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2월8일(수)■
(누가복음 20장)
20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1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23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묵상/눅 20:20-26)
◆ 트집잡는 자들
(20)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나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이 끊임없이 트집 잡고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나 피곤할까? 예수님의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들끓었다. 예수님의 3년도 채 안 되는 사역 속에 이렇게 적들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 때문에 할 일을 못 하시거나, 주눅이 들지 않으셨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강함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두 부류가 있다.
진리와 믿음의 도를 실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천에는 관심이 없고 남의 말을 트집 잡거나 비판하는 데만 열심인 사람이 있다.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
복음 전도자 디엘 무디는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백만 명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미국 부흥의 주역이 되었고, 미국은 그 영향으로 20세기에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대단한 사역을 감당했다.
그런데 어디를 가나 디엘 무디의 낮은 학력을 멸시하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날 무디가 말씀을 전하고 내려오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당신의 설교에는 무려 오십 군데가 넘는 문법적인 오류가 있었소"
그러자 무디는 말했다.
"나는 부족한 능력으로라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소. 그런데 당신은 그 뛰어난 능력으로 무엇을 한단 말이오?"
남들이 모두 청소하고 있을 때 자신은 뒹굴면서 누가 청소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판단만 하고 있다면, 어떨까? 자기 일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남을 비판할 시간이 없다.
◆ 이중 국가 시민
(25)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로마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로마를 대항하는 여러 결사 단체도 있었다. 로마 제국에 세금을 바쳐야만 하느냐 마느냐는 마치 일제강점기에 우리가 일본의 조선총독부에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마느냐를 묻는 것과 같다.
유대인 환심을 얻으려면, 바칠 필요가 없다고 해야 하고, 로마의 환심을 얻으려면 바쳐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어떤 대답을 해도 공격받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동전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시고, 거기에 있는 가이사의 형상을 보이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다.
이 대답은 단순히 함정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애매하게 대답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실한 지표를 주신 것이다.
트집 잡는 자들이 1번이냐 2번이냐를 물었는데, 예수님은 3번을 말씀하신 셈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세속국가 시민이자 동시에 하나님 나라 시민임을 일깨우셨다. 그리고 이중국가 시민의 눈으로 세속국가를 바라보아야 함을 알리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씀은 그 통치 체제가 어떠하든 간에 시민의 의무를 다하라는 의미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아주 명백하게 해석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 13:7)
지금 질서를 잡고 통치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인정하고 협조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또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영원한 나라와 일시적인 나라 사이에서 이중 국가 시민임을 일깨우시고, 동시에 올바른 우선순위와 올바른 가치 매김을 하라는 교훈이시다. 적어도 영원한 세계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공항에서 비행기 타기 위해 게이트에서 버스로 이동할 때가 있다. 몇 분 남짓한 이동을 자리에 앉아서 가겠다고 사람들을 밀치고 뛰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영원하고 위대한 하나님 나라 시민의 입장에서 일시적인 세속국가 시민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세속국가 시민의 의무를 다할 따름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중국 선교한답시고 공산당 타도나 외쳐댄다면 어떻게 될까? 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백 배 더 좋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민주화가 되면 과연 하나님 나라가 더 확장될까? 그렇다면 과연 민주주의를 자부하는 미국이나 대한민국은 하나님 나라가 더욱 확장되고 있는가?
민주 국가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정치색을 가질 수 있다. 어느 진영에 속해있든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십자가는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음을 잊지 말라. 우리의 전도 대상은 우파건 좌파건 가리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 들고 어느 한쪽을 편들면, 다른 한쪽을 적으로 만드는 셈이다. 그들도 우리 전도 대상인데, 왜 그래야 하는가?
십자가는 보수진영 편도 아니고 진보진영 편도 아니다. 그리고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중에 누가 진리인가라는 식의 편 가름도 용납하지 않는다.
주님을 장사판에 이용하면 안 되듯이, 정치판에 이용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우리는 정당하게 투표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면, 내가 찬성하는 진영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맡은 바 역할을 잘하도록 기도하고 응원해야 한다. 그게 옳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은 정치 이야기에 얼굴색이 바뀌고, 증오와 분노가 넘실댄다. 미혹 중에 이런 미혹이 없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이 간단한 원칙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세속국가와 하나님 나라 양쪽에 속한 시민이다. 양쪽에 모두 성실해야 한다. 그렇지만, 언제나 하나님 나라가 우선임을 잊지 말자. 민주주의, 경제 발전, 다 좋다. 그러나 이 가치가 하나님 나라 가치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예수님의 이 간단한 원리가 정치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 듯하지만, 사실은 세계 정치와 역사를 바꾸어왔다. 로마 황제가 예수님을 믿으니 로마가 바뀌었다. 예수님을 믿는 아브라함 링컨이 미국 대통령이 되니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도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위치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내면 세상이 바뀌고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이중국가 시민으로서 세금 제대로 바치고, 헌금도 잘 내고,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자. 정치색 때문에 교회 분열 일으키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우선임을 결코 잊지 말자.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임도 잊지 말고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
주님,
올바른 가치관과 분별력을 허락하셔서 이 미혹의 시대에서 중심을 잘 잡게 해주십시오. 이 사람, 저 사람의 선동에 휘둘리지 않게 해주시고, 이중 국가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