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선생님이 '그렇게 어렵게 말고, 조금 쉬운 글로' 하나만 더 보내달라고 하셔서 다시 써 보내드린 소감입니다:
한국 산천과 역사의 일부가 된 사람들
-스톤워크 코리아2007을 마치고, 몇 가지 잡감(雜感)
김레베카
그날 저녁 내가 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임진각에서 추모제 마치고, 서울 와서 거나하게 술들 걸쳐가면서 저녁 먹고, 시원섭섭 성취감에 젖어 창신동 최목사님 교회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서로 돌아가며 소회(所懷)를 나누던 그 저녁.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여러분들은 이미 내가 바라보는바 한국 산천의 일부라고, 그러니 어찌 그 산천의 역사의 일부가 아니겠느냐고.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이라고. 정말 그랬다. 이제 지리산을 보고 무츠코상의 “아막사노 나다니 학수”나 기무라상의 “모여서 사는 것이 어찌 갈대들뿐이랴”를 같이 떠올리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부산 구포다리에서 쿠아노상의 “요~ㄴ 짜!”하는 구령소리, 지금 수레가 모셔져 있는 임진강역에서 이토상의 “임진강 미즈끼오꾸...”하던 가락 등을 어찌 같이 떠올리지 않을 수 있으랴.
흔히 말하는 ‘시민연대’도 시발점(始發點)은 아마 그런 찌릿찌릿한 감정들 간의 교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3월 말 사전스톤워크 삼아 시모노세키와 키타큐슈에 갔을 때도 그랬다. 말로만 듣던 우리 피식민사(被植民史)의 적나라한 현장 앞에서, 펑펑 울고 싶은데도 도무지 펑펑 울 수가 없었다. 몇 대째 조센징의 험한 삶을 이어오신 배동록 선생님은 물론, 평생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기계와 맞서 싸워온 금싸라기 같은 일본 시민 여러분이 바로 옆에 계셨기에 말이다. 가해자 피해자를 떠나 우리가 다, 어쩌면 그저 다 같은 사람일뿐이라는 그런 자각(自覺). 그건 ‘자각’이라기보다는 참으로 깊은 슬픔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고통 받았고 그렇기에 그 고통을 어떻게든 견뎠고, 그렇기에 늘 그 견딤을 다른 이들과 같이 나누고자 했던 이들은 밑바닥 인민들이었다.
그렇다고 그 ‘감정’으로 저마다의,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차이를 함부로 상쇄하려 들어서도 안될 일이었다. 가해자는 가해자고 피해자는 피해자라는 얘기가 아니라, 진정한 소통은 서로가 가진 차이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서 나온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는 얘기이다. 우리가 가진 소위 ‘역사’는 끝까지 이해받고 존중받아야할 그 내적 차이의 아주 작은 일부일 수도 있었다. 일순간에 분위기를 서먹하게 만드는 시선의 어떤 불투명함, 당혹스러움, 의심, 등등은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 드는 노력이 단지 그 사람의 출신 ‘국가 역사’에 대한 이해에 그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식민지 역사의 한 가지 특징이라면 영원한 증오심이랄까, 하여간 그 비슷하게 자폐적으로 안으로만 말려드는 경향이 있는 타자에 대한 어떤 이해이다. 나이 어린 한국인들은 자꾸 자라나고, 식민지 역사를 접하게 되고, 어느 순간에 이르면 자기혐오를 벗어던지기 위해서라도 일본과 일본인을 증오할 수밖에 없다. 나는 예전에 내가 아주 존경하던, 또 매우 진보적인 사고와 경력을 갖고 있던 한 일본친구가 쓴 기말리포트에 “..일본은 단 한 번도 남의 나라 식민지가 되어본 적이 없다”는 대목이 있는 걸 보고 그야말로 경악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문장’ 역시 식민지 역사의 일부이다. 어린 일본인들도 자라나 자국의 식민화 역사를 배우게 되고, 옛 식민지 국가 국민들의 집단적 증오를 목격하게 되고,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게 되고,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일본이란 나라가 바로 그러한 식민화 ‘덕택에’ 가질 수 있었던 미덕을 이끌어내기 마련이다. 식민지 역사가 통째로 뒤집어져 바뀌지 않을 이상, “사죄는 이미 받아들여졌고, 또 영원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관계없다! 그 자폐적인 증오의 성채에서는 결국 아무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이내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일본인(국민)’이니 ‘한국인(국민)’이니 하는 호칭 자체가 사실상 실체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집단이 대규모 대리전(代理戰)을 치러줄 용병(傭兵)을 소집해낼 때의 암호, ‘같은 역사와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끈질긴 망상, 허구이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카미가제로 불려나가 죽어야했던 이들은 스즈키니 요시모토니 하는 이들이었지, ‘일본인’들이 아니었다.
스톤워크 코리아2007에서 내가 만난 이들도 바로 그런 이들이었다. 모든 전사자를 위한 추모의 비석을 모든 산 사람의 마음을 열고 엮는데 그토록 창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이들(특히 그 수레는 놀라운 생물이었다). 험악한 남한 땅 먼지구덩이 속을 “사죄와 우호, 평화”를 전파하고 또 전파하고 다녔던 이들(나는 사죄라기보다는 ‘반복’의 미덕을 깨달았다). 산천의 생김새와 역사는 달라도 아시아 인민이 결국 같은 운명 한 공동체 ‘시민’임을 깨닫게 해준 이들 용감한 형제자매들에게 아낌없는 격려와 애정을 보낸다. 옥죠상은 스톤워크 코리아의 맨 첫 구상이 2005년 스톤워크 재팬 당시 추모비를 이끌고 히가리항에 이르러 배를 기다리면서 거의 ‘장난처럼’ 시작됐었다고 내게 알려주었다. 그대들의 불씨는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