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12(월)■
(사도행전 9장)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묵상/행 9:1-9)
◆ 잘못된 열심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1)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신앙에서 비롯되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잘못된 지식을 가진 자가 헌신적이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사도가 된 뒤에 사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왜곡된 지식을 가진 종교인처럼 무지막지하고 엉뚱한 사람도 없다. 그들은 비상식적인 일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고 나름대로는 신앙행위라고 굳게 믿는다.
가장 최악은 왜곡된 지식을 가진 자가 선생이 되고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야고보는 선생된 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으니 선생되려고 애쓰지말라고 했다.(약 3:1,2)
오랫동안 선생 노릇한 나는 나도 모르게 가르치는 말투가 되었다. 모든 것을 아는 체하고 모든 것에 조언하려고 한다. 이게 건방진 것이다. 참으로 두렵고 염려가 된다.
주님, 이 고약한 습성에서 저를 건져주십시요.
선생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말자.
어쩔 수 없다면 성경에서 확실하게 언급한 복음의 진리만을 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심판을 면하자.
◆ 사울의 회심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4)
사울은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으로서 메시야에 대한 구약의 예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야보다는 당시 지도자들과 자신이 적당히 가공한 메시야를 더 믿었다. 그렇게 만들언 틀에 예수를 대입해보니 아니었다. 그것이 분노하게 만들었고 박해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도 우리가 만든 틀에 하나님을 대입하는 어리석은 일을 종종 저지르지 않는가?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 틀이 완전히 부서졌다.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것은 압도하는 힘이었다.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자신이 그렇게 반대하던 예수님이 구약에서 말씀하던 바로 그 메시야라니!
그리스도인들이 통쾌함을 느끼는 때는 나를 박해하고 괴롭혔던 자가 벼락을 맞아 급사하는 때가 아니라 이렇게 자기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때다.
이제 바울에게 큰 질문이 생겼다.
도대체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왜 그렇게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까?
어떻게 그렇게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신단 말인가? 어떻게 그렇게 대단한 분이 그토록 사람들에게 무시받고 사실 수가 있단 말인가?
바울에게 있어서 놀라운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물 위를 걸으신 것이 아니라 피곤해서 배 위에 누워 주무시는 것이다. 그게 더 충격이다.
전에 바울이 멸시했던 서민적 예수의 삶이 이제는 가슴이 떨리는 감동으로 와 닿았다.
후에 이 감동은 바울 서신에서 계속 표현된다.
이제 바울의 십자가 복음은 온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는 악인이 망하는 것보다는 회개하고 돌이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살게 해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