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30일(월)■
(누가복음 18장)
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묵상/눅 18:18-30)
◆ 하나님만이 선하시다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즉시 그런 호칭을 거절하셨다. 들으면 기분 좋을 수 있는 호칭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오해를 즐기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가장 선하셨던 예수님께서 선한 선생님이란 호칭을 왜 거절하셨을까? 다른 곳에서는 스스로를 '선한 목자'(요 10:14)라고 하신 분이 왜 여기서는 선하다는 호칭을 거절하셨을까? 단순히 겸양을 표하신 것인가? 아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를 교훈하고자 하심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
어떤 사람이 선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무엇으로 판정하는가?
선을 많이 행한 사람. 또는 악보다는 선을 더 많이 행하는 사람, 또는 항상 선만 행하는 사람일 것이다. 즉 그 사람이 어떻게 행하는가를 따라서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를 판단한다. 일종의 귀납적 정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귀납적 결론으로 선한 존재가 되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셨어도 그냥 선하신 존재다. 그분의 선하심은 귀납적 결론이 아니라, 연역적 진리다.
내가 대학교에 합격했든 떨어졌든, 사업이 흥하든 망하든 관계없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해지신 분이 아니란 말이다. 여러 사건들을 보고 결론을 내리는 그런 귀납적 방법은 인간에게나 적용할 뿐, 하나님께 적용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연역적 진리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판단하면 안 된다. 그것은 건방진 것이다. 하나님은 판단 받는 위치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통해서 역사를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할 순 없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변함이 없으며, 우리는 그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뿐이다(시 34:8).
사랑, 선, 정의 등 모든 덕목은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을 늘어놓은 것일 뿐 하나님보다 더 높은 속성은 아니다. 만일 '선(善)'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개념이라면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선과 정의보다 열등한 존재가 될 것이다.
지구에는 낮과 밤이 존재하지만, 태양에는 그런 것이 없는 것처럼 선과 정의 그 자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받을 수도 없는 존재다(약 1:13).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마귀에게 시험도 받으시고, 죄의 유혹도 받으셨다(히 4:15). 예수님께서는 종종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선을 택하시는 승리의 삶을 사셨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만 가능한 '선한'이란 수식어를 용납하실 수 없었다. 그러나 승천하신 예수님께는 다시 이러한 수식어를 돌려드릴 수 있다.
◆ 영생을 얻는 방법
관리의 질문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였다.
여기에 예수님의 대답은 명쾌하셨다.
"계명들을 행하라"
이 대답은 당시 모세 율법 아래 있던 유대인들에게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대답이었다.
그런데 이 관리는 이것을 다 지켰다고 한다. 아마도 계명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피상적으로 지켰을 것이다. 자기 기준에서는 완벽해 보여도 하나님께는 한참 미달된 것이리라. 율법주의자들의 한계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이 관리에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네가 온전(perfect)하고 할진대'(마 19:21)라고 하셨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신다. 피상적으로 계명을 지키고 나름대로 자만했던 이 관리는 정신이 번쩍 났다. 이제야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교회만 다니고 약간의 봉사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세상도 즐기고 종교 생활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다가 영생을 얻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내 재산을 다 팔아야 한다니!
너무 혹독하다. 이렇게 손해까지 보면서 영생을 추구할 가치가 있을까?
그에게 영생이란 행복한 현세의 연장일 뿐, 현세까지 희생할 가치는 없었다.
영생의 조건이 이렇게 가혹하다면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영생을 얻는 데 율법 외에 다른 길이 있음을 안다.
곧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놀라운 길이다.
사도행전 이후로 제자들에게 '영생을 어떻게 얻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처럼 계명을 지키라는 식으로 대답한 제자는 없다. 오히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주 예수를 믿으라.'(행 16:31)고 요구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시대가 바뀌었음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1,22)
'율법 외에'라는 말이 얼마나 엄청난 선언인가?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 내 행위가 조금도 요구되지 않는 길이란다. 계명을 지키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재산을 다 팔아서 나누어줄 필요도 없단다. 그냥 달랑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 이런 말도 안 되게 감사한 일이 있는가? 꿩 먹고 알 먹고는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이런 말을 들으면 당신은 어떤가? 고개를 저으며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복음은 그만큼 비상식적이다.
어떤 분은 이런 말에 반대하면서 예수님만 믿으면 안 되고, 율법을 열심히 지켜야 함을 강조한다. 다른 분은 이러한 복음이 사람을 방자하게 만들고 기독교를 타락시킨 주범이라고 항의한다.
이들은 '믿음'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다. 이들은 하늘로부터 믿음이 내려오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모른다.
반듯하고 성실한 이 관리는 재산을 바치라는 말에 심히 근심하며 집에 갔지만, 탐욕스러웠던 세리 삭개오는 오히려 기쁨으로 자기 재산을 다 바쳤다. 재산의 반은 가난한 자를 위해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그동안 손해를 끼쳤던 사람에게 4배로 되갚는 데 쓰겠다고 했다(눅 19:8).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믿음이 임했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게 된 것이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임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27). 그것이 믿음의 비밀이다.
믿음은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서 바다에 심고(눅 17:6), 산을 옮겨서 바다에 던진다(마 21:21).
마게도냐 사람들이 극심한 가난 중에도 풍성한 연보가 가능했던 것은 믿음이 임했기 때문이다(고후 8:1). 그런데 믿음이 없는 자들은 부자이면서도 약간의 헌금에도 심하게 생색낸다.
그러므로 어쭙잖게 율법을 들이밀지 말고, 참된 믿음을 배워라.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도대체 믿음을 뭐로 생각하는가?
주님을 사랑해보긴 했는가?
주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우선이다.
제대로 믿게 되면 가치관이 바뀌게 된다. 하나님 나라가 최고의 가치를 가지게 되고, 예수님이 최고의 우선순위가 될 것이다. 세속적 가치관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믿지 않고 있음을 증명한다. 냉장고 속에 있다고 다 음식물이 아니듯, 교회당에 앉아있다고 다 성도가 아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가치관이 바뀌고 그런 가치관으로 헌신한 자를 주님께서는 격려하시고, 영생을 거듭 약속하시며 더욱 큰 은혜를 베푸신다.
주님,
제 믿음이 진실하게 하셔서, 참된 가치관을 갖게 하시고,
거기에서 신앙적인 행동들이 나오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