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사진가) 이 글은 크게 체계적 접근 방법으로 유엔사를 분석하였다. 체계적 방법론의 전개를 위해 유엔사의 역사와 구조와 기능에 대해 분석한다. 이때 역사는 체계의 발생, 발전 과정으로, 구조는 요소들간의 관계로, 기능은 다른 체계에 대해 미치는 영향력 즉, 능력이란 면에서 조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을 통해 유엔사의 위법성과 위험성을 드러내며 유엔사 해체의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1. 주한유엔군사령부의 역사
1) 유엔사 탄생의 위법성
주한유엔사는 유엔창설이래 유엔안보리가 결의한 최초의 군사기구란 점에서 유엔군 즉, 국제연합군의 성격과 위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은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것이었다. 탄생에서부터 위법성 논쟁에 휘말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국제연합군이라는 명칭은 국제연합 헌장상에는 없는 것이다. 굳이 해석을 한다면 유엔헌장제43조 `모든 유엔회원국은 안보리의 요청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 혹은 그 이상의 특별 협정에 따라 ...... 필요한 병력, 원조, 통과권을 포함한 편의를 안보리에 이용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에 의해 안보리의 지시를 받는 무장력이 될 것이다.그러나 제43조의 전제조건은 `특별협정`이다. 특별협정은 1946∼47년의 체결준비 단계에서 미·소(美蘇)의 대립으로 답보상태에 빠진 채 성립되지 않아 본래의 국제연합군은 설치되지 않고 있었다. 실제에 있어 특별협정에 의한 국제연합군의 구성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국제연합군의 창설은 어느 것이나 총회 또는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에 입각하여 조직되었다. (주1)
한국전쟁에 있어서의 국제연합군은 안보리의 권고에 따라 15개국의 군대와 국제연합 결의에 앞서 군사행동을 취한 미군으로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유엔헌장에 근거한 국제연합군이 아니라 이사회의 권고에 임의로 응한 가맹국의 강제 행동이라 할 수 있다이와 관련 걸프전 당시 미국이 보인 태도는 한국전 당시와는 모순된다. 미국은 걸프전에서의 군사행동이 한국전쟁의 그것과 정반대로 유엔차원의 행동이 아닌 자위권적 조치, 즉 임의행동임을 주장했다.
`유럽의 국제법 교수와 실무자들은 탈냉전적 상황에서 안보리상임이사국들의 입장이 일치된 가운데 이루어진 대 이라크 군사행동을 냉전시기 사문화되었던 제7장의 규정에 따른 군사적 강제조치의 최초의 적용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대다수의 미국교수들은 유엔헌장 제43조의 특별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제42조의 군사조치가 법적으로 발동이 불가능하므로 대 이라크 군사행동을 제42조의 군사조치로 해석하는 것은 모순이며, 또한 문제의 군사행동이 유엔의 여하한 통제도 받지 않고 이루어졌다는 점을 비추어 볼 때 이는 유엔의 행위 즉, 강제조치라고 볼 수 없으며 문제의 군사행동의 법적 정당화는 이를 헌장51조에 의한 집단적 자위권행사로 볼 때에 가능함을 역설한다.` (주2)
걸프전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에서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군사행동이 안보리의 군사적 강제조치로 해석되기 위해서는 안보리의 군사적 제재 권한에 대한 유일한 법적 근거인 유엔헌장 제42조가 적용되어야 한다. 제42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제41조에 규정된 조치가 불충분한 것으로 인정되거나 또는 불충분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 또는 회복에 필요한 공군, 해군 또는 육군에 의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한 조치는 유엔회원국의 공군, 해군 또는 육군에 의한 시위, 봉쇄 및 다른 작전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헌장 해석상 제42조는 독립적으로 적용된다고 볼 수 없다. 42조는 안보리에 병력을 제공하기 위하여 안보리와 회원국들간의 특별협정 체결을 규정하고 있는 제43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으며, 제43조에 의한 특별협정 체결은 제42조에 의한 군사적 강제조치 적용의 전제조건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주3)
이는 헌장 106조에 의해 재확인되고 있다. `안보리가 제42조상의 책임수행을 시작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제43조에 규정된 특별협정이 발효될 때까지... 유엔회원국과 협의한다`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안보리의 요청에 따라 회원국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병력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견해(주4)에 따라, 특별협정 체결 없이 회원국의 병력을 사용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도 거기엔 필요한 전제가 있다. 그 병력이 안보리 강제조치에 사용되었다고 하기 위해서는 안보리의 사용권아래(at the disposal) 놓여야 하는 것이다. 안보리의 사용권하에 놓인다는 것은 그 통제(control)하에 놓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통합군대가 한국전에서 걸프전까지 안보리의 작전 통제를 받은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이름은 국제연합군이라고 하지만, 미국정부가 임명한 사령관이 국제연합군을 지휘하였으며, 국제연합 기관의 직접적인 통제에 따르지도 않았던 것이다. 15개 참전국군대는 그 소속국에 의해 미국에게 제공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들의 행위는 국가책임에 관한 국제법위원회 초안 제1부 제9조의 `일국의 통제하에 놓여진 타국 또는 국제기구의 기관의 행위는 국제법상 그 국가의 행위로 간주된다` (주5)는 원칙에 의해 다루어짐이 마땅하다.
유엔군사령부와 국제연합과의 연관 관계는 그것이 이사회의 결의에 입각한 것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전혀 없다. 흔히 유엔군사령부설립의 근거로 제시되는 1950년 7월7일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S/1588)제 3항을 살펴보자.
`3.전기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에 의거하여 군대와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모든 가맹국은 이런 군대와 원조를 미국의 통합군사령부하에 제공할 것을 권고한다.
`여기선 분명 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s Commad)가 아닌 통합사령부(Unified Command)를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북의 입장을 보자.
`...결의안이 보여주는 것처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군>을 조직한 것이 아니라 다만 유엔성원국들이 <제공>하는 <무력>과 기타 <원조>를 미제가 통솔하는 련합사령부가 사용하도록 권고한 것이다. 여기에는 <유엔군>을 조직파견 한다거나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한다는 표현조차도 없다.` (국제법사전, p.572, 사회과학출판사, 2002년)
또한 이 결의안은 `권고`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권고(recommend)는 요청(Request)보다 훨씬 약한 표현이다. 그리고 통합군사령부에 제공하는 군대와 원조의 내용은 전적으로 회원국들에게 일임되어 있다. 게다가 한국은 유엔 가맹국이 아니었으므로 7월7일 결의에 권고적 또는 법적 구속력을 받지 않았다. 안보리의 결의의 효력은 유엔헌장 제25조의 규정에 의해 가맹국에 대해서만 법적 구속력이 있다. 제25조의 안보리의 결정(decision)은 모든 결의(resolution)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헌장 규정에 의한 `결정`에 한한다고 해석된다. (주6)
한국은 유엔가맹국이 아니므로 이 결의는 명백히 가맹국 또는 미국에 권고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결의가 한국에 대해 법적 구속력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주7)
더구나 절차상의 문제도 흔히 지적된다. 유엔헌장 제32조에 따르면
`안전보장이사회의 이사국이 아닌 유엔회원국 또는 유엔회원국이 아닌 어떠한 국가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심의중인 분쟁의 당사자인 경우에는 이 분쟁에 관한 토의에 투표권 없이 참가하도록 초청된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회원국이 아닌 국가의 참가에 공정하다고 인정되는 조건을 정한다.` 당사자인 북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대만문제로 소련이 안보리에 불참하고 있던 기회를 틈타 기습적으로 결의안을 처리했다. 당사자인 북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초청되지도 않았다. 이는 유엔총회 제28차 회의 결의와 대비해 보면 더욱 명백하다. 1973년 10월1일 유엔총회 제28차 회의에서는 조선문제를 토의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를 무조건 초청할 것을 결정하였다.` (현대 국제법연구, 과학백과사전 종합 출판사, 평양, 1989, p.158)
상황이 위에서 예시한 바와 같음에도 7월 25일 미국은 통합사령부(Unified Command)를 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 Command)란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어 설립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로서 7월7일의 결의는 갑자기 유엔군사령부 설립으로 둔갑되고 말았다. 이는 미국이 유엔의 결의를 일방적으로 왜곡한 과정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이다. 당시 미국이 주도하던 유엔의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유엔의 한국전쟁 개입에는 여러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첫째, 유엔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의 적법성에 대한 문제가 그것이다.
유엔의 1950년 6월 25일의 결의(S/1501)에 의해 유엔은 당시의 한반도 사태를 내란으로 본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결의에서 북을 `북한`(the North Korea) 또는 북한당국(the authorities of North Korea)이라 표기한 반면 남은 `대한민국`(the Republic of the Korea)이라고 표기함으로서 남을 합법정부로 인정함과 동시에 북을 독립된 국가로 인정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주8)
이는 유엔 스스로도 한반도분쟁을 내란 사태로 파악하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내란에의 개입은 국제법적으로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Pereterki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침략은 일국가에 의한 타국가에 대한 무력적 공격이다...한국의 일부에 의한 한국의 타부에 대한 한국의 사태는 침략전쟁이 아닌 것이 명백하다. 우리들에게 그것은 내란이다...한국인민의 국가 통일과 독립을 위한 한국민의 숭고한 투쟁이다." (주9)
또한 1950년 8월3일 소련대표는 제482차 회의에서 한국의 투쟁은 내란이며 이에 대한 유엔의 개입은 위법이라고 역설하였다."...한국분쟁은 국내적 분쟁이다. 남북미국이 그들의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내란으로 투쟁할 때에 남북미국간에 침략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것과 같이 남북한간에도 침략에 관한 규칙이 적용될 수 없다." (주10)
이들 예를 따르지 않더라도 일반 국제법상 내란은 국제법의 지배 밖에 있는 국내문제(Domestic affairs)이며 이에 대한 개입은 위법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승인된다. A.V.W.Thomas와 A.J.Thama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란은 국제법의 지배 밖에 있는 국내문제라는 것은 일반 국제법에 의해 확립된 법칙이다." (주11)
1950년 유엔총회에서도 그리스 사태에 대하여 위와 같은 원칙을 확인하는 결의를 채택한바 있다. "유엔총회는 ...어떤 국가가 위협이나 무력의 행사로 타국의 정부의 변경을 목적으로 타국의 대내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금지한다." (주12)
둘째, 유엔은 전쟁선언을 하지 않았다. 전쟁선포의 적법성문제는 1907년 `전쟁개시에 관한 조약`이 기준이 된다. 미 야전교범(FM27-10)도 헤이그 3협약의 효력이 있는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주13)
국제군사재판소는 독일의 주요 전범자들에 대한 기소장에서 독일의 조약의무 위반의 사실의 하나로서 동조약 1조의 위반을 들고 있다. (주14) 따라서 유엔의 결의와 권고는 전쟁선포에 해당하는 법적 조문으로서의 조건을 결여하고 있다. 셋째, 유엔헌장에는 군사참모위원회가 유엔안보리의 재량에 맡겨진 병력의 전략적 지시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유엔사는 유엔도 아닌, 또한 유엔사령관인 맥아더도 아닌, 미국합참의 작전통제를 받았다. 7월7일의 결의를 다시 살펴보자.
`3. 전기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의하여 군대와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여사한 군대와 기타 원조를 미국 관할 통합사령부에 제공할 것을 권고하며
4. 미국이 동 군대의 사령관을 지명할 것을 요청하며
5. 본 통합 사령관은 그의 재량에 의하여 작전중에 재참전국의 국기와 함께 국제연합기를 사용할 것을 승인하며
6. 미국이 안보리에 대하여 통합사령부 지휘하에 취한 활동에 관하여 적절한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요청한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제 84호, 통합군사령부의 설치권고(1588호), 1950.7.7)
이 결의가 유엔헌장에 보장된 군사참모위원회의 기능을 어떻게 무력화 시켰는지를 살펴보자. 유엔헌장 제46조와 제47조를 인용한다.
`제46조 ; 병력사용계획은 군사참모위원회의 도움을 얻어 안전보장이사회가 작성한다.
제47조3항 ; 군사참모위원회는 안전보장이사회의 감독하에 안전보장이사회의 재량에 맡겨진 병력의 전략지시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그러한 병력의 지휘에 관한 문제는 추후에 해결한다.`
여기서 전략지시(strategic direction)는 지휘(command)의 상위 개념으로 유엔안보리의 통수권을 전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주15) `지휘`는 군령과 군정을 통합하는 개념이며 전략지시는 일종의 통수의 개념이다. 즉, 군사적 영역을 넘어선 판단인 것이다. 예를 들어 전쟁의 목표를 방어위주에서 반격위주로 할지, 인민군에 대한 3.8선의 복구로 할지, 북측 지역의 점령으로 할 지에 대한 판단과 전략지시는 유엔안보리에서 판단하는 것이 이치에 맞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유엔헌장상의 군사참모위원회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유엔안보리를 유린하고 유엔으로 가야할 모든 권한을 미국정부에 귀속시켰다. 유엔군사령관은 유엔안보리의 전략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미 합참의 지시를 받게 되었고, 맥아더는 실질적으로는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를 받았다. 누가 봐도 유엔군사령부가 아닌 미군사령부로 비치어진다. 이는 미 합참본부의 전사에서도 인정하는 바이다.`미 합참이 유엔군사령부와 직접 의사소통을 갖게 될 안전보장이사회 소속의 위원회 설치를 반대한 것은 유엔이 전략과 전술에 관계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주16)
당시 미국으로서는 유엔에서 초유의 일인 유엔사 구성 문제를 놓고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치열한 음모를 진행했다. 미 합참의 전사기록은 그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50년 6월 마지막 주에 비공산권 국가로 구성된 군사동맹의 지도자로서, 미국은 침략행위에 대하여 정치적 제재 조치를 취하도록 헌장에 규정한 국제기구의 옹호하에 싸울 전쟁을 막 시작하려는 순간에 서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국, 유엔 및 주한군사지휘부 간 3자 관계에서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전쟁의 목표는 어떻게 확정할 것인가? 누가 유엔사령관에게 전략지침을 제공할 것인가? 유엔군사령관은 유엔과 직접 의사소통을 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을 통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와 이와 유사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군사적 정치적 고려사항들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서로 뒤섞이었다.` (주17)
결국 이 모든 비정상적인 고려사항들은 유엔헌장의 원칙을 벗어나 미국이 이익에 충실하게 결정되었고, 미국에 의해 장악된 유엔안보리의 체제에서 유엔헌장이 보장한 군사참모위원회는 유명무실화되었다. 미국이 군사참모위원회를 통해 지휘한다는 것은 소련과 함께 한국전쟁을 지휘하는 것을 의미했기에 미국으로서는 원치 않는 사항이었다. 미, 소등 5대 강국의 유엔 대표들에 의해 이 위원회 소속 관계자들의 급료를 지불하고는 있지만, 군사참모위원회는 지금까지도 유명무실한 단체로 전락되어 있다.
`군사참모위원회는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 미국,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의 고위 군참모들로 구성돼 있으며 발족 이후 한 달에 두 번 정도 약 20분간 지하 회의실에서 회동, 유엔 안보리가 자신들에게 아무런 일거리를 지시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확인한 채 폐회하곤 했다. 현행 유엔 헌장에 따르면 이 위원회는 안보리가 창설할 지도 모르는 다국적 군사기구에 대해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외교관들은 이 위원회의 회의 소집 포기는 유엔이 공동 군사행동을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대한 종말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이 위원회의 회의개최를 선호해 왔었다. 이 위원회는 세계가 냉전체제에 들어감에 따라 창설된 지 얼마 안되어서부터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한국동란 때에는 유엔이 이 군사참모위원회를 활성화시키지 않고 유엔군사령부에 군지휘권을 부여했었다.` (주18)
또한, 통합군사령부의 설치권고(1588호) 6항에 의하면 유엔군사령부가 유엔안보리에 대해 가지는 유일한 의무인 보고마저 `정기적인 보고서`가 아닌 `적절한 보고서`로 되면서 사실상 보고 의무마저 미국이 임의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유엔군사령부를 지휘하는 책임단위로서의 유엔안보리의 권한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당시 맥아더 유엔군사령관도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유엔과의 관계는 대체로 형식적이었다...나의 사령부와 내가 수행한 모든 것에 관한 전적인 통제는 나의 육군참모총장과 그 참모총장이 통제하는 나의 통신계통으로부터 나왔다. 내가 유엔에 보내기 위해 정상적으로 작성한 보고서까지도 국무성, 국방성에 의해 점검을 받아야만 했다. 어쨌든 나는 유엔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주19)
이런 이유로 유엔사가 과연 유엔의 보조기관, 행정기관으로서 제대로 된 자격을 갖추고 있었는가에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유엔사 탄생과정에서의 불합리성은 정전이후에도 한반도에서 불합리한 구조를 생산하는 원인이 된다. 그 중의 하나가 유엔군사령관 테일러(M.Taylor)가 미국과 마찰을 빚는 이승만 대통령의 제거를 염두에 두고 작성한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이다.
`그것은 한국군이 유엔군의 작전권을 벗어날 경우 반항적인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그들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며, 필요할 경우 유엔군의 지휘하의 군사정부 수립도 검토한다는 내용이었다.` (주20)
이것은 유엔군이 애초 부여받은 임무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북을 격퇴하는 임무에서 남을 통제하는 임무까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뒤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합의되지만 미국으로서는 한국군의 북진을 막기 위해 한국군을 유엔군의 지휘권 아래 두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은 조약에 대한 가조인이 있은 후 발표된 한미공동성명에서 `정치회담을 열기로 합의한 기간동안 한국이 무력에 의해 통일하려는 독자적인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밝힘으로써 미국은 한국의 단독 북진 가능성에 `임시적`이나마 족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임시적 조치로는 미국이 안심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은 한미 합의 의사록을 새로이 추진한다.
"대한민국은 상호협의에 의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상호이익에 가장 유리하기 때문에 변경하는 경우가 아니면, 유엔군사령부가 대한민국의 방위를 책임지는 한 그 군대를 유엔군사령부의 작전통제권(operational control)하에 둔다." (한미합의의사록 2조)
유엔사는 이로써 북뿐 아니라 남에 대해서도 군사적 주권을 행사함으로서 한반도에서의 실질적인 군사적 지배를 달성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정책을 견제할 수 있는 확실한 제도적 보장을 확보하였다. 이제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는 북한의 남진을, 그리고 [한미합의 의사록]으로는 이승만의 북진을 막을 수 있게 됨으로써 한반도에 관한 그들의 기본정책인 현상유지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주한미군역사쟁점전망, p.73, 김일영 조성렬 지음, 한울아카데미)
유엔사는 한반도의 정전상태를 관할하며, 남과 북을 분할통치하는 실질적인 무력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정전후 유엔사의 존재는 민족과 외세라는 대립구도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유엔이 책임있는 국제기구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과거 불합리한 유엔의 결정에 대해 그 실수를 반성하고 유엔사의 위법성을 시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유엔사는 미국의 국내법을 기준으로 해서도 위법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미국은 한국전에 대한 참전 결정도, 유엔사 설치에 대해서도 미의회의 비준이나 승인을 받은 적이 없다. 따라서 전쟁선포권을 가진 의회가 선전포고한 적이 없고, 대통령이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전쟁권`은 1973년이나 되어서 제정되었으므로 향후 북미평화협정체결시 이를 의회에서 비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의회조사국(CRS)의 최근 보고서에서 내리고 있는 결론이다.
한편, 미 군사평론가 구겔러는 군부가 월남전의 교훈에서 `군인은 정부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는 백악관의 시빌리언 그룹을 통한 전쟁선포에 강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며, 전쟁은 국민의 대표로 이루어진 국회에서 결정하고 그 결정이 국민의 것이 되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미 합참본부의 한국전에 대한 해석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즉 한국전 참전과 유엔사 설립은 미국 국내법상으로도 의회의 동의없이 백악관이 결정한 위법적 요소를 안고 있는 것이다.
2) 유엔사의 위기-위법성에 대한 유엔총회 결의
유엔사 최대의 위기는 아무래도 1975년 유엔총회에서의 해체결의일 것이다. 제3세계 비동맹국의 괄목할만한 진출과 함께 이루어진 성과중의 하나인 유엔사 해체 결의로 미국은 수세에 몰렸고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은 1975년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76년 1월 1일부로 유엔사를 해체할 것을 약속했다. 유엔사 해체는 미국이 유엔총회 결의 사항을 받아들여 해체를 결정하고 이 사실을 유엔안보리에 통보하면 되는 사안이었다. 즉 안보리의 새로운 결의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결의에 방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유엔총회에서까지 결의하면서 누가 봐도 시간끌기용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소위 `단계적 접근론`을 들고 나왔으며 결국 더 이상의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유엔사 해체가 임박했음을 인식한 탓인지 78년 한미연합사를 창설하여 유엔사의 작전통제권을 모두 이양한다. 이는 유엔사를 군사정전위원회라는 형식만 남겨 놓은 채 실질적인 작전권을 한미간의 쌍무 군사기구로 흡수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1957년부터 1978년까지 23년 동안, 주한미군 지상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하와이의 태평양군사령관이 아니라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가 직접 행사하였고,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주한미군사령관이 행사하였다. 그러나 주한미군사령관은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휘하에 있으므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행사한 것은 미합동참모본부였다. 한미연합사에 작전통제권이 위임된 것처럼 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아직까지도 유엔사에 작전통제권이 속해 있다.
이 문제는 유엔사의 구조에 가서 자세히 언급한다. 이러한 지휘체계는 오늘까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실적으로 한국군은 유엔사가 아닌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휘하에 배속되어 있는 군대인 것이다. 미국 건국 이후 다른 나라의 군대를 합동참모본부가 직접 지휘한 전례는 없다.
3) 유엔사의 현재
미국은 유엔사를 형식상으로라도 구색을 맞추기 위해 각국에 연락장교를 파견하도록 하고 있으며 2000년 4월10일 정전후 유엔사에서 철수한 그리스 정부가 재참여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고 연락장교를 파견함으로서 현재 유엔사에 소속된 참전국은 16개국 중 호주.벨기에.캐나다.콜롬비아.프랑스.네덜란드.뉴질랜드.노르웨이.필리핀.태국.영국.미국 등 13개국이다.
미국정부는 주한유엔군사령부를 통해 북과 정전협정을 손질하거나 이를 대체할 새 협정을 마련할 수 있는 "광범위한 특권"을 가질 수 있으며 이같은 변화에 대해 미 의회의 비준을 받지 않을 수도 있는 입장이라고 미 의회조사국(CRS)의 최신 보고서가 밝혔다. 미국이 유엔사를 포기하지 않고 부활시키고 있는 이유를 이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다.
더구나 유엔사는 1999년 서해교전을 통해 다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상황에 본격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1차 서해교전의 초점은 북방한계선을 임의로 설정한 당사자이며, 교전수칙을 실제로 관할하는 유엔사에 있다. 또한 경의선과 동해선의 연결공사 과정에서 개성공단 착공식을 둘러싼 교류과정에서 유엔사가 행하고 있는 본격적인 간섭은 아직도 유엔사가 불안정한 정전체제의 관리자임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고성의 금강산전망대 등에는 유엔사 직원이 일정기간 상주하며 이 문제를 감독하기도 했다.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관측소에는 태극기와 함께 유엔기가 펄럭이고 있다. 가끔씩 감독을 나오는 유엔사의 직원들에 의해 전방부대의 한국군은 통제되고 있다.
유엔사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 탄생과정에서부터 운영되는 과정에서도 위법적인 요소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현재 위법적인 유엔사가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관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