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2월3일(금)■
(누가복음 19장)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묵상/눅 19:28-40)
◆ 감람원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여리고에서 출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베다니에 도착하셨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대략 2.7km정도 된다(요 11:189).
그런데 이 여정에서 누가는 하나를 생략했는데, 곧 예수님은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 들러서 함께 식사하시고, 거기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다루어졌다(요 12:1-8).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하루 묵으시고, 그다음 날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사건은 매우 의미 깊다. 이것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대략 550년 전의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이기 때문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이렇게 구약의 예언은 말세에 이루어질 예언을 제외하고는 단 한 개도 남김없이 모두 실현되었다. 만일 안 된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언의 오류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면, 예언되었지만 실현되지 않은 것을 찾아야 한다.
◆ 주가 쓰시겠다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인물이 있다. 나귀 주인이다. 당시 나귀가 꽤 비싼 동물인데, 오직 주님께서 쓰시겠다는 말에 선뜻 풀어준 주인은 누굴까?
하나님 나라에는 이렇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드려진 사람들이 많다. 오직 주님께서 사용하시겠다고 하니 아무런 반발 없이 무조건 '예'라고 하며 순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이날은 일요일로 추정된다. 예수님은 닷새 후 곧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곧 돌아가실 것은 잘 알고 계셨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시며 왕이심을 감추셨지만, 이제는 완전히 드러내셨다.
군중들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는 환호성을 마다하지 않으심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시고, 시인하신 것이다.
백마 타고 오셔도 모자랄 위대한 왕께서 겨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마치 한 나라의 대통령이 경차를 타고 궁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충격적이다. 이는 왕께서 우리를 섬기러 오셨음을 보여주신 겸손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예수님의 이 모습은 늘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고 과시하고 싶어 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 군중들의 찬양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겉옷을 펴서 나귀 새끼 위에 깔고, 길에 펼친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 존경의 표시를 한 셈이다. 당시의 옷의 가치를 안다면,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모든 존경을 다 받아주셨다. 인간 세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우를 받으신 셈이다. 닷새 후에 이 세상을 떠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이것이 무엇이 기쁘시겠는가마는 그래도 다 받아주신 것은 인간으로서는 영광이다.
'하늘에는 평화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목자들은 천사들의 찬양을 들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군중들의 찬양은 '하늘에는 평화'라고 한다.' 땅에는 평화'가 어울리지 않을까? 왜 하늘에는 평화라고 했을까? 어리석은 군중의 말로 치부하면 안 된다. 이들의 외침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이 땅은 예수님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 진리와 거짓의 싸움이 시작되고,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부딪혔다(눅 12:51). 평화는 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에게서 이루어진다.
베들레헴 천사들의 찬양도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중에 평화'라고 했다. 즉 평화는 이 땅이 아니라,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머문다.
종종 사회 운동하는 분들은 이 말씀을 곡해해서 이 땅의 평화를 위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인양 한다.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백성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궁극적 인 사역인 듯이 생각하는데, 아니다. 그런 사상은 변태적인 번영신학일 뿐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오셔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시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군중들이 '하늘에는 평화'라는 말은 메시아가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포한 것이라고 본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누리게 되는 하나님과의 평화이며,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영원히 누릴 속죄와, 그리스도의 통치하심으로 이루어질 평화다.
◆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다수의 힘이 진리가 되는 세상에서 온 세상이 복음을 반대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수에게 소외되는 것이 두려워서 나도 침묵할 것인가?
우리 주님께서 제자 된 자들까지 침묵한다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하셨다.
한때 다니엘서는 실화가 아니고 우화라고 설이 강력하게 힘을 얻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벨사살 왕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왕이라는 것이 그 주장의 근거다. 조선시대 왕들이 뻔한데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왕 이름이 등장한다면 그 역사책은 소설이라는 주장이다. 일리가 있다. 모두가 침묵했다.
그런데 1854년에 영국의 한 영사가 바벨론 갈대아 우르에 있는 신전의 폐허 속에서 조그만 점토 기둥을 발굴했습니다. 그 기둥에는 가로세로 10cm 정도의 정방형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내용이 다음 같았다.
' 바벨론 왕인 나 곧 나보니두스가 당신께 죄를 짓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장남이며 사랑하는 아들인 벨사살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이 있게 해주십시오.'
모두가 침묵에 빠지자 돌들이 소리를 친 셈이다.
우리가 침묵하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소리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침묵의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돌들이 소리치도록 하면 안 된다. 우리가 소리쳐야 한다.
주님,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데 주저하지 말고, 담대하게 해주십시오.
지치지 않게 해주시고, 게으르지 않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