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연대 - 스톤워크 코리아2007을 마치고
이토 간지 선생님이 언제언제부터 부탁하신 ‘스톤워크 코리아2007(SWK)’ 참가소감을 이제야 쓴다. 개인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무슨 뾰족한 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일본 실행위원회의 여러 선생님들이 이번 스톤워크를 위해 들고 들어오신 화두, ‘사죄’란 것(우호나 평화 앞에 그것이 선행되어야 할 이유, 역사적 관계가 빚어낸 죄과罪過나 원한이 어떻게 해소, 적어도 변형될 수 있는가, 등등)을 두고 머릿속에서 벌어진 이런저런 갈등이 SWK라는 ‘행사’를 ‘되돌이켜보는’ 단순한 행위를 가로막았다고나 할까.
SWK는 내게 두 가지 큰 교훈을 가져다주었다. 하나는 이제 한국 산천을 떠올릴 때면 반드시 같이 떠올리게 될,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바 한국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린 후쿠오카, 오사카 등지에서 오신 양심 있는 일본 시민 여러분이다. 이들은 물론 일본 시민사회 내에서도 가장 열정적으로, 가장 인간적으로 살아있는 세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깨운 인자因子는 얘기를 들어보니 일본 제국주의 아래 신음하던 재일 조선인을 비롯한 ‘비일본인’들의 존재였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분류는 늘 엄청난 살상과 고통을 동반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은 동아시아 민중들을 군대나 마찬가지로 여러 ‘급級’으로 나누어 지배했고(피식민국 가운데서도 예를 들어 한국은 몽골이나 중국보다 위에 있었다), 한국은 채 10년도 안될 기간 동안 근 100만에 달하는 인구를 ‘빨갱이’ 내지 ‘반동’ 혐의를 씌워 학살해버린 어마어마한 ‘양민학살’(용어 자체가 일제의 유물이자 ‘양민’ 아닌 이들에 대한 학살은 괜찮다는 차별을 내포한) 기록을 갖고 있다. 일제 잔재를 청산은커녕 더 악질적으로 계승한 군부독제체제는 ‘반공反共에 투철한 국민’들로부터 ‘빨갱이’를 철저히 솎아내는 데서 집권의 정통성을 찾았다. 강요된 침묵, 내부의 반목과 증오가 체질화되면서 분단체제도 갈수록 고질화되어갔다. 기억은 ‘뭔가 잊어버린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한 기억, 망각에 대한 기억이 되었다. 집단적인 기억회복을 위한 최초의 자각은 결국 상충하는 두 기억 간의 싸움이라기보다는 기억주체의 “망각을 짜내는”(벤야민) 서술에 달려있었고, 그 서술적 지평=역사성을 일상생활 공간에서 가시화하는 담론주체에 달려있었다. 내게는 SWK를 하러 한국을 찾은 이들 일본인들의 존재가 단순히 ‘사죄하는 일본인들’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들과 우리가 다같이 애써 복원하지 않으면 안될 뭔가가 이들과 우리의 역사적인 경험들로부터 주어져 있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다같이 회복시켜 놓지 않으면 안될 뭔가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들이었다.
‘역사적 치유’
SWK가 내게 가져다준 두 번째 교훈은 그리하여 (SWK 순례단이 서울 들어와 가졌던, 첫 모양새와는 많이 틀려진 국제세미나를 사전 기획하면서 처음 끄집어내봤지만) ‘역사적 치유’의 잠재력이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들뢰즈에 이르는 근대성 비판을 비롯해서 니체의 생명철학, 메를로-퐁티의 몸의 사고 등을 아우르는 서구의 선행 연구들, 동북아지역에 대한 한중일 상상의 역사, “미국과 일본의 주도 아래 한국과 동남아국가들이 배치되는 수직적 구조로 고착”된 현 “동아시아 질서”1)에 대한 정치사회사적 연구, 전쟁과 국가(민족) 형성사, 변경사 등 앞으로 파봐야 할 자료는 거의 무한대에 가까웠다. SW 운동을 처음 고안해낸 미국 단체에서 온 참가자들은 ‘역사적’ 대신 ‘영적(spiritual)’이란 말을 자꾸 썼는데, 몽매주의적인 사용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다분히 이질적인 개념화라는 느낌이었다. 식민화, 강제동원, 원폭투하를 초래한 태평양전쟁, 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불완전한 결산이 되고만 이후의 미군정체제, 지역 변형을 가져온 냉전 등, 한일 양국 민중의 상흔 치유를 가로막는 근본 원인이 동아시아 역사 속에 뿌리박고 있는 그만큼 역사에 대한 성찰은 이미 치유적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SW라는 공동의 기억복원 과정을 동북아 시민연대운동으로 넓혀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수준에 이르러서는 (결말에 이르면 여타 민족주의의 토대가 되는 ‘나-너’ 이분법의 한 단계에 불과해지는) ‘가해-피해’의 이분법을 통감각적 언어와 이해의 차원으로 지양止揚해야 하리라 생각했다. 느낌과 사유가 일원화된 새 언어가 이해의 모형이 되고 역사 서술에 개입해 드는 이 지양은 또한 역사 이해의 변형과 응분의 예지豫智적 개입이기도 할 것이었다. 이른바 ‘사죄’는 그같은 개입의 한 국면일 것이라 생각했다.
사죄의 역학
나는 사죄의 역학은 단순명료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해와 피해의 사실들은 물론 단순명료한 언어(라기보다는 수량화)로 기록될 수 있으며, 책임국가와 책임자들 사이의 ‘질적 차이’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베트남을 놓고 보면, 박정희 정권은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전에 최대 5만 명, 연인원 32만 명을 파병했고, 이에 따른 전사자는 5천여 명, 부상자는 1만여 명, 학살당한 베트남 양민은 5천여 명이었다. 그렇더라도 한국은 역시 일개 용병국에 지나지 않았다. 단 5만8천여 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던 미국에 비해 베트남의 손실은 막대했다. 희생자 3백만 명, 고엽제 피해자 2백여만 명, 부상자 4백50여만 명. 일본의 식민지배도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45년 3~8월까지 단 6개월 동안 일본의 식량공출로 인해 아사餓死한 수는 2백여만 명에 달했다.2)
희생 규모에 있어서의 차이는 그 안에 엄연한 사실성을 내포한다. 그러니 예를 들어 <패전후론敗戰後論>(1995)의 저자 가토 노리히로(加藤典洋)가 소위 일본 “보수파 감정의 뿌리”3)를 앞세워 ‘자국 사망자 300만에 대한 애도가 태평양 전쟁으로 숨진 아시아 희생자 2천만에 대한 애도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된다’고 강변하면서 노렸던 효과 역시, 희생과 죄과의 선후경중 뒤집기라기보다는 패권적 민족주의의 자연화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다른 한편 역사적 사실이란 역사서술의 존재론적 조건을 형성하는 시간성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는 기억-해석이기도 한 까닭에, 희생과 가해에 대한 사실들은 시간과 관계가 매개, 변형, 이미지화하는 다양한 계기들을 거치면서 간접화 내지 ‘모호화模糊化’하게 된다. 1968년 1월 ‘구정공습’ 전후로 반전운동이 활발했던 미국은 한국과는 달리 베트남전을 “실패한” 전쟁, “더러운” 전쟁으로 뚜렷이 인식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용산 전쟁기념관의 베트남전 참전 관련 전시물이 노골적으로 보여주듯 1965년 월남파병에 즈음한 박정희 대통령 담화문4) 류의 도착적이고 반인도적인 사고만을 정전화正典化, 국가기억화해 왔다.5)남한 민중에게 베트남전은 과연 정당한 전쟁, 적어도 ‘수지 맞는’ 전쟁이었던가?
사죄는 하위주체화된 역사의식들이 앓아온 분열증(역사‘서술’을 가로막는 주의주의, 비일관적임, 증오 같은 감정으로의 변질, 등등)을 문제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일 터이다. 사죄라는 이 “능동적인 망각”,6) 적극적인 실어증失語症이야말로 어쩌면 쑨꺼(孫歌) 선생이 지적했던바 우호에의 개인적 동의와 역사적 화해라는 서로 다른 두 차원 사이의 편차가 불러일으키는 “원한과 어색함”을, 균형파괴와 주름진 어둠 속 침묵이라는 그 계기들은 온전히 보존한 채, 승화昇華시켜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민족주의’라는 용어만으로는 그것(=균형파괴, 침묵의 지배)을 형용할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며, 화해라는 바람만으로는 그것을 제거할 수 없다고 본다”고 썼다.7) 나는 사죄가 벌어지는 현장이 갖는 지구시민적인 성격을 떠올렸다, 상이한 정체성들 간의 거의 자연발생적인 연대(아픈 자는 다른 아픈 자를 찾기 마련이다), 치유의 역사성, 등등. 화해에의 바람은 역사적 언설화의 구성요건이 반드시 되어야만 했다. SWK가 그 단초端初가 되길 빌었다.
1) 백영서, “제국을 넘어 동아시아공동체로”, 백영서 외 지음, <동아시아의 지역질서 - 제국을 넘어 공동체로>(창비, 2005), p. 22.
2) <황해문화> 2002년 가을호, 통권 36호.
3) 서경식ㆍ다카하시 테츠야(高橋哲哉) 지음,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삼인, 2002), pp. 69~83.
4) 여기서 그가 든 베트남 파병의 이유로는: 1) 전 아세아의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집단안전보장에의 도의적 책임의 일환 2) 자유 월남에 대한 공산침략은 곧 한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므로 우리의 월남지원은 바로 우리의 간접적 국가방위라는 확신 3) 과거 16개국 자유우방의 지원으로 공산침략군을 격퇴시킬 수 있었던 우리는 우리의 눈앞에서 한 우방이 공산침략의 희생이 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한국민의 정의감과 단호한 결의가 있다. 한홍구,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과 민간인 학살 문제”,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파병에 관한 심포지움 자료>, 베트남전진실위원회, 2001년.
5) 용산 소재 전쟁기념관 내 “한국군 파월派越의 역사적 의의”란 제목의 전시물 패널 설명문 전문: “자유월남에 대한 공산침략 행위는 세계적화 전략의 일환으로 자행된 것이므로 자유월남 한 나라의 안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동시에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으로서는 크나큰 위협이 되었다. 우리가 공산침략자들과 대항하여 싸우는 자유월남을 위해 자유 우방국 8개국과 함께 지원하는 것은, 집단안전보장을 위한 직접적인 국토방위책의 일환이고, 한국전쟁 당시에 무수한 희생을 무릅쓰고 우리를 지원한 우방 16개국에 대한 보답이며 나아가 멸공전을 위하여 연합전선을 형성한다는 도의적인 혈맹관계를 행동으로 실증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다른 나라의 도움만을 받던 과거의 한국이, 이제는 주요 국제문제에 대하여 일단의 책임을 질 수 있는 위치에서 자유 우방의 십자군으로 당당하게 출정함으로써 국가적인 무한한 긍지와 보람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만한 국력신장이 우리세대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근대사의 큰 부분으로 기록될 수 있는 것이다.”
6) 전진성은 폴 리쾨르의 시간 해석학을 소개하면서 이질적인 타자의 시간과의 교감을 낳는 “능동적인 망각을 통해 서로의 다름이 충분히 인정된 뒤 다시 새로운 시간의 장으로 통합”될 때 비로소 출현하는 “역사적 시간”에 대해 언급한다. 전진성,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휴머니스트, 2005), p.153.
7) <아시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2001)의 서문 “아시아라는 사유공간” 중에서. 쑨꺼, <아시아라는 사유공간>(창비, 2003), p.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