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2월9일(금)■
(누가복음 20장)
4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묵상/눅 20:41-47)
◆ 다윗의 뿌리
(4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사람들은 종종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마 9:27, 마 15:22).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자손'은 곧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말이었다.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게 됨은 선지자들이 다윗의 자손 중에 그리스도(메시아)가 탄생할 것을 예언했기 때문이다(사 11:10, 렘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렘 23:5)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는 것이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셨다.
다윗이 쓴 시편 110편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 110:1)
다윗이 볼 때,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분이 있는데, 다윗은 이 분을 '주님'이라고 불렀다. 이분이 누굴까?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다윗은 말년에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여러 시들을 남겼는데(삼하 23:1-2), 아마도 이 시도 말년에 쓴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통해 선지자들의 예언이 틀렸다고 지적하신 것일까?
아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면서,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다윗보다 열등한 존재, 즉 제2의 다윗처럼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일깨우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2의 여호수아니, 제2의 다윗으로 여겨지면 안 된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형이 아니라, 그들의 원형이시기 때문이다.
본고사를 위해 모의고사를 무수히 치르지만, 누구도 본고사를 제2의 모의고사라고 여기지 않는다. 모든 모의고사는 오로지 본고사의 유형을 모방하여 낸 시험에 불과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등은 구약성경에서 대단하게 취급된 인물들이고 구약에는 무수히 많은 사건이 그리스도를 암시하지만, 모두 모의고사에 불과하다. 예수님께서 본고사다.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신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계 22:16)
이는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다윗의 주님이시며, 창조주되심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수많은 그리스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그리스도이시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또 다른 그리스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유일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정통과 사이비가 구분된다. 예수님께서 앉으셔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다면 그 자체가 바로 이단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신천지가 그렇고, 각종 이단이 그렇다.
◆ 외식을 삼가라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당시에 서기관들은 주로 바리새파 사람들로서 백성의 랍비 즉 선생 노릇을 많이 했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받으며, 존경받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이들은 무엇이 문제일까?
이들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것을 즐기고 있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존경받을 수 있다면 어떤 불편함도 잘 참아낸다.
사람들은 외모를 중시하며, 도사들의 진실과 겸손보다는 그들의 누더기 옷에 더 열광한다. 사람 속에 있는 사랑보다는 그가 먹는 거친 음식과 빈궁한 살림에 더 존경을 보낸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실천함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본질적인 것을 볼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의 추구 방향이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것이라면 아무리 내가 훌륭하게 살아도 그것은 외식이며, 가증한 것임을 일깨우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고 했다(47).
당시 서기관들은 겉으로 보았을 때 율법 준수를 열심히 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과부를 삼켰다는 지적은 아무리 봐도 너무 나가신듯 하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지적이 얼마나 예리한지를 깨닫고 전율하게 된다.
이들은 어떤 식으로 과부의 가산을 삼켰을까?
이들은 사람들에게 헌금을 강조하며, 자신들같은 주의 종을 대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신앙이 좋은 과부들은 그 없는 살림조차 털어서 이들에게 헌금했고, 이들은 이것을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라고 추켜세우고 축복 기도도 해주었다. 이들은 자기들에게 헌금하는 것을 '고르반'이라고 하면서 부모보다 더 공경을 받으려고 했다(막 7:11). 이들은 돈을 좋아했다(눅 16:14).
어떤 교회 집사가 하소연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부흥회에 강사가 왔는데, 주님의 종을 잘 대접해야 복을 받으니, 복 받게 해주겠다고 가난한 형편인 자기를 데리고 가서 비싼 갈비를 대접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폐지 주워서 근근히 사는 사람들에게조차 하나님의 종이랍시고 대접받으려고 한다면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제자 된 우리는 그런 서기관의 행태를 본받으면 안 된다. 그런 문화에 휩쓸려서도 안 된다.
제자된 우리는 대접받는데 익숙해지면 안된다. 그러다가는 본의 아니게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 꼴이 될 수 있다. 엄중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인생관에서 사람들의 대접받거나 존경받는 것이 목표가 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주님,
저를 사람들의 칭찬에 목말라하지 말고,
이런 것을 추구하는 악한 죄성에서 건져주십시오.
저로 진실하게 하시고 겸손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