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19(월)■
(에스겔 20장)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에 이르게 하고
11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12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13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에게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14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나라들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15 또 내가 내 손을 들어 광야에서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그들에게 허락한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지 아니하리라 한 것은
16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따라 나의 규례를 업신여기며 나의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음이라
17 그러나 내가 그들을 아껴서 광야에서 멸하여 아주 없이하지 아니하였었노라
18 내가 광야에서 그들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 조상들의 율례를 따르지 말며 그 규례를 지키지 말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19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나의 율례를 따르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
20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
21 그러나 그들의 자손이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지켜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따르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더럽힌지라 이에 내가 이르기를 내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내 분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내 진노를 이루리라 하였으나
22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손을 막아 달리 행하였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여러 나라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23 또 내가 내 손을 들어 광야에서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그들을 이방인 중에 흩으며 여러 민족 가운데에 헤치리라 하였나니
24 이는 그들이 나의 규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율례를 멸시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히고 눈으로 그들의 조상들의 우상들을 사모함이며
25 또 내가 그들에게 선하지 못한 율례와 능히 지키지 못할 규례를 주었고
26 그들이 장자를 다 화제로 드리는 그 예물로 내가 그들을 더럽혔음은 그들을 멸망하게 하여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였음이라
(묵상/겔 20:10-26)
◆ 삶을 얻을 율례와 복음
"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11)
율법은 모두 지키면 구원받는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내 율례'라고 하심으로써 분명히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이 복음과 충돌하는 듯이 보인다. 복음은 예수님 외에는 구원을 얻을 길이 없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행 4:12). 과연 모순인가?
바울은 이것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을 두 가지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율법이 삶의 길인 것은 맞지만,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죄성이 문제다. 이 죄성 때문에 인간은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다. 설사 지킨다고 해도 피상적으로 지킬 뿐 실체에 도달할 수가 없다. 율법에 극성이었던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여주었다.
이제 사랑의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다른 길을 주셨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길이다(롬 3:21). 분명히 율법도 길이다. 그런데 율법 외에 새로운 길을 주셨다. 오,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두 번째는 율법은 초등 학문이다(갈 4:3,9).
모름지기 유치원이란 정식 학교가 아니라 예비 학교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치는 곳이다. 동생 장난감 뺏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유치원 가르침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장난감 빼앗지 않는 수준보다 더 높은 사랑의 경지로 성장해야 한다. 우리가 정식 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유치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바울은 이렇게 놀라운 비유를 들면서 율법을 설명했건만, 성도들 중에는 다시 유치원으로 돌아가려는 자들이 있음을 경고했다(갈 4:9).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는 존재임을 모르셨을까?
그럴 리가 있는가?
다만 닭이 날개가 있다고 스스로 독수리로 착각하고 건방을 떠니까, 독수리는 고사하고 꿩만큼이라도 날아보라고 주신 것이다. 그 정도만 해도 인정해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구약을 읽어보면 구약 전체가 인간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통해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심판받아야 할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롬 3:19).
아, 사람들은 이것을 한낱 언어유희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치 수학을 배우는 목적이 자신이 머리가 나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말을 들으면 제법 일리가 있는 재미있는 말 정도로 여긴다. 그러나 그것을 진짜로 믿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게 정말 수학을 배우는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율법의 목적은 그런 언어유희가 아니다.
정말 율법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도 없고 의로움을 유지할 수도 없다. 많은 사람이 자신도 이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과 대화해보면 전혀 모르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닭이지만 믿으면 독수리가 됩니다. 이제 당신은 독수리니까 열심히 나세요. 너무나 그럴싸하다. 나도 그렇게 믿고 열심히 날갯짓했다. 그러나 조금도, 정말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약간의 도덕적인 우월로 교만해지고, 고집만 더 세졌을 뿐이다.
우리의 신분이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닭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날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곧 새로운 방식으로 나는 것이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처럼 날 수 있다고 했다(사 40:31)는 말을 자신이 독수리가 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 우리가 독수리처럼 날고 싶으면 하나님을 앙망하는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믿음을 가르쳐야 하고, 믿음으로 사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교회 개혁한다는 사람들조차 매일 도덕과 윤리 타령이나 하고 있다. 타락한 이 세대에 너무나 잘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기껏 대안으로 내세운다는 것이 율법 강화다. 아니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데, 아직도 율법을 대안으로 내세우는가? 그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수준은 꼭 바리새인 수준이다. 주님께서는 그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마 5:20).
이제 살길은 율법이 아니다. 믿음이다.
이제 율법으로 사는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의 방식을 깨우쳐야 한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구원 이후에는 율법으로 살아야 한다는 반쪽짜리 복음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나는 사람들이 강단에 서서 고상한 도덕이나 합리적인 윤리를 설교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고 복음도 모르고 있다.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만 유효하다(갈 3:24, 25). 믿음이 오고 나면 우리가 더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갈 3:24). 이 말씀의 의미를 진정으로 알게 되면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더는 율법의 방식이 아닌 믿음의 방식으로 살기로 하는 것이다(갈 3:19-20).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자신이 믿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전혀 믿고 있지 않다.
교회에는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다.
믿고 있다고 상상하는 무리와 진짜 믿는 무리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암송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그 앞의 19절도 함께 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20절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게 될 것이다. 바울의 이 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하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19, 20) 아멘, 아멘!
주님,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주님을 좀 더 알기를 원합니다. 더욱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믿음을 통해서 들어오는 주님의 품성을 제가 맛보게 해주시고, 더욱 주님을 닮아가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