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1월14일(금)■
(로마서 8장)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묵상/롬 8:3-11)
◆ 율법의 요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의 요구'란 무엇일까?
7장에서 바울은 '탐내지 말라'를 예로 들었다. 정당한 요구이지만, 막상 내 자신은 마음으로 그 요구를 완수할 수 없었다.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 큰 탐심이 나를 괴롭혔다.
탐내지 않으려는 노력은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율법의 요구가 어찌 탐내지 말라만 있겠는가?
율법의 궁극적 요구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마 22:37-40).
율법의 요구는 정당하지만, 나는 그 요구를 성취할 수 없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다.
3절에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이란 율법이 나를 의롭게 하는 데는 무기력하다는 의미다. 마치 포크로 수프를 떠먹으려고 할 때 느끼는 무력감과 같다. 포크는 강한 철로 되어 있지만 수프를 떠먹기에는 연약하다!
율법적 패러다임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를 요구한다.
그에 따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사랑하는 체만 할 뿐 진정한 사랑은 어림없다. 유대인들은 율법적 열정이 대단했지만, 막상 그들 안에는 사랑이 없었다(요 5:42).
겸손한 만큼 자아도취에 빠졌고, 실천한 만큼 그렇지 못한 타인을 판단함을 즐겼다. 겉의 행동이야 우리 의지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지만, 마음의 영역에서는 통제를 벗어난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포자기하며 살까?
아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복음적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 육신에 있는 자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인간의 문제는 단순히 노력과 의지의 부족에 있지 않다.
인간이 육신에 속한 존재라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예배를 드릴지라도, 헌금할지라도, 희생적인 봉사를 할지라도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한다. 그럴싸하지만, 결국 자아도취이며, 자기 자랑에 불과하다.
걸레는 잘 빨아서 다려도 걸레다. 그런 것으로 옷을 만들지 않는다.
육신도 그와 같다. 잘 훈련하고 교육해도 육신일 뿐이다. 다만 세련된 겉모습을 지닐 뿐이다.
"에티오피아 사람이 자기의 피부 색깔을 바꿀 수 있느냐? 표범이 자기의 반점들을 다르게 바꿀 수 있느냐? 만약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죄악에 익숙해진 너희도 선을 행할 수가 있을 것이다."(렘 13:23)
흑인이 자기 피부를 하얗게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육이나 제자 훈련이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
신종 바리새인이나 배출할 뿐이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 영에 속한 사람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복음적 삶의 방식은 놀랍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육신이 못 박히셨다(3). 이것은 우리의 육신이 개선돼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못 박혀서 죽어야 할 존재임을 교훈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성령이 필요함을 일깨우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
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계시다.
이 사실이 몹시 중요하다.
성령은 단순한 심리적 효과만이 아니다. 실제적 능력이시다.
성령이 오시는 순간, 우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이다(9).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경험하는 가장 놀라운 변화는 '새로운 갈망'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달게 느껴진다.
예배에 대한 갈망이 생긴다.
기도가 나온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그런 경험이 전혀 없다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보라.
거듭나지도 않고, 성령도 없는 사람을 거짓된 말로 위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과거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면, 아마도 마음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믿음이 약화한 탓일 것이다.
회개하고 돌이키자. 진정한 믿음을 구하자. 성령이 임하실 것이다.
아마도 열심히 이런 글을 읽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당신 안에 성령의 갈망이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이제 성령을 따라 살자.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나, 성령을 열심히 따르려고 애쓰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결국,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복음적 패러다임이란, 내용만 다를 뿐 방식은 똑같지 않은가? 과연 그럴까?
성령의 갈망이 내 안에 있다면, 이것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단순히 내 의지로 무엇을 행하고자 하는 삶이 아니라, 내 속에 거룩한 갈망을 따라 사는 삶이다.
나침반의 도움으로 지도를 해석하여 길을 찾아가는 방식과 내비게이션을 따라 길을 찾아가는 방식이 어떻게 똑같겠는가?
길치였던 나는 나침반과 지도를 동원해도 늘 헤매며 살았다. 지도를 잘 해석하고 방향을 잘 잡는 사람이 부러웠다. 그러나 내비게이션 시대가 열리자, 자랑할 것도 부러운 것도 없게 되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힘써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르면 율법의 요구가 저절로 이루어진다. 마치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다 보면 목적지에 이르는 것과 같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다.
몸이야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지만, 영적으로는 그들과 다른, 살아있는 존재다(10).
이 자각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것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성령께서 우리를 놀라운 삶으로 인도할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이 부분을 로마서는 설명할 것이다.
주님,
제 안에 성령께서 거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