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20(화)■
(에스겔 20장)
27 그런즉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 조상들이 또 내게 범죄하여 나를 욕되게 하였느니라
28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였더니 그들이 모든 높은 산과 모든 무성한 나무를 보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노하게 하는 제물을 올리며 거기서 또 분향하고 전제물을 부어 드린지라
29 이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다니는 산당이 무엇이냐 하였노라 (그것을 오늘날까지 바마라 일컫느니라)
30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조상들의 풍속을 따라 너희 자신을 더럽히며 그 모든 가증한 것을 따라 행음하느냐
31 너희가 또 너희 아들을 화제로 삼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오늘까지 너희 자신을 우상들로 말미암아 더럽히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겠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32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경배하리라 하거니와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
3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반드시 다스릴지라
34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여러 나라에서 나오게 하며 너희의 흩어진 여러 지방에서 모아내고
35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광야에 이르러 거기에서 너희를 대면하여 심판하되
36 내가 애굽 땅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을 심판한 것 같이 너희를 심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7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38 너희 가운데에서 반역하는 자와 내게 범죄하는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지라 그들을 그 머물러 살던 땅에서는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는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묵상/겔 20:27-38)
◆ 우리를 미혹하는 것 1
"너희가 조상들의 풍속을 따라 너희 자신을 더럽히며 그 모든 가증한 것을 따라 행음하느냐"(30)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조상들이 섬기던 우상을 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높은 산에 오르다 보면 무언가 영험해 보이는 장소가 반드시 한두 곳이 있다. 무성한 나무와 그늘진 장소를 보면 무언가 경건해지는 분위기가 생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나무 밑에 제단을 만들었고 산당을 세워서 그들의 우상을 섬겼다. 그것이 삼 사대를 이어서 내려가다 보면 그것이 풍속이 되고 전통이 된다. 사람이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자기가 속해있는 사회의 풍속과 전통이다. 풍속이란 마치 물과 같고 사람은 물속의 고기와 같아서 떼려야 뗄 수가 없다. 더러운 물속에 살면 고기는 죽어가지만 별 대책이 없다. 누군가 개입해서 물고기를 맑은 물로 옮겨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우리가 이 세상 풍속에서 건짐을 받았다(엡 2: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로 따로 모일 것을 명하신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 풍속에서 보호되고 말씀으로 새롭게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올바른 문화에 젖어 들게 하심이다(고후 6:17). 그래서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실 것이다(고전 3:16-17). 슬프게도 이 시대의 교회들은 너무나 세상 풍속에 물들어 있다. 깨어서 분별해야 할 때이며, 성령의 각성이 필요할 때다.
◆ 우리를 미혹하는 것 2
"너희가 또 너희 아들을 화제로 삼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오늘까지 너희 자신을 우상들로 말미암아 더럽히느냐"(31)
도대체 목석을 섬기는 우상숭배는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홍수 전에 인간들은 너무나 육적이어서 멸망했지만 목석 우상을 섬긴 흔적은 없다. 다만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서 자기 멋대로 살았을 뿐이다.
홍수 후에도 인간들이 바벨탑 사건에서 하나님이 흩으셨으나 아직 목석 우상을 섬긴 흔적은 없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기록이 나온다(수 24:2). 이것을 보면 아마도 바벨탑 이후부터 우상숭배가 시작되었던 듯하다. 아브라함은 바벨탑 사건 191년 후에 태어났고 우상숭배가 급속히 세상에 번져갈 무렵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야곱의 시대에만 해도 이미 목석 우상은 일반화되어서 야곱은 자기 식구들이 가진 이방 신상을 땅속에 묻도록 지시할 정도였다(창 35:1-4).
그렇다면 아들을 불 속에 태우는 화제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쓸데없는 호기심 같지만 이 질문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런 제사는 아브라함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고,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제지하시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외함을 칭찬하시면서 그에게 엄청난 복을 주셨다.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
이 이야기가 와전되면서 이렇게 아들을 희생으로 드리는 제사가 생겨난 듯하다.
자기가 가장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바쳐야 하나님께서 그 정성에 감동하시고 어려운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미신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후로 아들을 제사로 드릴 것을 요구하신 적도 없고, 그런 행위 자체를 역겨워하셨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아들을 바치면서 자기에게도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강요했다. 만일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 사랑을 담아서 오만원짜리 선물을 한 것에 감동을 하여서 당신이 그에게 자동차를 선물했다고 하자. 그 소식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그 두 배인 십 만 원짜리 선물을 하면서 집을 하나 사 달라고 요구하면 어떨까?
종교가 위험하게 되는 경우는 처음 행위의 그 동기를 살피지 않고 단순히 행위만 모방하여 똑같은 결과를 얻고자 할 때다. 이것은 하나님을 인격이 아닌 어떤 자연법칙으로 대하는 무례다. 하나님께서 심히 가증하게 생각하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가 이런 가증한 일을 버젓이 행하고 있다.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 솔로몬이 일천번제 드려서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을 모방하여 일천번제 헌금이 생겼다. 이런 역겨운 일을 각종 이론으로 포장하여 아름다운 신앙행위로 둔갑시켰다. 이 시대의 교회가 얼마나 생각이 없고,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우리가 신앙 선배들의 신앙을 본받는 것은 귀하지만, 그들이 얻은 복을 탐내서 행위만을 모방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무례를 저지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동기를 살피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선별하심
"너희 가운데에서 반역하는 자와 내게 범죄하는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지라 그들을 그 머물러 살던 땅에서는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는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38)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끌려간 나라에서 끄집어내신다. 그러나 여전히 우상숭배를 고집하는 그들을 가나안에 돌려보내실 생각은 없으시다. 그들을 출애굽 당시와 같이 광야에서 모두 멸하실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인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끌려올라갈 것이 아니다. 반드시 선별하실 것이다. 그 선별의 기준은 도덕과 윤리가 아니다. 그에게 진실한 믿음이 있는지 여부다. 단순히 모방 종교인이었는지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는지가 기준이 될 것이다(요 3:36).
주님, 제가 모방종교인이 아닌 참된 신앙인으로서 주님께 충성하며 살게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