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1(월)■
(골로새서 4장)
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묵상/골 4:2-4)
◆ 기도하는 사람들
(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기도'라고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의 필요한 것을 간구하는 것으로만 정의한다. 그러니 아쉬울 것이 없을 때는 기도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기도를 계속하라는 사도의 명령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과연 기도란 무엇이 필요할 때만 꺼내쓰는 청구서 같은 것일까?
어떤 극단적인 교파에서는 기도 무용론을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내 모든 필요를 아시기 때문에 구태여 기도가 필요 없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그런 논리는 그럴싸해 보여도 궤변이다. 그들은 기도가 무엇인지 모른다.
오늘 말씀에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했다.
헬라어에는 깨어있으라로 시작된다.
이 미혹된 세상에서 성도가 어떻게 깨어 있는가?
기도 안에서 깨어있으라고 명한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명한다.
기도란 필요한 것을 간구하는 것이라고만 배운 사람들은 기도할 때, 울먹이며 투덜대는 태도로 기도하기 쉽다. 자신의 아쉬움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런 기도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기도는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다.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하는 것으로서 희망과 감사가 넘쳐 있어야 한다.
오, 기도는 무엇이 필요할 때만 사용하는 수단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생하게 해주는 수단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 기도는 나의 영혼을 늘 깨어있게 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사람이 고난 당하는 이유 중에 상당 부분은 감사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고난을 접하고야 뒤늦게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었는지를 깨닫는다. 건강한 것을 감사하고, 매일 양식을 주심을 감사하고, 가을 단풍을 감사하고, 푸른 하늘과 따뜻한 햇볕을 감사하라. 소리 내서 감사하라.
스펄전은 아주 멋있는 시를 썼다.
촛불 같은 은혜에 감사하면 별빛 같은 은혜를 주시고
별빛 같은 은혜에 감사하면 달빛 같은 은혜를 주시고
달빛 같은 은혜에 감사하면 햇빛 같은 은혜를 주시고
햇빛 같은 은혜에 감사하면 햇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의 은혜를 주시리
이런 감사를 마음으로만 품고 있지 말고 기도를 통해서 표현하라.
소리 내서 기도하고 고백하라.
그가 아무리 신학적 지식이 탁월하고 유창한 설교를 하며 세련된 매너를 가졌다고 해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 아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오직 기도하는 사람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삶에 아무런 능력이 없다. 주님께서는 기도 외에는 이런 능이 나갈 수 없다고 하셨다 (막 9:29).
◆ 도움 기도
(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기도는 종교의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효과 있는 것이다.
돈은 종이에 인쇄한 것이지만 종이 쪼가리가 아니다. 그것은 가치를 가지며 구매할 힘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기도는 단순한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을 움직이시게 하는 강력한 힘이다.
바울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기도를 요청했다.
비록 골로새 형제들이 바울보다 미숙하고 연약할지라도 바울은 형제들의 기도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잘 알았다.
교회 공동체로 모이는 이유 중의 하나가 함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혼자서 신앙생활 하는 자들은 이 위대한 협업을 이해하지 못한다. 형제들을 위해 도움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가?
많은 사람이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한다.
하지만 중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리테스'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개하는 의미로서 오직 예수님 같은 분에게만 쓸 수 있는 단어다(딤전 2:5). 아쉽게도 한글 킹제임스성경은 이 단어가 일반화되었다고 간주하여 중보기도라고 번역하기까지 했지만 나는 중보의 신분과 희생을 안 뒤부터는 감히 중보기도라는 말을 쓰지 못하겠다. 중보라는 말은 예수님을 위해 아껴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생각해보라. 바울의 서신을 받는 형제들이 사도 바울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가?
형제들을 위한 기도를 단순히 '도움기도'라고 말했으면 좋겠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간구함으로 도우라"(고후 1:11)
우리는 이렇게 기도로 서로 돕는 공동체다.
형제들을 위해 도움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선한 것이다.
내 기도가 산더미인데 어떻게 다른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겠느냐는 생각은 언뜻 그럴싸해 보이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오히려 내 기도를 잠시 내려놓고 형제들을 위해 기도해보라.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해결해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마 6:33).
주님,
감사합니다.
내게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합니다.
기도에 깨어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할 때 저를 만져주시고, 기도 속에서 생생하게 주님을 느끼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