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1월15일(토)■
(로마서 8장)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묵상/롬 8:12-14)
◆ 우리는 육신에게 빚진 자가 아니다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종종 죄는 빚으로 비유된다.
죄를 짓는 순간 그는 빚진 자가 된다. 그런데 누구에게 빚진 자인가?
당연히 하나님께 빚진 자다. 따라서 빚을 탕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육신이 마치 자기가 빚쟁이인 것처럼 행세한다는 것이다.
마치 나는 갑에게 빚을 졌는데 을이 와서 빚 독촉하는 꼴이다. 채권자도 아닌 사람이 내게 빚을 독촉하다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가? 그런데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죄고 짓고 난 뒤에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육신에 종노릇 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우리를 일깨운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면 안 된다."
여기서 '육신에게 져서'란 말은 육신과 싸워서 육신에게 지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육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고는 이제는 육신에게 지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모순이다.
여기서 '육신에게 져서'란 말은 '육신에게 빚져서'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육신에 빚진 것이 아니니 육신에게 채무자처럼 끌려가지 말라는 의미다.
이 말이 너무 추상적이니까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육신의 정욕이 요동을 친다.
육신의 정욕이 내게 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마치 내 자신은 거룩과 관계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육신이 있는 한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여라.
그러나 중요한 사실을 놓치면 안된다.
육신에게 져서 넘어질지언정, 그에게 종은 되지 말라.
우리는 육신의 정욕에 종종 넘어진다. 물론 회개하지만, 또 반복된다. 한 두 번이 아니고 수십 번 반복되면 점점 위축되고 나중에는 자신이 없어진다. 수련회 때 은혜를 받아서 큰소리치고 내려왔건만, 효과는 삼 일도 가지 않는다. 이 때 틀림없이 나에게 와서 자포자기할 것을 권하는 존재가 있다.
이게 누구인가? 바로 육신이다.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우리는 육신에 빚진 것이 아니다.
육신이 빚 독촉을 하면 우리는 반발해야 한다. 비록 육신에게 졌어도 우리는 주님께 빚진 자이지 육신에게 빚진 자가 아니다. 수백 번이 아니라 수천 번 넘어져서 면목이 없어도, 설사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욘 2:4). 결코 자포자기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죄 때문에 자포자기한 백성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겔 33:11) 자포자기의 유혹이 몰려온다면, 위의 구절을 묵상하라. 그리고 내일을 염려하지 말고 돌이켜라.
그러나 여기까지는 정신적인 승리다.
보다 효과적인, 그리고 능력있는 승리는 없을까?
친구들이 침상째 들고 온 중풍 병자에게 주님께서는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로만 끝내지 않으시고, "네 침상을 들고 가라"고 하시자, 그는 벌떡 일어나서 침상을 들고 걸어갔다(마 9:1-7).
죄의 정욕에 대해서도 이런 강력한 능력을 과연 체험할 수 있을까?
◆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3절에서 언급된 '영'이란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 또는 선한 마음이 아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말씀이 단순히 선한 마음으로 악한 마음을 죽이며 살라는 그런 의미라면 복음이 세상 철학이나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으며, 지금까지 인간의 무력함을 말해온 바울은 완전히 모순을 범한 셈이다.
여기서 언급된 '영'은 인간의 영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개역 개정 성경은 헬라어 '프뉴마'를 13절에서는 '영'으로 26절에서는 '성령'으로 번역했지만, 영어 성경은 일관되게 'the Spirit', 즉 성령이심을 분명히 했다. 이것이 옳다.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라.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성령은 어떤 사상이나 가상의 존재가 아나라, 실제적인 인격체이시며, 능력이다.
멀리서 심리적인 효과만 주는 영향력이 아니라, 실제로 내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실제로 승리를 체험하려면,
내 안에 성령님이 거하신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이게 없으면 승리는 요원하다.
성령이 계시지도 않는데, 계신다고 확신하는 사람과 성령이 계심에도 안 계신다고 의심하는 사람,
어느 쪽이 더 비율이 높을까?
나는 성도 중에는 후자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고 믿는다.
물론 대다수의 성도가 성령께서 자기 안에 계심을 믿는다고 의례적으로 말하지만, 정말로 확신하는 자들은 드물다.
설사 착각이라 할지라도 정말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고 확신한다면, 그 심리적 효과는 대단하다.
그런데 성령은 정말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신 사람이라면,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확신은 심리적 효과를 넘어서서, 실제적인 능력을 체험하게 할 것이다.
베드로는 이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죽은 사람을 살렸다. 우리는 그런 기적은 못 일으키더라도, 내 속의 죄의 정욕은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어라.
이게 성령께서 승리를 체험하는 첫 걸음이다.
안 계신데, 계신다고 착각하면 어떡할까 하는 염려는 버려라.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이 안 계신 자들은 그런 조바심은커녕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의심된다면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성령을 구하라.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길,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3)라고 하셨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 주저할 이유가 없다.
성령을 인정하라!
성령을 인정하는 순간, 성령께서 일하시기 시작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를 죄의 정욕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이다.
귀신은 사람을 지배하며, 인격을 무시하고 자기 노예로 만든다.
그러나 그토록 높으시고 귀하신 성령께서는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시고, 사랑하시며, 협력하여 행하기를 기뻐하신다. 성령께서는 매사에 잔소리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그렇지만 나의 모든 삶에 함께하시고, 내 생각과 걸음을 인도하실 것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 아멘!
하나님 아버지,
저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제게 성령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하시고, 기쁨으로 따르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