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5-17(월)■
(사도행전 19장)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묵상/행 19:1-7)
◆ 에베소에 있는 어떤 제자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1)
바울이 에베소로 돌아왔다. 거기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란 예외 없이 모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행 2:41).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Luke)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성도(4회 사용)라는 말도 사용했지만, 제자(28회 사용)라는 말을 훨씬 더 즐겨 사용하였다. 제자는 헬라어로 '마테테스'라고 하는데, 그것은 '배우는 사람'이란 뜻이다.
바울은 '배운다'라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이렇게 말했었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 4:19,20). 모름지기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들이다. 그를 본받고, 그의 마음을 품으며, 그가 가신 길을 따라 걷는 자들이다. 그럴 마음이 없는 자들은 제자가 아니다.
◆ 물세례와 성령세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행 19:2)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이 제자들은 무언가가 부족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고, 성경도 꽤 잘 파악하고 있는데, 무언가 중요한 것이 하나 빠졌다. 그게 무엇일까?
바울은 즉시 이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했다. 그래서 바울이 질문을 던졌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오, 이 질문은 사도행전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신자는 믿으면 구원받고, 구원받은 자는 이미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배운다. 그런데 갑자기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이 얼마나 헷갈리는 질문인가? 이것은 마치 너희가 물속에 뛰어들었을 때 옷이 물에 젖었느냐는 질문처럼 멍청해 보인다. 아마도 구원 교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종일 토론만 하다가 끝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 질문을 통해서 신자 중에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정작 성령 체험은 없는 자들이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사실상 상당수의 신자가 그렇다.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성령세례를 가리킨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행 1:5)
모든 성도는 이미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신다(롬 8:9). 그들은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으로 반듯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있다. 심지어 아볼로처럼 곳곳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를 보고 무언가 부족한 것을 느끼고 집에 데려와 하나님의 도를 설명했듯이 그들에게는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다. 성령세례는 그것을 채울 것이다.
종종 사람들은 성령세례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오순절 계통의 사람들은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말한다. 그들은 틀렸다. 그런 편협한 주장 때문에 사람들이 성령세례보다 오히려 '방언'을 더 선호하게 되고, 그것은 미혹으로 가는 길이 된다. 누가(Luke)는 '위로부터의 능력'(눅 24:49)이라고 말했고, 로이드 존스는 모든 신자는 성령에 의한 세례(고전 12:13)는 받았지만, 사역을 위해서 부어주시는 능력의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로이드 존스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성령'은 바로 그러한 능력의 세례를 말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워치만 니는 내주하시는 성령과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구분하여 이것을 설명하였다.
단 한 번도 성령충만이 무엇인지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성령 세례를 이미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교리적인 설명일뿐이다. 그것은 그들이 계속 무기력한 삶을 살도록 유도한다.
성령충만은 교리를 배워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영적 체험이다. 성령께 사로잡히는 체험이고, 생수가 내 배에서 터져 나오는 경험이다. 이런 놀라운 경험을 최면 걸듯이 당신은 이미 그렇게 되었다는 설명으로 대치하겠는가? 성령세례는 반드시 성령충만이라는 영적 경험을 동반한다.
오늘날 많은 신자가 자신이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존심 상해하고 그런 교리를 멀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하게 주님께 성령의 능력을 구하면 주님께서는 결코 인색하신 분이 아니시다. 충만하게 부어주신다. 오늘날 많은 신자가 성령충만하지 않은 이유는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번듯하고, 제법 봉사도 잘하고 있지만,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간절함과 충성과 헌신, 그리고 예배에 대한 갈망, 복음 증거의 열정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다. 과거에는 이렇게 살다가 지금은 식어버린 사람도 있다. 이런 자들은 회개하고 다시 성령충만을 구해야 한다.
오늘 에베소 사람들은 바울이 안수할 때 모두 성령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들을 시작으로 에베소에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중심이 된 에베소 교회는 학문이 깊고 성령이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다. 바울이 에베소 신자들에게 보낸 에베소서는 이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깊고 아름다운 성도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성령세례를 구하라. 성령충만을 구하라.
이런 갈망과 구함을 금지하면 안된다. 그것은 성령을 소멸시키는 과오가 될 것이다.
주님, 성령을 부어주십시오. 더욱 충만하게 부어주십시오. 교회가 성령의 불로 타오르게 해주십시오. 이론과 설명만 난무한 이 시대에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나타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