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은 남대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1부 〈아침 잔디밭 모퉁이〉에 15편, 2부 〈바람을 잠재우던 시간〉에 19편, 3부 〈세월이 곁에 머물러〉에 15편, 4부 〈하늘이 살짝 흔들렸다〉에 19편 등 총 4부에 68편의 시가 실려 있다.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의 주된 정서를 한 마디로 축약하면, 풍경과 시공時空에 실은 삶의 철학과 서정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에는 주변에서 친숙한 풍경들이 시인의 섬세한 시향에 의해 다듬어지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압축된 시적 은유에 쌓여 잔잔하게 펼쳐지고 있다.
■ 출판사 서평
이 시집의 시인이 풍경시에 매우 뛰어난, 그야말로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시의 풍경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함의하는 바나 정서의 들고남이 절대 범상치 않다. 풍경시라 해서 음풍농월식의 풍경이나 읊조리는 것이 아니다. 시인이 추구하는 풍경시는 시인의 아름다운 심성과 자연과 언어가 놓일 자리에 놓이는 시이다.(해설에서)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에 쓰인 시적 언어들은 압축되고 정제되었다. 곡을 붙여 악기로 연주하면 그대로 노래가 될 것 같다. 언어의 배열과 절제에 노력한 흔적이 깊다.
시간과 공간의 미학으로 본 詩
흔히 “시간 있느냐”는 말을 하는 것을 본다. 물론 이때의 ‘시간’은 여유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말은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라는 것을 전제해야 말이 된다. 대체 시간이라는 것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지구의 자전과 공전 때문에 시간이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인가? ‘시간은 어디에 있나?’에서 ‘어디’는 공간을 말한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은 공존하는 것인가?
과학에서는 이 우주의 무한한 별들은 자체 질량의 크기에 따라 각자의 시계와 시간대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불교 경전에서도 서로 다른 세계의 다른 시간대가 있다고 말한다.
시간은 관념적이고, 공간은 구체적이다. 그러면 시詩에서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작용하고 있을까? 시간은 어느 공간에 있는 것일까? 시간과 공간은 함께 있는가? 시인에게 시간과 공간은 어떤 의미인가?
창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눈을 맞추자
사정없이 눈알을 찔렀다
창가 화분에 앉은 쑥부쟁인 이미
쨍쨍한 마법에 걸려 길어진 목을 내밀고
견고하고 깊은 거미줄 함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슬을 보석으로 바꾸어
백성들을 회유한 지 오래
단풍나무 은행나무 팽나무들
화살 같은 이파리로 대적하게 했으나
빨갛게 노랗게 마음을 주고 말았으니
밀짚모자 속에 숨겨둔
허심의 비법이라도 전수 받아야 할까
저만치 우두컨한 입동
- 「가을 검객」 전문
시인의 시간은 바람이나 햇살의 온도 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봄’을 어찌 알았는지 언 땅을 헤집고 나오는 새싹에서, ‘가을’에 빨갛게 노랗게 몸을 바꾸는 나뭇잎에서 우리는 이미 ‘시간’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본다. 시인의 시간은 창가에도, 화분에 앉은 쑥부쟁이에도, 견고하고 깊은 거미줄 함정에도, 나무들에도, 가을 들녘에도, 허수아비 밀짚모자 속에도 있다. 시인의 시간은 앉아 있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한다.
시 「봄비 오는 날」에서처럼 시간은 거대하고 미끄럽고 차갑고 어두운 빙벽에 갇혀있다가 우수, 경칩이 지나면 봄비 속에 섞였다가 매화나무 가지에서 쿨럭쿨럭 입덧도 하다가 열매를 틔울 준비도 할 것이다.
시인의 시간은 시 「팔월의 강」에서처럼 뜨거운 햇살에 녹아 말랑말랑해진 팔월의 지구에서 강물로 굽이굽이 흐르기도 하고, 햇살을 피해 그늘 속에 숨기도 할 것이다. 강가를 구르던 돌멩이에도 시간은 흔적을 남겼고 송사리들의 헤엄에도 시간은 깃들어 있다. 그러다가 어느 한 공간에서 어우렁더우렁 지내기도 했을 것이다.
무수한 혀가 있다는 것
그 혀만큼 세상을 맛볼 수 있다는 것
휘파람 불고 노래하고
집을 짓고 연애도 하고
숭숭한 몸집 세월만큼 부풀었지만
어둠이 골목을 숨길 때까지
떠나간 새들은 돌아오질 않았고
구름이 걸터앉고 간혹 무지개가 놀다 가는 날엔
서산에 환하게 걸리는 눈빛과
가지마다 열리는 붉은 노을
- 「둥구나무」 전문
한 공간에서 함께 오래 머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함께 늙어간 부부라면 동지애가 생겼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마을에 있던 산, 바위, 나무에는 동지 이상의 믿음, 어쩌면 깊은 신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 마을 어귀를 오래 지키고 있는 둥구나무에 금줄을 치고 서낭당을 만들거나, 평상을 펴놓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담소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던 이유는 바로 둥구나무를 신격화(信 ⇒ 神)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공간과 그곳에서 함께했던 시간이 주는 의미는 어쩌면 사랑이나 추억이라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이상이 있을 것이다.
보슬비 내리는 늦여름
고향 밭둑길에서
홍순이를 만났다
그 옛날 내 옆구리 쿡쿡 찌르며
한번 안아 달라고 매달리던
그렇게 발랑발랑 까졌던
그 계집애 홍순이
수십 년 동안 까맣게 잊었던 홍순이가
밭둑길 탱자나무 울타리에 걸터앉아
빨간 입술을 홀라당 까고는
배시시 웃고 있다
- 「유홍초꽃」 전문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지점에 특별한 인연이 있다. 지금(시간) 여기(공간)에 있는(존재) 것이 나와 꽃이다. 지금(보슬비 내리는 늦여름) 여기(고향 밭둑길)에서 수십 년 동안 잊고 살았던 과거의 시간과 마주한다.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가 만나는 거룩한 시간이기도 하다. 자연의 역사는 시간의 흐름이고, 인간의 역사는 시간의 흐름 속에 변화된 인간의 모습이다. 과거의 시간은 역사다. 지나간 모든 일이 모두 역사가 될지 선택에 의한 것만 역사가 될지, 굳이 E. H. 카의 견해를 빌릴 필요는 없다. 이미 시인의 마음에서 “이것은 나의 역사다”라고 정했기 때문이다.
산벚나무 꽃잎 흩날리고
멧비둘기 울음 골짜기 가득 고이다
나뭇가지 사이 햇살에
연둣물 뚝뚝 배다
진달래 환한 산길에
암소와 노인 나란히 걸어가다
- 「봄 소묘」 전문
하루의 시간을 계절로 표현한다면, 봄은 동이 트는 아침, 여름은 한낮, 가을은 석양이 물드는 저녁쯤, 겨울은 한밤중일 것이다. 「봄 소묘」에서 진달래가 피었으니 봄이요, 아침이다.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흐르는 시간이니 나무가 영양을 듬뿍 채우는 시간이다. ‘암소’는 생산의 상징이다. 모든 것이 생장을 시작하는 봄, 암소는 생산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노인’은 어쩐지 홀로 ‘봄’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노인’은 저녁이거나 밤의 이미지와 더 어울리지 않는가? 어울리지 않는 대목처럼 보이지만, 신라 4구체 향가 「헌화가」가 생각나는 시이다. 『삼국유사』 권2 기이편 수로부인 조에 「헌화가」 가사 전문과 배경설화가 전한다.
진달래 환한 산길에 암소와 노인이 나란히 걷다가 수로부인 일행과 만남 직하다. 시간을 신라 성덕왕 때로 거슬러 올라 강릉 해안 도로로 이동한 느낌이다. 수로부인 관련 설화는 「헌화가」, 「해가」 두 편의 노랫말과 함께 전하는데 미모가 뛰어나서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잡혀갔다고 한다. 「헌화가」의 ‘노옹’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선승禪僧으로 보거나, 신선, 지역 유지, 왕성한 남성 등으로 해석이 다르다. 「봄 소묘」에서도 암소를 무엇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 ‘노인’의 상징성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주로 사찰 법당 외벽에 벽화로 많이 그려져 있는 심우도尋牛圖라는 그림이 있다. 이는 소를 찾는 과정을 단순하게 그린 것 같지만 인간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 심오한 선종의 사상을 담고 있다. 그러고 보면 「봄 소묘」에 묘사된 정경 속에서는 햇살과 물오른 나뭇잎과 화사한 진달래가 싱숭생숭 마음을 흔드는 봄날에 본성을 찾아 다잡고 가는 선인仙人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봄’은 만물이 생성하는 시간이며, 산길은 호젓하여 내면을 들여다보기 좋은 공간이다. 심란할 때 산길을 산책하면 마음이 간결해지고 조용해지는 것은 마음속 소를 잡았기 때문이 아닐까.
구름이 떠 있고
새들이 날고 바람이 흐르고
고인 시간이 창공에 가득해
시간은 말랑한 물질
달리는 우주에 시간을 빼면
공간이 함께 사라져*
구름이 모이고 햇살이 내리고
낙엽이 지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럴 뿐
* 시時공간에서 시간과 공간은 불가분이다.
- 「하늘과 우주」 전문
시 「하늘과 우주」에서 시인은 시공간에서 시간과 공간은 나눌 수 없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이란, 있어 오면서(과거), 마주하면서(현재), 다가감(미래)이다.”라고 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원회귀적 시간관을 표현한다. 시간은 무한하고, 물질은 유한하다라는 전제는 염세주의와는 다르다. 이는 삶을 강하게 긍정하는 사상이다. 시간은 관념이고 공간은 물질이다. 그러나 시인에게 시간과 공간은 단순히 흘러가고 지나가는 개념이 아니다. 지나간 시간을 거슬러 오르기도, 소환하기도, 미래를 끌어와 살기도 한다. 그렇게 머무는 시간이 곧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 저자 소개
남대희 :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였고, 2011년 월간 《우리詩》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나무의 속도』가 있다.
첫댓글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 시집 출간 축하합니다.
시집을 받으면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시인의 말」이다. 이 시집 머리에 시인은 "처음에 나는/ 시詩가/ 세상의 꿈이고 희망이었으면 했다// 지금도 그렇다."라는 짧은 말씀을 올렸다. 시를 보면 그것을 쓴 사람이 보이기도 하는데 남 시인이 그런 경우가 아닌가 생각된다.
시는 시인이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흔적일 수밖에 없다. 시인의 눈으로 본 자연과 주변 인사가 시적 풍경이 되어 한 편의 시로 살아나기 마련이다. 남 시인의 시가 호흡이 짧고 내용이 명쾌하다는 것은 그 동안 시에 대한 내공이 많이 쌓였고 그 만큼 깊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자연이 사람의 삶일 수 있고 사람이 자연일 수 있는 세상은 얼마나 살맛나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이 시집을 읽으면서 떠올려 본다.
- 홍해리(시인).
두 번째 시집이 <움>에서 출간된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직 시집도 못 보긴 했습니다만 축하해 마지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