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3월28일(화)■
(아모스 5장)
14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17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21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25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26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기윤과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27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묵상/암 5:14-27)
◆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여호와의 날이란, 여호와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왕이 되셔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날이다.
당시에 백성들은 삶이 고달프다 보니, 속히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해서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세상에 염증이 생겨서 여호와의 날을 사모한다.
이들은 여호와의 날이 오면 이 세상에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사라질 것이며, 악인이 없는 진정한 행복한 사회가 시작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제거될 악인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짐작도 못 했다. 다른 사람은 악하고, 자기는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단지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미처 몰랐다.
여호와의 날은 꼭 재림 시에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가 죽는 날도 내게는 여호와의 날이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이다. 물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은총으로 심판을 면하고, 복된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와 진짜 믿는 자는 다르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이 싫어서 자살하는데, 저세상이 없거나, 혹은 저세상은 이곳보다는 좋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아니다. 자살로 이 세상을 도피함은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는 것과 같고, 집이라고 안심하고 벽을 짚었는데, 뱀에게 물리는 것과 같다(19). 이 세상이 지옥 같다고 말들 하지만, 그래도 지옥 짝퉁에 불과하다. 죽은 후에 가는 지옥은 오리지널 지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자의 죽음은 그야말로 끔찍하다.
아프리카에서 기근으로 굶어 죽은 사람이나 터키의 지진으로 죽은 사람들만 비참한 것이 아니라, 배에 기름이 잔뜩 끼고 호의호식하는 사람도 거듭나지 않으면 똑같이 비참하다.
바울은 사슬에 매인 채로 감히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행 26:29) 왕의 눈에는 바울이 비참해 보였지만, 바울의 눈에는 왕이 비참해 보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다.
겉으로는 명품을 걸치고 고급 차를 타고 다녀도 그 속은 비쩍 마른 영혼이 퀭한 눈을 끔벅거리며 목말라하고 있다. 디엘 무디는 길을 걷다가 갑자기 이런 비참한 영혼들의 모습에 너무 가슴이 아파서 전봇대를 붙잡고 울었다. 결국 그는 수백만 명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19세기 미국 최고의 전도자가 되었다.
◆ 더는 예배를 받지 않겠다
(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레위기 26장은 율법의 저주가 기록된 장이다. 이스라엘이 말을 안 들으면 저주를 내리시는데,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다시 일곱 배의 저주를 내리신다. 그래도 안 들으면 거기에 일곱 배, ...이런 식으로 무려 일곱 배를 네 번이나 반복하시면서 저주를 내리신다. 그런데 마지막 저주가 무엇인지 아는가?
마지막 저주는 성소 폐쇄다(레 26:31).
하나님께서 더는 예배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실 때,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더는 찬양을 듣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23). 인간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으로 크게 생색내지만, 실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오히려 우리가 얻는 은총이 수백, 수천 배 크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와 찬양을 받지 않겠다고 하심은 아주 단단히 노하신 것이다.
왜 이토록 노여워하시는가?
어떻게 하면 이 노여움을 푸실 수 있을까?
◆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종교 장사꾼들은 정의니, 공의니 하는 것에는 관심 없다. 십일조, 주일성수 이런 것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에 관심 없는 자들의 모든 종교의식을 거절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정의와 공의에 비하면 십일조와 주일성수는 하루살이에 불과하다고 하셨다(마 23:23-24).
오늘 본문에서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15)라고 하셨는데 당시에 백성의 원로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성문에 모여서 의논하고 재판하였다(신 22:15, 삼하 19:8). 이로 미루어볼 때, 정의는 공정한 재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들은 뇌물을 받지 않고, 신용을 지켰다는 이유로 자신이 꽤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의를 세우는 일은 공정과 진실을 바탕으로 한 재판 행위로서 절대로 쉽지 않다.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를 보면 대단히 유명한 종교인들이 의외로 정의롭지 못하게 행동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들은 말로는 정의와 진실을 앞세웠지만, 실제로는 자존심과 감정과 이익때문에 서로 편을 가르고 싸우며 분열하였다.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시키기 위해서 궤변을 늘어놓는 것도 전혀 정의롭지 않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라!" (암 5:24)
이 말씀을 외우자. 그래서 적어도 내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영역만큼은 정의롭고, 공정하여지도록 하자.
◆ 우상 숭배의 종말
(26)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기윤과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표현한 오류는 결국 각종 우상을 도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금송아지가 하나님을 대신했는데, 하늘의 별은 못 하겠는가?
식굿과 기윤은 토성의 신을 말하는데, 히브리어 식구츠(가증한 것), 키윤(증오해야할 자)으로 발음하심으로써 우상의 역겨움을 드러내셨다.
그토록 우상을 성실하게 섬긴 대가는 결국 그 우상을 짊어지고 타국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결말이다.
그런데 25절에서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라고 되물으시는데, 이 구절이 난해하다. 광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희생과 소제물을 부지런히 드린 것 같은데, 이게 무슨 뜻일까?
본래 이스라엘의 제사 의식은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지키도록 한 의식들이다. 그러나 1년간 성막이 만들어진 후 다시 6개월 만에 가나안에 도착했지만, 백성들의 불신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실패하면서 결국 40년 동안 광야를 맴돌게 되었다.
그런데 40년 동안 할례를 제대로 행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수 5:5), 모든 것은 유보되었든 듯하다. 설사 드렸다고 한들 불평과 원망이 가득한 제사와 희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항상 사랑을 주건만, 늘 배반하고, 우상에게 한눈파는 완고한 백성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할까?
애석하게도 선지자의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27절에서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갈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이런 예언이 있은 지 40년 안팎에서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다메섹 밖으로 옮겨졌다.
회개의 눈물을 흘릴 기회를 버린 자들은 비통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16절에 보면 심지어 울음꾼까지 동원해서 비통함을 표현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죄 때문에 회개하는 애통은 복이 있다. 그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 5:4). 그러나 애통할 기회를 놓치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주님,
지금은 은혜의 때라고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아는 은혜, 성령 충만의 은혜, 더욱 진실하게 되는 은혜를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