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아! 돌아! 돌라! 에 얽긴 안타까운 이야기들
우리나라의 화폐역사는 멀리 고조선의 명도전부터 시작된다. 그 후 삼국신대를 거쳐 고려 초기까지는 중국의 화폐를 준용한 것이고 본격적으로 우리의 화폐제도가 도입된 것은 고려 숙종 때 의천 대각국사에 의해서 이다. 의천 대각국사(1055. 9. 28~1101. 10. 5)는 고려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석후(釋煦) 또는 후(煦)이며 호는 우세(祐世)이고 흔히들 대각국사(大覺國師)라고 부르는데 이는 시호이다. 순종 선종 숙종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한국에 천태불교를 도입한 국사(國師)로 대한불교천태종의 종조로 추앙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불교를 국교(國敎)로 한 고려의 풍습은 아들이 여러 사람이면 한사람은 출가하게 되어있었다. 왕족(王族)도 이외는 아니었다. 4명의 형제 중 스스로 자원하여 출가한 의천국사는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오면서 천태불교와 화폐제도를 도입해 온 것이다. 그때만 해도 고려는 화폐제도가 정착되지 못하고 물물교환형식의 낙후된 경제제도가 운영되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의천대각국사가 형님인 숙종에 건의하여 화폐제도를 정착해 나간 것이다. 그리고 화폐의 이름도 돈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돈은 돌고 돌아라! 는 뜻을 뜻이다. 한곳에 머물지 말고 돌고 또 돌아라! 는 뜻이다. 헌데 이 돈이 돌고 돌지 못하고 한곳에 쌓이는 불상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돈이 많이 쌓인(가진)사람을 우리는 부자(富者)라고 부르고 돈이 돌고 돌아 없어진 사람을 우리는 가난한 사람 빈자(貧者)라고 부른다. 돈이 제 기능을 제대로 못하면 부자가 되는 것이다. 돈의 역기능을 우리는 아이러니 하게도 부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돈의 역기능(쌓아둠)을 위하여 우리는 안타까워하고 몸부림을 치며 안절부절 해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돈의 역기능(쌓아두기)위하여 온갖 번뇌 망상의 아궁이에서 욕망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번뇌 망상을 우리는 스트레스라 부르는데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거의가 다 돈과 결부되어 있다. 돈을 쌓아두기 위한 스트레스라는 것이다. 한 푼에 대한 번뇌 망상이다. 한 푼을 얻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구걸을 해야만 했든가? 1푼(分)은 중국의 화폐단위 1문(文)에서 따온 말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문과 푼을 혼용하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중국 화폐단위 문을 우리조선이 푼(分)으로 이름 짓고 사용한 것은 골고루 나누어지길 바람에 그 뜻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은 권력층 왕권에 의해서 산산이 무너졌다. 조선시대의 화폐를 우리는 대체로 엽전(葉錢)이라고 부른다. 이 엽전이라는 말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 민족을 비하(卑下)하는데 자주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연유는 대원군이 경복궁복원을 위해 당백전을 찍어내기 시작함에 있다고 한다. 엽전하면 생각나는 화폐단위가 있다.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청노새 안장위에 실어주든 엽전 열 닷 냥’........하는 량(兩)이다. 화폐가치는 금화(金貨)는 금(金)의 무계 은화(銀貨)는 은(銀)의 무계인 량(兩)으로 결정된다. 당백전은 구리(銅)와 은(銀)의 합금으로 찍어낸 것인데 이 또한 량(兩)으로 셈함이 당연할 것이다. 헌데 경복궁중수의 재원마련이 여의치 않았든 대원군은 당백전을 무제한으로 찍어냄과 동시에 그 무계(重)도 점차 줄여나갔다. 나중에는 그 무계가 나뭇잎처럼 가벼워 졌다. 하여 나뭇잎처럼 가볍다하여 엽전(葉錢)이 된 것이다. 요즘 말로 ‘영양가 없는 돈’이 된 것이다. 영양가 없는 돈으로 권력에 의한 양민(良民)갈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니 그 원성은 상상되고도 남는다. 양민갈치는 연쇄반응을 일으켜 양반은 상민으로 상민은 천민으로 이어져 급기야는 왕권몰락의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당백전은 새로운 경제체제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이 당백전 엽전 이전에는 화폐는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돈을 제대로 구경도 못해보고 여전히 자급자족(自給自足)에 머물렀다. 어쩌다가 행해지는 거래는 물물교환이 주(主)된 상거래 행위였다. 언감생심 엽전을 소유하기를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불평이나 불만은 없었다. 자기 분수(分受)를 알았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알아서 기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분수를 모르고 날뛰다가 패가망신 하는 사람도 더러 있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서민들은 서서히 경제활동에 점차로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화폐단위도 변하고 있었다. 푼(分)에서 전(錢)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때의 전은 엽전(葉錢)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랬다. 전(錢)은 등장부터 화폐의 본질을 등지고 어수선 했다. 경복궁복원의 재원을 마련하고자 무제한으로 찍어내고 강압으로 유통시켜 ‘견공(개)도 물고 다니는 엽전’이라는 천시와 질시와 원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돌고 돌아 경제를 살리는 화폐의 본질을 벗어나 혼란과 침체로 경제를 죽이는 전도(顚倒)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때는 그랬단다. 돈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현물을 쌓아두는 것이 현명한 취부의 수단이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서도 사람들은 변해갔다. 돈에 대한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가 아니라 ‘돈같이 하라’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수를 못 지키고 돈만 보면 돈을 가지기 위해 생각이 달라졌다. 전도(顚倒)몽상(夢想)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전(錢)이 아니라 전(顚)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단다. 화폐단위가 또 바뀐 것이다. 원(圓)이다. 돌고 돌아 잘 돌아 라고 둥글 원(圓)자로 표기 한 것이다. 헌데 너무 잘 돌아 문제가 생겼다. 돈의 유통가치가 무너진 것이다. 원래는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사용한 원은 원(元)이다. 경복궁중수를 둘러싼 대원군의 실정(失政)과 백성들과의 갈등을 경험한 고종황제는 돈의 귀중함을 뼈저리게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으뜸(元)임을 깨달고 원(元)으로 한 것이다. 고종황제의 원대한 포부 속에 출발한 원(元)의 경제도 한일합병으로 국권상실과 함께 일본제국주의 화폐단위 원(圓)을 사용하는 안타까움에 빠져야했는데 처음부터 우리민족의 뜻과는 무관하게 사용된 것이다. 이 원(圓)이 일제가 우리 조선민족을 착취한 원동력이다. 징용으로 끌고 가고 정신대로 끌고 가고 탄광으로 공장으로 징발해서 착취한 돈이 원(圓)이다. 소위 대동아전쟁 전비(戰費)핑계로 강제저축으로 착취하고도 패전(敗戰)으로 단돈 1원(圓)의 보상도 없이 지금까지 뻗대고 개기고 있는 돈이 원(圓)이다. 해방 후 좌익세력이 위조화폐를 찍어내어 혼란을 몰고 온 소위 조선정판사위조지폐사건의 돈이 원(圓)이다. 해방 후 1950년 최초로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화폐의 단위도 원(圓)이다. 한국전쟁 발발로 물가가 400배로 올라 1953년 대한민국 제1차 화폐개혁을 몰고 온 돈이 원(圓)이다. 당시의 화폐가치 절하(切下)는 100대 1이였단다. 이래저래 원(圓)은 우리서민들의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이래저래 원성(怨聲)만 불러왔다. 그래서 원(圓)이 아니라 원(怨)일 지도 모른다. 그때100대 1의 경쟁을 물리치고 새로운 화폐가 등장한 돈이 이었다. 이번에는 환(圜)이다. 환의 원뜻은 ‘두르다 에우다 둥글다’이다. 돌고 돌아라. 는 뜻이다. 헌데 한문의 뜻과는 달리 돈만 보면 환(換)이 되고 만다. 환(돈)만 보면 환장(換腸)을 하는 것이다. 등장 배경부터 예사롭지가 않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6.25민족상쟁의 전쟁 통에 피난살이로 근근이 연명하든 민초(民草)들은 영문도 모른 채 100대 1의 화폐가치의 절하를 당하였으니 허파가 뒤집히고 간장(肝腸)이 뒤집히는 환장(換腸)을 하게 된 것이다. 더더욱 그때는 전쟁 통이라 부동산보다는 현금에 집착하든 시절임으로 기절초풍 억장이 무너지는 참담한 충격이었다. 그것도 화폐개혁 3일후부터는 구권(舊券)사용을 금지했으니 민초들의 환장은 극에 달했으리라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그때부터 민초들의 정부 불신(不信)도는 과중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민초들은 돈만 보면 환장하기 시작했다. 이 또한 환(圜)이 아니라 환(換)인지도 모른다. 헌데 환장할 사건이 또 있었다. 원성할일이 또 있었다. 이번엔 또 환(圜)을 원으로 바꾼 것이다. 1962년 2차 화폐개혁이 단행된 것이다. 이번엔 원은 한문이 없다. 이번엔 10환은 1원으로 절하한 것이다. 또 일주일 뒤까지 구권을 금융기관에 예치하도록 의무화하고 인출을 동결해 화폐 '개혁'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번엔 화폐개혁을 비밀리에 한다고 화폐를 멀리 영국에서 찍어왔다.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 국력이 미미한 시절이라 영국에는 한글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100원권 화폐의 독립문이 ‘득립문’으로 인쇄되어 유통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래저래 돈은 말도 많고 탈도 많다. 헌데 돈의 역기능인 쌓아두기는 고액권이 좋다. 하여 최근 5만원권 발행이 문제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5만원권 발행 첫해인 2009년부터 2015 5월까지 누적 발행액은 100조2000억원, 환수액은 43조1000억원으로 집계됐다. 평균 환수율은 43%이다. 발행 첫해인 2009년 7.3%였던 5만원권 환수율은 2010년 41.4%, 2011년 59.7%, 2012년 61.7%로 계속 오르다가 2013년 48.6%, 2014년 25.8%로 크게 감소했다. 경제지표에 회수율이 좌우됨을 알 수가 있다. 2014년은 세월호참사 때문에 경제가 어려웠다. 2015년도 문제이다. 5월까지 누적 환수율은 38.7%이다. 즉 8조2632억 발행에 3조2021억원 환수가 집계되고 있는데 ‘메르스’ 파동으로 경제가 어려워져 최악의 환수율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014년부터 경제를 살리고자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붇는데도 고액권 5만원권은 환수되지 않고 국민을 파고들어 국민들의 지갑 속에 잠자고 있는 것이다. 우려했든 화폐의 역기능의 주범이 5만원권이 된 것이다. 누구인가 그랬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한평생 고생하며 힘들여 쌓아둔 돈도 죽을 때는 못 가져가고 빈손으로 간다고! 그랬다! 착실하게 한평생 살다간 범부중생들의 철학이다. 그랬다! 부처님의 위대한 철학은 달랐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생에서 돈을 쌓아두기 위해 저질은 업장에 밀려왔다가 금생에서 돈을 쌓아두기 위해 저질은 업장(業障)을 과중(過重)해서 되가져간다는 인과업보를 가르치신 것이다. 그랬다! 하여 부처님은 돈은 쌓아두는 물건이 아니라 일체 중생들의 삶을 위하여 회향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하여 부처님의 제자들이 돈을 쌓아두는 것을 질책하고 경계하셨다. 하여 의천 대각국사께서는 돈은 돌고 돌아야 한다고 돈이라고 하신 것이다. 하여 대승불교의 꽃! 보살의 수행덕목으로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의 여섯 가지를 설하시고 육바라밀의 제일 덕목으로 보시(布施)를 설하신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삼일(三日)닦은 마음은 천겁(千劫)을 이어갈 보물이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니라! 백년 쌓아온 재물은 하루아침 사라진 티끌이니라. 고 하여 쌓아 두지 말고 아낌없이 주리라!
하여 다음 생에 가져가야할 업보도 모두 아낌없이 주리라!
하여 보살의 길을 가리라! 보현의 길을 가리라!
나무보현보살! 나무보현보살! 나무보현보살마하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