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31일(화)■
(누가복음 18장)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묵상/눅 18:31-43)
◆ 모든 것이 응하리라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이 시점은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이 주일 정도 되었을 때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확실하게 알리셨지만, 제자들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마도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육체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실존적 죽음과 부활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왜곡해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응할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 구약의 여러 선지자가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것 중에 단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다 응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가능할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예언이야 조금만 노력하면 임의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크게 기뻐하며 즐거이 부르는 군중들을 모을 수는 없다(슥 9:9).
그리고 손발이 못 박혀서 죽는 것이나(시 22:16), 예수님의 겉 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는 것(시 22:18)은 절대로 임의로 조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은 단 하나도 빠뜨림 없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래서 성경이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은 수많은 그리스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하신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예수님은 며칠 만에 부활하셨는가가 의외로 논쟁거리다. 예수님은 금요일 저녁에 돌아가셔서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으니 엄밀히 보면 40시간이 채 안 된다.
그런데 어떤 분은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요나처럼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 12:40)고 하셨다는 것을 근거로 금요일에 돌아가시지 않고 수요일에 돌아가셨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삼일 밤 삼일 낮이란 말이 정확해진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예언이 틀린 것처럼 간주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소통 언어에 그렇게 수학적 엄밀함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가령 성전의 쌓아 올린 돌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아니하리라(마 24:2)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폐허를 가리키는 말씀인데, 정말 눈에 불을 켜고 돌 위에 돌 하나라도 남았는지를 살피고 하나라도 돌 위에 돌이 남아있으면 주님의 예언은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일은 지나치다.
예수님의 부활은 삼 일(three days)만인가, 셋째 날(the third day)인가?
누가는 이 논쟁을 확실히 끝낸다. 오늘 본문에서 개역개정은 '삼 일 만'이라고 기록했지만, 정확하게는 '제 삼 일'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게 영어나 원어로는 모두 셋째 날(the third day)이다.
누가는 다른 곳에서도 일관되게 예수님의 부활이 셋째 날(the third day)이라고 기록한다(눅 24:7, 21, 46).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요나의 예를 드실 때, 삼 일 밤, 삼 일 낮이란 표현을 하셨음을 기록했는데, 누가는 아예 이 부분을 생략해버렸다(눅 11:29). 비교적 후에 기록된 누가는 이에 대해 논란의 여지를 없앤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무려 네 번이나 삼 일째임을 밝혔다(눅 18:33, 24:7, 21, 46). 이 정도이면 더 이상 논쟁은 무의미하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제3일에 부활하셨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금요일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일요일에 부활하신 것이 맞다.
누가가 정확하게 우리에게 알리려고 애쓴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누가는 정말 많은 것을 전달해주었다. 예수님의 족보나, 탄생, 그리고 활동하신 연대 등은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없는 보석같은 자료다. 게다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탕자 비유,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 등은 얼마나 소중한 말씀들인가?
◆ 다윗의 자손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주변 사람들이 모두 조용히 하라고 야단치고 있다.
주눅이 들어서 잠잠할 것인가, 개의치 않고 부르짖을 것인가?
남을 배려하는 것이야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오히려 인생을 망칠 수 있다.
내가 아는 선배 교사는 학부모들이 주는 봉투를 평생 거절했다. 나도 그랬지만 의외로 이것이 쉽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학부모들이 불쾌하게 생각할 땐 어떻게 하나요? 그러자 이 선배는 말하길 '그 사람이 불쾌한 것보다 내가 더 불쾌하거든. 내가 왜 불쾌함을 무릅쓰고 그 사람의 불쾌함까지 배려해야 하는데?' 참 멋진 선배라고 생각했다.
우리 인생에서는 지나치게 타인에 대한 생각 때문에 기회를 놓칠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식이 죽어가는데 체면, 자존심 다 계산하면 자식을 못 살린다. 그러나 이 맹인은 부르짖었다. 사람들이 욕하니까 더 크게 부르짖었다.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다윗의 자손이여"
이 호칭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왕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예언되었기 때문이다(사 11:1).
백성이 왕을 부르고 도움을 요청하는데, 왕이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왕께서 돌아보시고, 그를 고쳐주셨다.
나는 이 맹인의 용기 있는 부르짖음이 귀한 본이라고 믿는다.
주님께서는 이 맹인의 부르짖음을 이렇게 평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종종 우리가 부르짖을 때, 주님은 그것을 믿음으로 보시고 격려하시며 응답하신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말씀이 대략 200번 정도 나오는데, 놀랍게도 매번 하나님은 거기에 반응하셨다.
답답한 일이 있는가, 어려운 일이 있는가? 웅얼대지 말고, 부르짖어라. 주변 사람 신경 쓰지 말고 소리쳐라. 타인 눈치 보느라 내 인생 망치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부르짖음에 정확하게 응답하신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다윗. 시 4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