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14(수)■
(사도행전 9장)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묵상/행 9:23-31)
◆ 핍박받는 사울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23)
여러 날이란 대략 3년 정도의 기간일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신이 회심한 후의 행적을 밝히고 있다. 다메섹에서 바로 예루살렘에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다(갈 1:16-18). 오늘 본문은 다시 다메섹에 돌아온 시점에서 기록된 듯하다.
사울은 아라비아에 가서 누구의 가르침도,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직접 계시를 받아 복음의 진리를 깨달았다. 바울에 의해서 비로소 기독교는 유대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고, 율법과 복음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십자가와 부활과 교회의 진리를 아주 선명하게 설명한 자도 바울이었다.
이제 유대인들은 바울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자임을 깨달았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유대교가 사라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바울을 죽이려고 결정하고 그를 노리자 제자들이 광주리에 담아서 그를 피신시켰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23)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 장본인이 막상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살기위해서 광주리를 타고 도망갈 때, 사울의 심정이 어땠을까?
후에 사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하면서 이 사건을 언급한 것을 보면(고후 11:30-33), 아마도 광주리 안에서 자신에게 깊은 자괴감을 느꼈던 것 같다.
◆ 바나바의 중재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27)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다메섹에서 나와서 바로 예루살렘에 간 것처럼 보이지만, 이 사건은 회심한지 무려 3년 후다(갈 1:18)
무려 3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는 스데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사울은 여전히 악명 높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그를 의심했다. 그런데 바나바가 데리고 다니면서 사도들에게 보증을 섰다.
바나바가 이렇게 중재하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교회는 이렇게 사람 사이를 중재하고 화목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사울을 간증을 듣고 사울을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준 예루살렘 교회도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다.
사울은 이때 예루살렘에서 15일을 머물렀다고 했다(갈 1:18). 이때 처음으로 베드로를 만나서 교제했다. 살기등등했던 바울이 순한 양이 되어서 베드로의 말을 경청하며 들었을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똑똑한 바울은 이때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행적을 충분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깨달은 복음과 예수님 생전의 가르침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도 바울이 계시받은 십자가의 복음에 감탄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벧후 3:15)
◆ 교회가 든든히 서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
핍박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은 왜 핍박을 보고만 계시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손 놓고 계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핍박했던 자들의 괴수 사울이란 자를 회심하게 하셨고,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위로하셨다.
핍박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성령의 위로가 사라짐이 무서운 것이다. 성령의 위로가 있다면 핍박도 견딜만 하다. 욥의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이 당한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이었다.
20년 전에 중국교회는 핍박 속에서 엄청난 부흥을 했다. 핍박 속에서 성도들은 더욱 성령충만했고, 기도가 더욱 간절했으며, 교회 지도자들은 순수하게 빛났다.
그런데 핍박이 없어지며 살만해지자 교회는 무기력해지고, 기도가 사라졌으며, 부패한 지도자들과 종교기득권을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이제 중국에서 다시 핍박이 시작되고 있다. 대략 10년동안 제법 평안을 누렸던 교회가 당황하고 있다. 그러나 핍박을 통해서 교회는 오히려 더욱 든든히 서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1910년대에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이 있었고 1970년대에 부흥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 식어버렸다. 주님께서 한국교회를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 한번 부흥이 일어나게 해주시길 구한다.
주님, 한국교회에 다시 부흥의 기회를 주십시오. 다시 한번 각성의 기회를 주십시오. 교회가 새롭게 되고, 진정한 교회들이 나타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