣고 편견 속에서 보기도 하고, 심지어 버스 손잡이를 어떻게 쥐느냐로 사람을 판단하기도 한다. 어른들은 정말 무모하고, 이런 판단을 즐긴다.
말 한마디 실수하면, 바로 '무례한 사람', 태도가 마음에 안 들면 '건방진 사람', 예배 태도가 조금 불량하다고 해서 그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단정한다.
어떤 형제가 설교 시간에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문자를 주고받았다. 설교 시간에 저러면 되는가 판단하느라 정작 내 자신은 설교를 못 들었다. 나중에 보니 그는 설교를 핸드폰에 받아적는 중이었다. 그는 설교를 잘 들어서 파악했고, 나는 판단하느라 설교를 못들었다.
조그마한 사실을 가지고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것을 우리는 큰 능력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어린아이처럼 살지 않고 교활하고 복잡한 어른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눅 18:9-14)에서 우리는 바리새인에게서 온갖 판단을 자행하는 어른의 모습을, 잘못을 시인해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는 세리에게서는 순박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본다.
오늘날 성도들은 이런 비유를 잘 배웠기 때문에 절대로 바리새인 흉내는 내지 않는다. 모두가 세리를 자처한다. 제법 겸손해 보인다. 그런데 만일 세리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을 판단하고 있으면 어떨까?
비록 외식일지라도 바리새인들의 뛰어난 윤리와 종교적인 모습을 가졌다. 이 모습은 오늘날에도 보기 힘들 정도다. 그런데도 자만심 때문에 예수님에게 책망받았는데, 하물며 바리새인의 발뒤꿈치도 안되는 세리가 자신은 바리새인이 아님을 감사하고, 바리새인들을 판단하고 있다면 어떨까?
바리새인의 건방짐은 그래도 견딜 만하지만, 세리의 건방짐은 견디기 어렵다.
오늘날에는 이런 건방진 세리가 넘쳐난다. 자신은 세리라고 자처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바리새인이라고 정죄하는 모습은 꼴불견이다. 오, 과거에 내가 그러했다. 주님,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함부로 남의 죄 판단하지 말고, 그냥 내 허물과 내 죄만 회개하자.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은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요 8:15)고 하셨다. 그 말씀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편견 없이 대하셨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전 4:5)라고 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형제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종종 우리는 판단하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분별과 혼동하면 안 된다. 순진해서 사기당하거나 보이스피싱 당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죄와 악은 제대로 분별해내야 하고, 단호해야 한다. 그러나 형제들을 대할 때 우리는 판단을 내려놓아야 한다.
성령 충만하면 너그러워진다.
매의 눈을 가지게 되지 않고 비둘기의 눈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친구들을 부담 없이 만날 수 있음은 그가 나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형제들을 이렇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형제들이 나를 두려워함은 내가 판단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다. 어느덧 교활한 어른으로 살고 있다.
주님,
교활한 어른의 삶에서 저를 건져주십시오.
판단하지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형제들을 대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도 편견없이 받고, 실천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