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2월9일(목)■
(누가복음 20장)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묵상/눅 20:27-40)
◆ 짧은 생각, 어리석은 결론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유대인들 중에 종교 지도자들은 두 부류가 있었다. 대제사장들 중심으로 형성된 사두개파와 학자와 랍비들 중심으로 형성된 바리새파가 있었다. 에세네파도 있지만 성경에서 언급되지는 않는다.
바리새파와는 사두개파와 교리상으로 크게 다른 점이 있었는데,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았고 바리새파는 부활을 믿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꾸미고 있는 사두개파가 예수님께 와서 부활 논쟁을 벌였다는 것이 다소 생뚱맞다. 갑자기 학자들 간에 벌일만한 한가한 논쟁을 왜 이 시점에서 시도했을까?
이것은 매우 의도적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예수께서 평소에 부활에 대한 가르치심을 알고 있었거나(요 5:29),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무덤에 병사를 배치하도록 요청한 것(마 27:62-63)을 미루어볼 때 이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아무튼 이들은 부활을 논쟁거리로 삼은 것은 단순히 궁금해서가 아니라, 부활을 주장하는 예수님이 얼마나 황당하고 비성경적인지를 청중들 앞에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성경은 부활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그 근거는 매우 기발하고 참신해 보였다. 율법에는 자식이 없이 죽을 경우 그 사람의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주고, 그 자식이 형의 이름을 잇도록 했다(신 25:5-10). 이를 '계대결혼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칠 형제가 이 계대결혼법에 의해서 한 여자와 결혼했을 경우 부활이 만일 있다면 남편 일곱의 한 여자가 생기는데, 이것은 율법에서 혐오하는 모순이다.
수학에서는 결론이 모순이면 가정은 부정된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부활은 부정되어야 한다.
사두개인들은 이런 기가 막힌 논증에 자신도 감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주 중요한 전제 조건을 놓쳤다. 저 세상은 이 세상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부활한 존재는 장가도, 시집도 안 가고 천사와 같은 존재임을 알리셨다. 이 전제 조건을 무시한 사두개인들의 논증은 그야말로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학문세계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나름대로는 논리적으로 완벽하다고 내세우지만, 진리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유치하고 허황하다. 신학에서도 종종 이런 헛된 이론이 나타난다.
진리를 아는 자들이 헛된 이론의 책들을 읽으면 그 유치함과 어리석음에 놀라고, 또 그런 이론에 감탄하는 사람에게도 놀란다.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는 시각장애자가 나와서 무지개의 컬러를 논하고, 그 논증에 감탄하는 시각장애자들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영적 세계와 차원이 다른 세상이 있음을 기억하라. 이성으로 이해되기 전에는 절대로 안 믿겠다고하는 자는 결코 진리의 세계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가 진리를 알려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면 논리가 아니라 직관으로 진리를 깨닫게 된다. 한마디로 교육이나 연구를 통해서 배운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한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렇게 자기 이론을 늘어놓던 욥은 하나님을 뵙게 되자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 6)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을 다 거두어들이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자.
◆ 부활이 있다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사두개파는 율법을 통해서 부활이 없음을 주장했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율법을 통해서 부활을 증명하신다. 전자가 전제조건을 고려치 않은 사이비 이론이라면 후자는 참된 진리다.
사두개파는 구약성경에서 오로지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이들에게 부활을 증명하려면 모세 오경에서 인용해야 하는데, 지혜로우신 우리 주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으로 소개한 부분을 통해서 부활을 증거하셨다.
모세 시점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두 400년 이전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가 아니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라는 현재형으로 스스로를 소개하셨음을 모세는 기록했다.
히브리어는 특성상 동사의 시제를 구분하기 어렵지만, 뛰어난 히브리 학자들이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에는 시제를 아주 명쾌하게 번역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에서 헬라어 '에고 에이미(εγω ειμι)'는 'I am'이란 의미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사두개인들이 계대결혼법으로 부활을 부정하려고 한 것 기발하지만, 예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소개에서 부활을 증명하신 것은 더 기발하다. 그리고 사두개인의 논증은 엉터리지만 예수님의 논증은 참되시다.
그리고 며칠 후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제 삼일에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논쟁을 종식하실 것이다. 부활하신 사실(fact) 앞에서 무슨 이론이 필요한가?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38)
주님께서는 이 선언을 통해서 사람은 소멸되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사는 존재임을 가르쳐주셨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저세상이 있는데, 사실은 거기가 진짜 중요하다. 여기서는 잠깐 살다 가지만, 거기서는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저세상을 위해 잘 준비해야 한다.
튀르키예의 지진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 많은 사연이 안타깝다. 그러나 계시록의 환난 때가 되면 남아있는 사람보다 재난으로 죽은 성도가 오히려 편하게 죽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부활과 저세상이 있음을 아는 우리는 언제라도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도록 믿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주님,
어리석은 인간의 논리에 속지 않게 해주십시오.
짧은 인생에 매여서 종처럼 살지 말게 하시고,
늘 믿음 안에 거하며, 언제라도 주님 앞에 갈 수 있도록 준비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