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2월2일(목)■
(누가복음 19장)
1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12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묵상/눅 19:11-27)
◆ 열 므나 비유
(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오늘 본문에서 열 므나 비유는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와 비교된다. 달란트 비유는 종의 능력에 따라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나누어주었지만, 오늘 비유는 모든 종에게 똑같은 것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비교해볼 때, 분명히 같은 시기에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의문이 든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를 버전을 바꾸어서 두 번 말씀하셨을까, 아니면 한번 말씀하셨는데, 둘 중의 하나는 의역해서 전달한 것일까? 나는 누가복음이 후자라고 본다.
여러 본문에서 다른 복음서와 비교할 때 누가복음은 종종 의역해서 우리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나는 누가의 이런 의역이 무척 감사하다. 그 의역 속에는 핵심을 깨달은 사도들의 해석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당시 사도들과 함께했던 자로서 사도들에게 들은 말을 충실하게 기록한 자다. 우리는 교회가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서있음(엡 2:20)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말씀은 모든 성도와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예수님 말씀의 진정한 해석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기반해서 서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 착한 종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는 각자에게 다르게 나누어주고 거기에서 출발하지만,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는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어준다. 출발점이 다르다. 두 비유의 교훈은 전혀 다른 것인가, 아니면 똑같은 것인가?
나는 두 비유가 같은 것이라고 본다.
달란트 비유가 각자 받은 은사가 다양함에서 출발했다면, 므나 비유는 다양한 은사보다는 오히려 어떤 은사든 관계없이 모두가 동일한 책임을 부여받았음에서 출발한다.
전쟁에 나가면 포병도 있고 보병도 있으며, 전투기 조종사도 있고, 탱크병도 있다. 보병 한 명이 하는 일보다 전투기 조종사의 일이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러나 보병이나 전투기 조종사나 역할은 달라도 각자가 받은 사명을 완수해야 할 책임은 동일하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전 12:4-6).
따라서 우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다르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묶어서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다.
한 므나는 백 드라크마, 곧 백 데나리온이며 당시 노동자가 100일간 일해서 버는 돈이다. 오늘날 노동자 하루 품삯을 10만 원으로 계산한다면 천만 원이나 되는 돈이다.
한 므나로 열므나 남긴 사람과 다섯 므나 남긴 사람...
이것을 꼭 몇 명 전도했는지, 얼마나 헌금을 많이 했는지 숫자로 재단할 필요는 없다. 과부의 두 렙돈이 부자의 거액보다 더 많다고 계산되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충성심은 그런 눈에 보이는 숫자로 좌우되지 않는다.
열 므나를 남긴 종을 큰 교회의 목사나 거대한 사역을 해낸 선교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전혀 우리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일 수 있다. 오히려 천국에 가면 열 므나를 남긴 종일 것으로 기대했던 분이 한 므나를 남긴 종으로 평가받았음에 충격받을 수도 있다.
어떤 자매의 간증이 늘 감동이었다. 그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 충성심과 뜨거운 열정이 늘 도전이 되었다. 그런데 그 자매와 함께 사역해본 자매들은 모두 그 자매에 대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왜 그런가? 그들에 의하면 이 자매는 꼭 간증이 될만한 일은 나서서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함께 사역한 사람들은 맥이 빠진다고 했다.
우리가 주님께 충성하기보다는 사람에게 자랑거리를 만들고 있는 식의 사역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아름다운 태도는 의외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견되곤 한다.
물론 베드로나 바울같이 대단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이 노출되겠지만, 그들은 말도 못 한 핍박과 고난을 겸하여 당한 자들임을 기억하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차원을 넘어선 사람들이다.
다섯 므나, 두 므나는 단순히 봉사의 양에 있지 않고, 그 봉사가 어떤 동기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도 중요하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충성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아름답다.
◆ 악한 종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은 장사하라고 주셨건만, 아무것도 안 하고 주인이 준 그대로 한 므나를 돌려준 종이 있다. 그래도 낭비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준 것만 해도 스스로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 사람의 문제는 무엇인가?
장사하라고 명령(13)하셨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그는 주인의 명령을 무시했으므로 전혀 충성된 종이 아니다.
이 사람은 무척 게으른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게으른 사람의 특징이 스스로는 무척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게으른 사람은 자신의 게으름에 각종 핑계를 대면서 정당성을 부여한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잠 26:13)하면서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정당화한다.
더 가관은 자신은 방안에서 뒹굴면서 밖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한 온갖 판단을 다 한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잠 26:16)
아무것도 안 하면서 온갖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여, 스스로 지혜로운 것 같은가? 오만가지 핑계를 대면서 자신을 정당화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국물도 없다. 그냥 게으른 것으로 정죄될 것이다.
이 사람의 문제가 또 있다.
그는 주인에 대해 철저하게 오해했다.
주인이 엄한 사람이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무지막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것은 깡패나 강도가 할 짓이다. 이런 인격모독이 어디 있는가? 종종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을 본다. 자기 멋대로 상상하고 자기 멋대로 논리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그렇게 오해한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주인이 용서하겠는가?
그 한 므나까지 빼앗아서 열므나 있는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다.
한 므나를 빼앗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떤 사람은 구원은 유지하지만, 상을 잃게 된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한 므나마저 빼앗기는 것은 단순히 그의 사역을 빼앗김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기업을 빼앗기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더욱 확실한 결말을 보여준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30)
어떤 분은 이 상태를 구원은 유지하면서 잠시 징계받는 상태로 해석한다. 연옥 교리와 비슷하다. 그러나 바깥 어두운데,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상태가 '구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게을러도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된다는 식의 논리는 본래 모순이다. 어떤 사람을 무척 사랑한다고 하면서 무관심한 일은 실제로 발생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정말 잘 믿으면 게으르지 않게 된다. 잘 믿는 분들의 충성은 감동이다.
단순히 이것저것을 봉사한다고 해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마음에서 시작해서 행동으로 나가야 올바른 순서다. 우리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순전한 믿음 속에서 올바른 인생관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복음적인 올바른 순서다.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서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마 28:19-20)는 말씀에서부터 '형제를 사랑하라'(요 13:34, 35)라는 말씀까지 착한 마음으로 받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며, 형제를 돌아보고, 또한 이런 일에 힘쓰는 자들을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야 할 것이다.
주님,
게으르고 말만 잘하는 악한 습성에서 건져주십시오.
착하고 겸손한 종으로서 주님께 충성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