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8(수)■
(에스겔 43장)
12 성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산 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리라 성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13 제단의 크기는 이러하니라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것이라 제단 밑받침의 높이는 한 척이요 그 사방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그 가로 둘린 턱의 너비는 한 뼘이니 이는 제단 밑받침이요
14 이 땅에 닿은 밑받침 면에서 아래층의 높이는 두 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이 아래층 면에서 이 층의 높이는 네 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15 그 번제단 위층의 높이는 네 척이며 그 번제하는 바닥에서 솟은 뿔이 넷이며
16 그 번제하는 바닥의 길이는 열두 척이요 너비도 열두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17 그 아래층의 길이는 열네 척이요 너비는 열네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그 밑받침에 둘린 턱의 너비는 반 척이며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니라 그 층계는 동쪽을 향하게 할지니라
1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는 이러하니라
19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를 가까이 하여 내게 수종드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너는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를 주어 속죄제물을 삼되
20 네가 그 피를 가져다가 제단의 네 뿔과 아래층 네 모퉁이와 사방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하게 하고
21 그 속죄제물의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성전의 정한 처소 곧 성소 밖에서 불사를지며
22 다음 날에는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삼아 드려서 그 제단을 정결하게 하기를 수송아지로 정결하게 함과 같이 하고
23 정결하게 하기를 마친 후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떼 가운데에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드리되
24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25 칠 일 동안은 매일 염소 한 마리를 갖추어 속죄제물을 삼고 또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떼 가운데에서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갖출 것이며
26 이같이 칠 일 동안 제단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려 정결하게 하며 드릴 것이요
27 이 모든 날이 찬 후 제팔일과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묵상/겔 43:12-27)
◆ 한 척의 길이
"제단의 크기는 이러하니라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것이라"(13)
한 척은 히브리어 '아마'을 번역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라틴어 성경의 규빗툼(cubitum)을 근거로 cubit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한 규빗은 사람의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다. 성서 대사전에는 한 규빗을 45cm라고 말한다. 그런데 네이버 지식 백과에는 한규빗을 대략 45.6cm라고 한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소수점 이하까지 말하면서 거기에 '대략'이라는 말을 붙이는지 모르겠다.
사람마다 걸음을 기준으로 길이를 정의하면 개인차가 커서 측량이 어렵지만 이렇게 팔꿈치 길이로 정의하면 개인차가 상당히 줄어든다.
그런데 에스겔 성전을 잴 때는 이 규빗에 손바닥 너비를 더했다. 손바닥 넓이를 더한 규빗의 정의는 성경에서 오직 에스겔 성전 치수에만 발견된다. 그래서 이것을 '신성 규빗'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주석에서는 이 길이를 52cm에서 53cm로 간주한다. 참고로 내 팔의 길이를 기준으로 한다면 51cm가 나온다.
◆ 번제단의 규모와 담긴 의미
"그 번제하는 바닥의 길이는 열두 척이요 너비도 열두 척이니 네모 반듯하고"(16)
번제단은 정사각형 모양으로 가로 세로가 열두 척, 대략 6m씩이다. 삼층으로 되어있는데, 높이는 열 척, 대략 5m다.
참고로 솔로몬 성전의 번제단은 가로 세로가 대략 9m씩 25평정도 된다(대하 4:1). 그런데 에스겔 성전의 번제단은 12평도 안된다. 절반도 안되는 셈이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에스겔 성전 자체의 크기는 솔로몬과 별 차이가 없지만, 성전 앞마당을 포함한 전체의 크기는 에스겔 성전이 솔로몬 성전의 무려 17배가 넘는다. 그렇게 규모가 큰 곳에서 앞마당에 놓인 번제단의 크기는 오히려 절반도 안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솔로몬 성전의 번제단도 작아서 솔로몬의 희생 제물을 다 용납할 수가 없어서 앞마당을 따로 구별하여 드렸을 정도였는데(대하 7:7), 그것을 절반으로 줄였으니 어떻게 온 백성의 제사가 가당할까?
따라서 에스겔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백성들의 속죄제를 위함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제단일 뿐이다.
◆ 에스겔 성전에서의 제사 의미
에스겔 성전의 번제단은 동쪽에서 계단으로 올라가게 되어있다.
이 제단에서 제사드리는 제사장은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19)이라고 규정하신다.
그리고 그는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로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제단을 정결케 한다.
속죄제 후에는 번제와 감사제를 드린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기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그 십자가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다.
십자가는 성경 전체의 중심에 서 있고,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주인공이시다.
우리를 속죄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 외에 다른 속죄 방법은 없다.
구약의 동물 희생 제사로 속죄를 받는 방법은 십자가의 그림자였을 뿐이다.
십자가 이후에 동물로 속죄제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AD 70년에 거대한 헤롯 성전이 무너지고 제사와 제사장이 사라진 것은 하나님의 섭리다.
실체가 왔으면 그림자는 역할을 다한 것이며 폐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에스겔에서 속죄제가 재개되는 것을 본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당황하고 주석가들은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서 에스겔의 성전을 영적인 비유로 간주하고, 어떤 자는 에스겔 성전을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함으로써 결국 실패한 건축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에스겔 성전의 번제단의 규모가 축소된 것은 에스겔 성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서 에스겔 성전의 목적은 구약의 제사를 복원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신다.
구약의 제사가 복원된다면 십자가는 무용지물이 되고, 복음은 폐기된다. 예수님은 더는 구약에서 말하는 그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고 그림자가 실체를 대체하는 기가 막힐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희생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라면 가능할 수 있다. 구약의 제사가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라면 에스겔에서 말해지는 제사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제사가 되어야 한다.
가령 우리가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죄 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 받은 것을 기억하며 기념하기 위해 성찬을 하는 것처럼 미래의 제사는 속죄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속죄하신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한 의미로 드려져야 한다.
에스겔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유대인들이 드리는 독특한 기념식이 될 것이다.
만일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죄 사함을 받기 위한 속죄제로 드려지는 제사가 된다면 에스겔은 복음과 충돌한다.
이러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에스겔 성전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많지만, 영적인 의미의 성전이라면 구태여 번제단을 절반으로 줄여놓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성전 뜰만큼이나 번제단을 거대하게 했어야 영적 의미가 산다.
에스겔 성전은 미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한 이후에 지어질 것이며, 거기서 이루어지는 제사는 모두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이 되리라 생각한다.
주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 외에 어느 것으로도 우리 죄를 속죄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만이 유일한 대속자이시며 영원히 찬양받으실 구주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