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1월19일(수)■
(로마서 8장)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묵상/롬 8:26-28)
◆ 성령님의 기도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은 놀라운 사실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 됨을 증거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실뿐더러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도 파악하지 못하는 자다.
정작 구해야 할 것은 구하지 않고 엉뚱한 것만 달라고 기도하는 자다. 미련하고 어리석고 미혹이 잘되는 우리를 위해서 성령께서 무엇을 하실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은 우리가 못마땅해서 나오는 탄식이 아니다.
성도가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 끝없는 죄의 유혹에 시달리고, 세상의 각종 미혹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안쓰럽기 때문에 하시는 탄식이다. 성령의 탄식은 성령께서 성도를 얼마나 지극히 사랑하시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령은 종종 근심하시기도 하신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성령께서는 근심하신다(엡 4:30).
그리고 성령의 근심은 우리 영에 전달된다. 그러면 알 수없는 우울과 양심의 고통이 시작된다. 이런 상황은 어떤 교리로도 회복할 수 없다. 오직 회개만이 치료제다(고후 7:10).
전에 어떤 극단적인 교파에서는 사람을 만나면 '양심이 평화롭냐'고 질문했다. 그래서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그들의 주장은, 주님께서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다 사하셔서 우리의 죄는 없어졌기 때문에 더는 양심의 가책을 가지면 안된다는 교리였다. 기도할 때 '용서해달라'는 단어는 십자가의 대속을 불신하는 것이므로 금기어임을 가르치고, 어떤 상황 하에서도 죄책감을 가지면 안된다고 가르쳤다.
논리적으로는 전혀 모순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완벽해 보인다. 그러나 미혹이다.
그들이 놓친 중요한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이다.
성령은 핸드폰 와이파이 같은 전파가 아니라, 우리 속에서 인격체로서 살아계신 분이시다. 그들에게 성령은 교리 속에 박제되어 있을 뿐 실제 삶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만일 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런 교리에 미혹되지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 죄 사함의 확신은 귀중하다.
성도가 용서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날마다 죄책감에 시달린다면 그는 아직 복음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사랑한다면 성령의 근심이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죄 사함의 기쁨을 누리기가 어렵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완벽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으신다.
비록 우리가 완전을 향해 자라기를 원하시지만, 그렇다고 백 퍼센트 말씀대로 살아야 기뻐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님을 잘 아신다. 욥처럼 완벽한 사람조차도 결국은 허물투성임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성령은 애초에 우리가 완벽해서 임하신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에 임하신 분이시다(갈 3:2).
성령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온통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단지 봉사 시간과 헌금으로 신앙을 대치하려는 것을 성령께서는 근심하신다. 오히려 아무런 봉사도, 헌금도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자를 기뻐하신다.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 예수께서 단호히 말씀하셨다.
"회개하라!"(계 2:4-5)
◆ 놀라운 약속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모든 것'은 헬라어로 '파스'라고 하는데,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할 때 '범사'에도 사용된 단어이고, 만유의 아버지(엡 4:6)에서 '만유'에도 사용된 단어다.
'모든 것'이란 정말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사업이 안되는 것, 자녀가 속 썩이는 것, 대학에 불합격한 것, 취업이 안되는 것, 가족과의 갈등... 모두 '모든 것'에 포함된다. 심지어 불치의 병,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등도 '모든 것'에 포함된다.
과거의 죄나 어리석었던 행위나 창피당했던 사건들도 '모든 것'에 포함된다.
오, 그런 것 중에 하나라도 해당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안 된다.
'어떤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good)을 이루게 하신다.
'합력하여'란 말은 헬라어로 쉬네르게오라고 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함께 일하는'(고전 16:16, 약 2:22)이라고 번역되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을 선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 동역자로 활용하신다.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선'은 아니다.
돈 많이 버는 것, 장수하는 것, 세상 권력을 얻는 것…. 그런 종류의 선은 아닐 것이다. 이런 것들은 있어서 나쁜 일은 아니지만, 영원한 세계를 아는 거듭난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욥이 모든 것을 잃으면서 얻은 '선'은 무엇인가?
참된 신앙을 갖게 된 것, 하나님을 알게 된 것, 겸손 등이다.
그리고 신앙을 가진 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가를 안다.
과거의 부끄러운 기억이 나를 움츠러들게 하는가?
감사하고 또 감사하라. 그것이 나를 얼마나 겸손케 하는가?
현실이 고통스러운가?
감사하고 감사하라. 이해할 수 없지만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행사해야 할 때다.
이간질하는 마귀에게 내가 믿는 자임을 확고히 보여주어야 할 때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불행'으로 간주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감사 제목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미꽃만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장미꽃 가시도 감사하는 자다.
그러나 막상 이런 불행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감사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감사하련다.
넘치는 감사가 신앙생활의 진수다(골 2:7).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감사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