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1월20일(목)■
(로마서 8장)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묵상/롬 8:29-32)
◆ 하나님의 예정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벌써 우리를 택하셨다(엡 1:4).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벌써 나를 아시고, 택하셨다고?
인간의 머리로는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유한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무한의 영역일 뿐이다.
바둑의 고수는 무려 100수 앞을 내다본다고 한다. 일반인으로서는 그런 것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고수들도 알파고 컴퓨터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알파고는 수백 수 앞을 내다봤기 때문이다.
이제는 알파고조차 이기는 컴퓨터가 나왔다고 한다.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대단하다고 감탄하지만, 그래봤자 모두 유한의 싸움이다. 무한이 등장하는 순간 유한은 장난에 불과하다.
무한의 세계에서는 업그레이드라는 개념이 없다. 모든 것이 고려되어서 처음부터 완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수읽기는 수백 수, 수천 수의 차원이 아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미 세상 끝까지 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런 것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믿음의 영역이다.
수학자 칸토어가 무한의 개념을 세상에 처음 소개했을 때, 천재 수학자들마저 말도 안된다고 공격했을 정도였다. 세상에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영역이 수두룩하다.
예정이란 무한하신 하나님의 선택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 반발한다. 예정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선택 자유는 말살된다고 믿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준답시고 하나님은 선택의 자유가 없는 분으로 만들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써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하기 훨씬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선택하셨다.
생각해보라. 왕이 신부를 선택하는가, 신부가 왕을 선택하는가? 신부의 의지를 강조하고자 왕을 선택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은 그런 예로 설명할 수 없는 훨씬 더 복잡한 것이다.
예정은 인간과 하나님의 의지가 조화될 수 있는 놀라운 영역이다. 한 쪽이 능동의지고 다른 쪽이 수동의지인 것이 아니라, 둘 다 능동의지에서 출발하지만 충돌하지 않고 조화될 수 있는 영역이다.
야구공이 날라올 때, 맞을 것으로 예정되었으면 내가 피한다고 한들 맞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내가 피하지 않아도 안 맞을 것이다. 이 주장이 틀린가? 맞다. 완벽하다.
그러나 이 생각하느라고, 야구공이 날아올 때 하나님의 예정만을 믿고 피할 생각 없이 가만히 있다면 그는 멍청한 사람이다. 당연히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야구공에 안 맞은 것은 예정 탓일까, 내가 피한 탓일까? 아니면 둘 다 가능할까?
모든 것을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만 가둘 때 인간은 오히려 어리석은 자가 되며,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게 된다.
우리는 택함을 받은 자다.
이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내가 그분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분이 나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얼마나 안심하게 하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를 택하시기 전에 이미 우리를 아셨다고 한다. 예정에 앞서 예지가 있었다! 택하시기 전에 내가 어떤 자인줄 이미 아셨다.
"하나님, 제가 이런 사람인지 모르셨지요? 많이 놀라셨겠어요."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그런데도 나를 택하셨다. 그리고 부르셨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한 것뿐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 택하심의 목적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29)
주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신 이유는 나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심이다.
택하심의 이 목적을 잊지 말자.
나를 단지 윤리적인 사람을 만들고자 하심도 아니고, 나를 유능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심도 아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에 비하면 사소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다.
우리가 그 아들을 본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때, 외아들 예수님은 수 많은 아들 중에 맏아들이 되신다. 예수께 수많은 동생들을 주시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큰 형님이 되도록 하시는 것, 그게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를 묵상하며, 그를 추구하라.
그게 신앙생활이다.
그리스도인들 앞에 율법을 늘어놓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게 하라. 그래야 우리가 고집 센 종교인이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달려 죽으신 십자가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배운다.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사랑, 용서,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한없는 은총이 들어있다. 이렇게 자기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다른 것을 아끼시겠는가?
신앙의 근본이 십자가임을 왜 모른단 말인가?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을 때 진정한 봉사와 헌신이 나오고 진정한 희생이 나온다. 이런 것을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마귀는 우리가 십자가에서 눈을 돌려 '자기의'를 추구하게 만든다. 그래서 교만하고 자랑하는 종교인으로 전락시킨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해되는 영역만 믿으려고 하는 이 미련함에서 건져주십시오. 진실로 주님을 믿고, 이 믿음을 바탕으로 가치관, 인생관이 확고해지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