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기말 리포트들 쓰느라 고성 금강산 콘도에는 밤 아주 늦어서야 닿았다. 강제숙 선생님은 허리를 비롯해서 몸이 많이 안좋아보였고, 아침식사 할 때 보니까 일본 양반들도 이제 곧 ‘키타조센’ 쪽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게 흥분보다는 중압감으로 다가온 듯 했다. 불쑥 농담처럼 이토상한테 던진 질문도 그 양반이 정색을 하고 되넘기는 걸 보고 아, 일본사람들 북한에 대한 생각이 대게 이렇겠구나,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짧게짧게라도 여덟 번이나 감옥간 적 있는 줄 아는 내가 이토상, 북한 감옥에도 이참에 한번 가보시지 그래요? 이토상 왈, 싫다. 왜 싫은데요? 일본 감옥하고는 다를 거거든. 일본 감옥 되게 좋다, 세끼 밥 꼬박꼬박 먹여주지, 들어가면 푹 잘 쉬고 나온다고. 북한 감옥은 글쎄, 무서울 것 같다, 일단 세끼 밥이 제대로 나올지 알 수 없고..
기아니 인권이니 핵문제니 하는 북한 관련 국제사회 이슈들을 대할 때마다 ‘마치 북한 당국인양’ 사고하기 좋아하는 우리 같은 중좌파 남조선 사람들이 조일관계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아마 이런 거다, 조미관계나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는 북한이 늘 “깡패국가”이지 않으면 안되는, 서방 강대국 질서 아래 부당히 억압당하고 있는 어떤 (민족주의라기보다는) 민족적 권리. 2002년 당시 일본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방북, 양국 관계정상화를 목표로 김정일과 맺은 조일평양선언은 이듬해 납치문제, 핵미사일문제 등이 전면화되면서 휴지조각이 되었다. 일본은 김대중 정부 탄생 직후의 미국처럼 전혀 엉뚱한 길로 갔다. 만경봉-92호 등 북한 선박에 대한 입항 거부, 재일본 조총련 시설의 면세혜택 중지 등 강경조치가 잇따르는가 하면 북한 핵미사일 위협을 내세워 주변사태법, 개정 자위대법, 테러대책 특별조치법, 유사시법 같은 전쟁을 위해 필요한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속속 마련해나갔는데, 특히 한반도 유사사태를 일본 안보와 직결된 문제로 간주하고 미군이 개입할 경우 일본 자위대가 이를 적극 지원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군사작전에 군용 아닌 민간비행기까지 ‘자격취득’시켜 동원될 수 있도록 만든 유사시법은 북한 당국에 의해 “과거 일제시기의 ‘국가총동원령’과 맞먹는”(<로동신문> 2004년 1월 6일자) 법령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토상 같이 일본 공산당 내에서도 툭하면 극좌로 몰리는 인생을 살아온 일본인에게마저 북한은 단순히 독재체제에 지나지 않았다. 물안마을에서도 금강산에서도 그의 입장은 견고하다 못해 단호했다. 가장 큰 문제는 북한이 (진정한 ‘국가’로 설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독재체제란 데 있으므로 그 불건강한 체제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헌데 이는 북한 사회 내부로부터의 변혁, 북한 인민 자신들에 의한 혁명 없이는 불가능하다. 밖에서 안을 깨 열어보려고 해봐야 말짱 헛것이라는 얘기였다. 이 ‘자생적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북한 독재체제의 역사적 근원(일제 인프라를 오히려 강화시킨 미군정)이 현재 그것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적 틀(동북아라는 미일안보우산)과 구조적으로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토상의 무관심이었다. 그러니 밖에서의 구조적인 인풋없이도 안에서의 체제변화가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물론 지나치게 단순한 대답일 수 있었다. 대부분의 북한학자들에 의하면 북한은 1980년대부터 이미 ‘점진적 해체’의 길을 걷고 있는 체제였고, 주민통제기능까지 하는 비상경제시스템으로 인해 제대로 된 개혁ㆍ개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체제가 붕괴해버릴 테니까) 사회였다. 그러니까 ‘사회’라고조차 할 수 없는, 붕괴 아니면 독재체제의 근근한 유지=점진적인 해체만이 가능한 그런 사회. 그러나 그런 사회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식의 역사적인 구체성에 어쨌거나 인식이 미치게 되면, 민족으로서의 존엄과 영광을 그 ‘사람’의 인간성과 끊임없이 맞교환하는 북한 독재체제에 대한 사회정치적인 이해가 현격하게 달라지리란 것 또한 사실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통제사회’는 우울하더라는 것이었다.
우선 동행한 일본 양반들 앞에서 정말 ‘남보기 부끄러웠다’. 대체 뭣들 하느라 반세기가 넘도록 이 코딱지만한 땅 하나를 아직 통일 못하고 있단 말인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금강산 출입절차는 해외여행과 유사합니다”. 첫 집결지인 화진포 아산휴게소에서 꼼꼼한 신분확인, 짐 검사(난 여기서 목숨같은 내 소니 디지털녹음기를 잡혔다), 여행증 발급 등 절차를 마친 다음 다시 남측, 북측 출입사무소를 각각 거쳐야했다. 그러느라 버스를 서너번은 갈아타야하고 그러느라 짐칸의 짐도 서너번은 내렸다 실었다 해야 하는 그야말로 울화통 터지는 출입. 아산휴게소에서 금강산까지 불과 30여km 거리를 무슨 군사작전 하듯 헤쳐나갔다. 평시도 전시도 아닌 DMZ는 기이한 영토였다. 무장한 대치 속에 오래 방치된 자연은 무성했지만, 또한 처참하도록 헐벗어 있었다. 동승 안내원에게서 엄격한 주의사항 들어가면서 콘크리트 말뚝만 하나 달랑 박혀있는 군사분계선을 포함, 근 8km에 달하는 비무장지대를 북측 인도차량의 삼엄한 인도 하에 통과했다.
북측출입사무소에서부터는 인민무력부 직할대 군인들의 살벌한 표정과 맞서야했는데, 지극히 잉여적으로 다가오는 그 무력(武力), 오랜 굶주림과 혹독한 훈련, 통제 등을 짐작하게 하는 신체 형상들은 살벌함과는 또한 거리가 있었다. 지난 6월 1일 개통한 내금강 코스를 따라 가면서 비로소 근거리에서 구경해볼 수 있었던 북한 주민들 모습 역시 마찬가지였다. 밭에서 일하는 아낙네들, 물가에서 노는 아이들, 낚싯대 매고 집으로 돌아가는 할아버지, 그 뒤를 쫄랑쫄랑 쫓아가는 개 한마리. 하나같이 야트막하게 지어진 흙집들, 초입 언덕마다 붉은 기 내려쥐고 시선은 먼 지평선 향한 채 미동도 않고 서있는 경계병들. 도처 궁핍, 처처 고립. 애잔하고 애잔했다. 땅거미가 져도 호텔 바깥 마을에서는 불빛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2000년 말에 NASA가 찍어 이어붙인 우주사진이 자꾸 떠올랐다, 빛 한점 없는 동토(凍土). 누구 말마따나 남한은 일개 섬에 다름아니었다.1)
철통같은 (사상)통제는 네가 네 사상의 '표기'가 되지않으면 안되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희안안 일상=볼거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람보다도 붉디붉은 반흘림체 글자들이 늘 눈에 먼저 들어왔다. 내금강 가기 전 금천리, 삼일포 가는 길에 봉화리. 남측 안내요원이 설명했다, 김일성혁명연구소라 불리는 곳이 마을회관입니다. “위대한 김정일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동지 만세” “조선 인민들의 철천지 원쑤인 미제 침략자들을 소멸하라”같은 표어를 곧잘 볼 수 있었다. “..아들딸이 되자” “..총폭탄이 되자”는 식의 표어가 쓰인, 시설이라야 조그마한 운동장과 흙벽건물이 전부인 횡뎅그레한 학교들도 보였다. 총 11년 의무교육(유치원 1년, 초등학교 4년, 중학교 6년)에 중학교 졸업후 대학진학율은 10% 정도라고 안내요원이 설명해주었다. 군입대는 15살부터 가능하고 지원제라고, 한번 가면 7~10년 정도 있게 된다고.
첫날은 교예공연을 관람하고 둘째날은 내금강을, 셋째날은 외금강 코스 세 곳 중에서도 해금강 부근을 둘러보았다. 온정리 쪽에서 내금강으로 넘어가는 길은 험하기 그지없었다. 금강산 4대 사찰이라는 표훈사(얼굴 사납게 생긴 가짜 주지가 있었다)를 지나니 기암절벽 만폭동 계곡이었다. 보덕암, 묘길상 보고 올라가 도로 장안사터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마다 비파담이니 진주담이니 하는 에머럴드빛 소(沼)가 있었다. 산 전체가 말 그대로 잘 깎아놓은 금강석이었다. 단 이틀이면 그 보석을 맘껏 관람하고 서울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일제시대였다면 말이다.2)
해금강과 부근 삼일포 등을 둘러보고 호텔로 돌아와서는 예정했던 대로 평화제란 걸 가졌다. 한일 대표들의 인사말, 슈게상과 조상 두 스님의 오이노리(기원)에 이어 하동에서도 들은 적 있는 ‘섬진강 소리학교’의 김새아, 유산하 두 아이들의 ‘상주아리랑’에 맞춰 운동판 살풀이 전문 한영애 선생이 기원춤을 추었다. 불 붙인 사기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천천히 한번 돌더니, 나뭇가지로 얽어만든 배를 높이 치켜들고 길이가 15m는 족히 넘을 듯한 굵직한 광목 천 한가운데를 죽죽 찢어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렇듯 힘겹단 뜻이렷다, 저렇듯 조심하고 또 단호해야한단 뜻이렷다. 식민지 세월 또 안겪으려면. 관광 와있던 남한 아주머니들, 버스 기사 아저씨들이 웬 구경이냐는 듯 목 빼고 쳐다보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괴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버지 어머니 어서 와요 북간도 벌판이 좋답니다.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1) http://www.cojoweb.com/earthlights.html
2) “관광객 숙소가 있는 외금강 온정리에서 내금강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금강산 북쪽 자락을 타넘기 때문이다. 온정령 오르막길은 굽이굽이 무려 106굽이. 거기다 온정령 굴(터널) 지나 고개를 내려서면 비포장도로다. 그런 길로 1시간40분을 달린다. 옛 사람들도 이렇게 힘들게 내금강을 찾았을까? 일제시대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경성(서울) 사람들은 기차편으로 철원까지 간 뒤 전차를 갈아타고 내금강역으로 직행했다. 내금강 역에서 장안사까지는 걸어서 20분, 버스로는 고작 5분 거리였다. 외금강 가는 사람들만 말휘리역에서 내려 차편으로 온정리로 넘어갔다. 분단과 함께 철로가 끊기면서 전통적인 내금강→외금강 순서의 금강산 여정이 뒤집힌 것이다.”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752788
“금강산도 오랫동안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가는 116km 연장의 철길이 있었어요. 전에는 서울에서 토요일 저녁 9시에 차를 타면 철원에 도착해 12시쯤 금강산 전기철도로 갈아타게 돼요. 타고 간 객차를 그대로 전기기관차에 연결만 하면 됐던 겁니다. 그래서 침대 칸과 객실 칸을 그대로 끌고 내금강까지 올라가 아침 7시경에 도착합니다. 잠은 차에서 자연히 해결하게 되고, 내려서 조반을 먹은 후 내금강을 구경하는 거죠. 거기서 다시 저녁 9시 차를 타면 여기 아침 7시경이면 도착했어요.” <8.15의 기억-해방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체험>(한길사, 2005) , 1924년 경기도 연천생 이순복씨 진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