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10(토)■
(사도행전 8장)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묵상/행 8:26-40)
◆ 빌립의 순종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26)
에디오피아 내시의 회심에는 한 사람의 순종이 있었다.
빌립은 주의 사자가 명령하자 즉시 순종하여 길을 걸었다. 가사는 오늘날의 가자지구라고 하는 곳으로 추정되는데,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70km 떨어진 곳이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돌아가는 길을 왜 그 방향으로 잡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갈 곳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났듯이, 빌립은 정확한 장소를 모른채로 순종하여 길을 나섰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순종이 오늘날 교회의 역사를 이루었다.
주님께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내게 성령의 감동을 주실 때, 나는 순종하는가?
◆ 에디오피아 내시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27)
에디오피아는 성경에서 구스, 또는 스바 등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에디오피아인은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었다.
에디오피아 국고를 맡은 관리가 예배하러 예루살렘까지 왔다는 것을 보면 그는 신앙심이 아주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가 애초에 유대인이었는지 아니면 유대교를 독실하게 믿은 이방인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만일 이방인이었다면 내시였던 그는 할례를 받을 수 없었으므로 유대인으로 귀화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에디오피아 간다게란 여왕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에디오피아 여왕을 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즉 애굽의 바로, 로마의 가이사와 같은 의미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다. 당시에 성경 두루마리는 매우 희귀하고 고가였기 때문에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위치와 재력이 남달랐음을 의미한다.
빌립이 도착했을 때 내시가 읽고 있던 부분은 이사야서 53장 7절이었다. 그 앞구절이 바로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이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이처럼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이사야 53장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예언들 중에 가장 독특한 부분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조차 곤혹을 느끼게 할 정도의 구체적인 예언이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분이 누군가 고민할 때 마침 빌립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다.
내시는 빌립의 전도에 눈이 밝아졌다. 예언된 분이 예수님이 아닌가! 예수님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에디오피아가 4세기에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 내시가 출발점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 내시의 회심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36)
37절은 개역개정성경에는 없는데, 한글킹제임스성경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빌립이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합당하니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나이다."라고 하더라. (한글킹제임스, KJV, NIV)
참고한 사본의 차이때문이겠지만, 개역개정성경은 이 구절을 생략하는 것보다는 넣어야 했다.
내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두 가지를 고백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두 가지는 전 세계의 교회와 성도가 공통으로 하는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이것을 하지 못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며, 이것을 믿지 않는 자는 신학박사라고 할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내시가 세례 받는 사건에서 우리는 몇 가지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일단 에디오피아 내시가 받은 세례는 물 속에 들어가는 침례였을 것이다. 오늘날 장로교에서처럼 물을 찍어바르는 것이었다면 구태어 물 있는 곳까지 갈 필요가 없다. 그냥 식수를 이용해서 머리에 찍어 바르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물을 찍어바르는 세례가 무효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초대교회에서 시행한 세례를 상기해보는 것이다.
두번째는 빌립이 집사에 불과한데 세례를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에 집사는 오늘날의 목사보다 훨씬 더 영성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베풀 자격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종교기득권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세례와 성찬의 자격을 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는 세례를 세례답게, 성찬을 성찬답게 만드는 것은 그 집례하는 자가 누구인가에 좌우되지 않았다(고전 1:13). 누구의 이름으로 베푸는가? 어떤 말씀을 의지해서 시행하는가? 그리고 참여하는 자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에 좌우되었다.
사극에서 보면 '왕명이요'라고 하며 왕의 조서를 높이 쳐들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엎드린다. 전달자가 어떤 직위인지,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의미가 없다. 오로지 그 왕의 명령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세례도 마친가지다. 세례 베푸는 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의 이름으로 베푸는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유명한 사람에게 세례받은 것을 자랑하는 순간, 그의 세례는 무효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떡 5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실 때 떡을 받은 사람이 나는 베드로에게 받았다고 자랑하거나 가룟유다에게 받은 사람은 불쾌하게 생각한다면 어떻겠는가? 떡을 베드로를 통해 받았든, 가룟유다를 통해 받았든 그것이 예수님께서 축복하시고 베푸신 떡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택배기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보고 바른 믿음으로 행한다면, 내 전통, 내 사고에 갇혀서 참된 신앙으로 살고 하는 자를 핍박하거나 오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빌립의 순종과 전도는 큰 도전이다. 이렇게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사역을 점점 확장해 나가신다.
주님, 빌립과 같은 전적인 순종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갈 곳 모르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삶이 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