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사슴 연못 - 황유원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
사슴이 살고 있다
이곳의 사슴 다 잡아들여도 매해 연말이면 하늘에서 사슴이
눈처럼 내려와 이듬해 다시
번성하곤 했다는데
이제 하얀 사슴은 백록담이라는 말
속에만 살고
벌써 백 년째 이곳은 지용의 『백록담』 표지에서
사슴 모두 뛰쳐나가고 남은
빈자리 같아
그래도 이곳의 옛 선인들이 백록으로 담근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백록은 어쩌면 동물이 아니라
기운에 가깝고
뛰어다니기보다는 바람을 타고 퍼지는 것에 가까워
백록담, 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백록담』 표지 밖에서 표지 안으로
돌아오는 것도 같고
하얀 사슴 몇 마리가 백록담 위를 찬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은
청량해진다
연못에 잠시 생각의 뿔을 담갔다
빼기라도 한 것처럼
사실 지용이 『백록담』을 썼을 때 사슴은 이미 여기 없었다
표지의 사슴 두 마리는 없는 사슴이었고
길진섭의 그림은 그저 상상화일 뿐이었는데
어인 일일까
백록담, 이라고 발음할 때마다
살이 오른 사슴들이
빈 표지 같은 내 가슴 속으로 다시 뛰어들어와
마실 물을 찾는다
놀랍게도 물은 늘
그곳에 있다
(제68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2023)
Air Supply - 황유원
에어 서플라이의 러셀 히치콕은
비싼 돈 내고 공연에 오는 사람들이 늘 최상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평생 담배를 한번도
피우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중학생 시절의 어느 여름
98.7MHz에서였다
그 후로
우연히 그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담배 연기가 걷히는 것 같다
하늘이 맑아지는 것 같다
에어 서플라이가 한창 활동했을 때는 있지도 않았던
미세먼지라는 말까지 사라지는 것 같다
공기가 공급되는 것 같다
요즘 대도시의 그저 그런 공기가 아닌
강원도의 진짜 공기가
강원도의 산들이 높아지고
높아져서 별들에까지 이르고
별들이 차갑게 빛나는 것 같다
방금 나온 이 시원한 무알콜 맥주 한 병처럼
별들이 흘러넘쳐 차가운 하늘에 담기는 것 같다
우연히 너와 들어간 양양의 어느 식당에서
수년 만에 에어 서플라이의 노래를 듣고는
밖으로 나가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잠시 마스크 벗고
청명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최고 음역대에서도 뭉개지거나 찢어지지 않는 맑은 사운드
최상의 하늘이었다
(제68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2023)
올해 가장 시적인 사건 - 황유원
올해 가장 시적인 사건은 올해를 불과 한 달 남짓 남겨둔 어느 날 일어났다. 봉쇄령이 내린 이탈리아에서였다. 한 남자가 부부싸움을 하고 집을 나와서는 홧김에 무작정 걸었다. 보통 어느 정도 걷다 돌아오고 마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걷고 또 걸었다. 그러던 어느 새벽, 그는 아드리아해에 면한 마르케주 파노 지역에서 도로를 순찰 중이던 경찰에게 발견되었다. 야간 통행금지령을 위반한 데 대한 과태료를 부과하기 위해 그의 신원을 확인한 경찰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만다. 그가 사는 집이 북부 롬바르디아 코모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11월 22일에 부부싸움을 하고 집을 나온 이후로 아흐레 밤낮을 계속 걸어왔던 것이다. 길을 가다 만난 사람들에게 음식을 구걸하며 그곳까지 걸어왔다는 그의 수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이미 실종 신고가 되어 있는 상태였던 남자는, 원래 벌금으로 400유로,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대략 53만원을 내야 했지만 경찰은 위반 경위를 참작해서 일단 부과 통지를 보류한 상태라고 했다. 관련 기사에는 그가 걸어온 길이 구글맵에서 캡처되어 있었고, 그 길은 자로 그은 듯 거의 직선이었고, 그것은 그가 말 그대로 전진하기만 했다는, 아무 생각 없이가 아니라 아무 생각도 없게 하기 위해 오로지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증거였다. 그는 왜 멈추지 않았을까. 왜 421킬로미터나 되는 직선 거리를, 서울에서 제주도까지의 거리에 육박하는 그 거리를 묵묵히 걷기만 했을까. 무슨 이탈리아의 현대판 성자라도 되는 양 부부싸움을 한 모든 이들을 위해 그 길을 걸어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부부싸움을 하고도 멀리까지 걸어가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만큼 걸어주고 있었던 것도, 봉쇄령 때문에 밤에 밖으로 나와 걷지도 못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법을 무시해가며 걸어주고 있었던 것도 아닐 것이다. 대체 왜 그랬을까. 나도 부부싸움을 하고 집을 뛰쳐나간 적이 있다. 작년 이맘때였고, 너무 추웠고, 지갑도 들고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결국 차들이 쌩쌩 달리는 좁은 도로변을 걷다가 얼마 못 가 다시 돌아와서는, 차마 집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대신 집 앞 상가 건물로 들어가 그곳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떨었었다. 그게 그와 나의 차이다. 그게 올해 가장 시적인 사건과 그해 가장 찌질했던 사건의 차이다. 그래도 아직 시는 살아 있고, 누가 뭐래도 아무거나 시가 되지는 않는다. 다행이다.
(수상작가 자선작, 2023)-가져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