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18일(화)■
(로마서 8장)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묵상/롬 8:19-25)
◆ 피조물의 소망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오늘 본문 바로 직전 구절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8) 였다.
성도들에게 장차 나타날 영광은 너무나 대단해서 현재의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영광의 날을 단지 성도들만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피조물들이 간절히 원한다. 주님의 재림은 성도들만 원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들이 무엇을 기대할까?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서 다스려지길 원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위임받은 최초의 사명은 이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 1:28)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하자, 그가 다스려야 할 세상도 영향을 받았다. 마귀가 세상의 임금이 되었다(요 12:31, 눅 4:6).
인간의 죄는 단순히 인간 관계만을 왜곡시킨 것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 세계를 왜곡시켰다.
인간이 죄를 짓는 바람에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 임신과 해산의 고통이 더욱 커졌다고 한다(창 3:16). 그런데 같은 죄를 짓지도 않은 동물들조차 해산의 고통을 갖게 되었다. 지진과 홍수, 가뭄과 기근에 어찌 인간들만 고통을 당하겠는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던 피조세계가 이제는 생존에 급급하고, 쫓고 쫓기며, 먹고 먹히는 세계가 되었고, 자연도 점점 피폐해졌다.
인간들이 겪는 허무함은 이제 피조물 전체에 만연되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전 1:8)
마른 땅의 풀 한포기가 한줄기의 비가 뿌려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때가 되면 피조물도 그 자유를 만끽하게 될 것이다.
◆ 성도의 기다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란 무엇인가?
이 열매를 우리가 받았다고 했으니, 우리들 자신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주신 양자의 영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성령께서는 구약에서도 수없이 일하셨지만, 양자의 영으로서 사람들에게 오시지는 않았다. 신약의 성도들이 최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양자들이다. 그런데 23절에 보면 우리가 '양자 될 것'을 기다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는 양자가 아니란 말인가? 문법을 따지기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 시제가 모순적으로 쓰이는 것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실체를 아는 자들은 전혀 문제가 없다.
우리가 지금은 신분적으로 양자이지만, 양자가 누려야 할 모든 것을 아직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하나님의 양자 됨을 누리게 될 것이다.
몸을 입고 있는 지금은 매일 육신의 정욕, 죄의 유혹과 싸우느라 피곤하다. 육신은 어쩌면 그토록 집요한지.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
그때가 되면 더는 육신의 정욕과 죄의 유혹에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질병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더는 인간관계로 고통을 겪을 일이 없을 것이다. 한 조각의 근심도 없이 활짝 웃으면서 영광의 자유를 만끽할 것이다.
◆ 소망으로 얻은 구원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도대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인가, 소망으로 구원받는 것인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이란 곧 소망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소망이 없는 자는 믿는 자가 아니다. 오직 현실에만 눈이 고정된 자는 믿는 자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지만, 반드시 올 것을 확신하는 소망이 곧 믿음이다.
나를 돌아본다.
내 눈이 저 앞에 있는 소망을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현실에만 고정되어 있는가?
세상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 느껴지는 것만 추구할 때,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것을 확신하고 기다리는가? 세상 사람들의 추구하는 현재의 가치에만 집착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가치를 사모하는가?
믿음이 곧 소망이다.
소망 없는 성도가 되지 않도록 하자.
소망이 있다면, 현실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둔해질 정도로 건강염려, 자녀 염려, 생활 염려에 휩싸여 있는 사람은 자신이 소망을 가진 자인지 살펴볼 일이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자.
주님,
저를 구원해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영생을 얻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의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의와 희락과 평강의 세계의 도래를 간절히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