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3월10일(금)■
(유다서 1장)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묵상/유 1:14-19)
◆ 선지자 에녹
(14) 아담의 칠 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에녹은 창세기에 소개된 선지자다. 그는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하다가 365세에 승천하였다(창 5:21-24, 히 11:5). 홍수 이전에 있던 선지자로서 그의 활동이나 예언은 구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유다서에서 에녹의 말이 인용되고 있다. 유다는 어디에서 인용했을까?
대부분 주석가들은 '에녹서'라는 위경(僞經, Pseudepigrapha)을 인용했을 것으로 본다. 똑같은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에녹서는 에녹이 직접 기록한 책이 아니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말과 사람들의 상상들이 섞여서 후대에 그리스와 로마 신화처럼 쓰인 책이다. 절대로 정경이 될 수 없는 책이다. 유다가 인용했다고 해서 에녹서에 정경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유다도 에녹서가 위경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과연 유다는 위경에 불과한 에녹서를 성경으로 간주하고 인용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글을 인용한 것 뿐일까?
아마도 유다는 에녹서의 정경성 여부와 관계없이 당시 유대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미래에 올 심판을 경고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설사 에녹서가 대부분이 엉터리일지라도 그 속에도 분명한 역사적 진실이 있다. 곧 에녹이라는 선지자의 존재와 홍수 멸망이다.
선지자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그 이름이 '창 던지는 자'라는 의미였다. 이는 심판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과연 므두셀라가 죽을 때 어김없이 홍수가 일어났다. 창이 마침내 표적에 꽂힌 것이다. 므두셀라 생애 자체가 예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에녹의 경고는 비록 구전으로 내려온 것일지라도 매우 신빙성이 있다.
홍수 심판은 왜 일어났을까?
경건치 않은 자들의 각종 경건치 않은 행위 때문인데, 경건이란 세속의 마음을 끊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이다. 거기에는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겸손함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경건치 않음이란 그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세속적이고, 정욕적이며, 불순종으로 가득 찬 삶이다.
또한 주님을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들도 심판의 원인인데, 완악한 말이란, 억세게 고집스럽고 사나운 말이라는 뜻이다. 주님을 거슬러서 자기 고집을 세우고, 함부로 대적하는 말들을 내뱉는다는 것은 큰 죄다.
이들은 늘 남 탓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습관이며, 감사할 줄 모르고 늘 불만을 토했고, 정욕대로 행하며, 자기 자랑에 몰두하고, 이익을 위해서는 거짓말로 아첨했다.
이런 모습이 당시 홍수 심판받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나를 돌아보고, 내 모습 속에 이런 것이 들어있지 않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유다는 에녹의 예언을 통해서 에녹서의 정경 여부를 설명하려 함이 아니라 홍수 당시나 지금이나 같은 상황임을 설명하고자 함이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에녹처럼 선지자가 되어서 이것을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홍수 때처럼 안 믿다가 죽을 것인가, 정신 차리고 방주로 들어갈 것인가?
◆ 사도들의 경고
(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유다는 마지막 때의 특징을 설명한다.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마지막 때의 특징이 될 수 있을까? 경건하지 않은 것이야 세상 사람들에게는 늘 있는 일이 아닌가?
여기에서 정욕대로 행하고, 조롱하는 자들의 정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이 단순히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이라면, 말세의 특징이 될 수 없다. 유다가 언급한 이들은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다. 홍수 심판 때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타락하자 심판이 결정되었다(창 6:2).
옛날에는 이런 자들이 교회당에 다닐 일도 없었고, 이런 자들이 교회 지도자가 될 일은 절대로 없었다. 박해와 환난 속에서 교회 지도자가 되는 것은 말도 못 한 희생과 헌신이 동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세에는 이런 자들이 교회에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교인들을 이끄는 교회 지도자가 되어서 교인들을 타락시킬 것이다. 유다는 이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말세가 되면 교회에서 성도의 본이 되어야 할 교사들이 오히려 각종 정욕대로 행하면서도 뻔뻔하고, 탐심을 부리면서도 당당할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성경을 조롱할 것이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하지만, 이미 이러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 상당수의 신학자와 목사가 성경의 예언이 예언이 아니라, 역사적 기록을 예언 형식으로 쓴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이사야서 같은 예언서는 수 세대를 걸쳐 여러 명이 쓴 합작품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들은 성경을 거짓과 허위가 가득 찬 책으로 몰아간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조롱이자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이들은 학자를 가장하며 학문을 들먹이지만, 유다는 명확하게 이들의 특징을 말한다.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지니라'(19).
유다의 이 경고는 사도바울이 경고한 '배도'(살후 2:3)와도 일치한다. 배도자란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아니라, 소위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이다.
놀랍게도 교회 안에서 이런 자들이 점점 대세가 되는 듯하다. 신학교에서는 보수 신학 교수들이 쫓겨나고 '성경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 말씀'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무식한 시골 노인네 정도로 취급한다.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고, 교회를 자기 재산인 양 뻔뻔하게 세습하며, 자기 정욕대로 행하면서 성도들을 마구 부린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유다가 언급한 마지막 때가 가까웠음을 인지하고 더 각성하고 더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에녹이 심판을 경고하고 무려 969년 후에 홍수가 일어났다. 느린 듯하지만, 반드시 일어났다. 이제 주님의 재림도 마찬가지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지 2000년이 가까워져 오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듯하지만, 반드시 재림하신다.
조롱하는 자들은 조롱하도록 내버려 두라. 다만 우리는 더욱 믿음에 굳게 서서 정신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2-4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