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통신 49보> - 멋진 경험과 여행이 끝나갈 무렵
이튿날 서안에서 대안탑, 섬서역사박물관, 회족거리 등을 관람하고 서안성벽으로 갔다.
높은 망루에서 전 시내를 내려다볼 수도 있고, 많은 시민들이 산책 겸 운동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성벽 안으로 들어오자 기다란 시멘트 의자에서 한 쌍의 노부부가 우리나라 해금과 비슷한 두 줄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게 무슨 악기입니까?”
“두 줄로 연주하는 중국전통 악기인데 얼후(二胡)라고 합니다. 한 번 켜 볼래요?”
라고 하면서 일어서더니 선뜻 악기를 넘겨주셨다.
그리고 연주법, 운지법도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연주해 보며 중국의 신기한 악기 문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내친 김에 제가 노래 한 곡 한 테니 즉석 반주 좀 해 주실래요?”
“좋지요! 한 번 불러 보세요.”
나는 중국에 유학 와서 중국사람 앞에서 몇 번이나 불렀던 ‘새타령’를 또 한 번 부르기 시작했다.
“♪♬ 새가 날아든다. 왼갖 잡새가 날아든다. ♪♬”
그 순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박수하고, 환호하고 흥겨운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특유의 가락이자 전통민요인 새타령은 국적을 막론하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음악이 되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구경하던 젊은 아가씨 두 명이 접근해 왔다.
“한국에서 오셨어요? 우리 이영애 탤런트 엄청 좋아하는데···.”
참으로 이영애란 배우는 대단하다.
전 세계인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새타령에다 이영애 한 마디면 마음이 열리고,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소통이 바로 되어 버렸다.
“이 평일 낮에 어떻게 공원에 오셨어요? 학생인지요?”
“아뇨, 우리는 간호사들인데 오늘이 쉬는 날입니다. 그래서 산책 나왔어요. 한국 사람들은 참 건강해 보여요.”
자연스럽게 화젯거리가 생기고, 서로가 궁금한 것을 얘기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어제의 택시 기사에 대한 이미지는 싹 날아가 버리고 어느새 흥겨운 시간이 되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다음날 중국의 3대 석굴이라는 용문석굴(龍門石窟)을 관광할 때도, 전통시장을 체험할 때도, 숙소를 정하기 위해 호텔 직원과 흥정할 때도 기분 좋은 경험만 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낙양에서 관광을 끝내고 새벽에 소림사로 가기 위해 첫 버스를 탈 때였다.
갑자기 예쁘고 젊은 아가씨 3명이 같은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잠시 우리가 나누는 얘기를 듣더니 한국 사람인 줄 알아보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접근을 해왔다.
“어디 가세요? 우리 소녀시대 GGG 노래 잘 알아요.”
상하이에 있을 때도 많이 경험한 바였다. 어딜 가나 이 노래가 울려 펴졌고, 전 세계에서 유학 온 모든 학생들이 춤과 노래를 따라했던 것을···.

“그래요? 학생입니까?”
“네! 학생입니다.”
“어느 대학 무슨 과 다녀요?”
“낙양대학교 음악과 3학년 학생들입니다.”
“어디 가는데요?”
“소림사 놀러 가는 중입니다.”
“아, 참 잘 되었네요. 우리도 지금 소림사 가는 중입니다. 가이드 좀 부탁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버스 안은 한바탕 신나는 시골장터로 변해 버렸다.
버스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다른 승객들도 참여하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노래와 박수까지 보태어졌다.
대학생들은 한창 발랄한 때라 그런지 스스럼없이 꾀꼬리 같은 음대의 실력을 뽐내었고, 나 또한 새타령을 보태어 국제음악회로 만들어 버렸다.
그때 바로 옆 자리에 앉아 계시던 노부부가 또 끼어들었다.
“우리도 소림사 가는데 같이 즐거운 여행 합시다!”
노부부는 심양에서 출발해 약 20여 일을 여행할 계획으로 다니고 있는데 이렇게 예쁜 여학생과 외국인과 같이 하게 되어서 기분이 너무 좋다고 했다.
여행 가이드북이라며 보여 준 그 노부부의 노트에는 여행일정과 교통, 숙박, 식사, 관람지까지 직접 쓴 손 글씨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소림사로 가는 시간 내내 지루한 줄 몰랐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부터, 자식이 돈 보태줘서 이렇게 여행을 하게 되었다는 사연에다가, 하찮은 소재거리에도 배꼽 잡는 아가씨들의 웃음소리까지 버스 안은 온통 국경 없는 소통의 장소였다.
이들 덕분에 소림사에 도착해서도, 우리가 모르는 소림사에 얽힌 달마대사 얘기며, 242기의 탑림에 관한 얘기며, 우리가 자랑하는 신라시대의 김교각 스님에 관한 얘기며, 중국인들이 섬기는 성인들에 관한 얘기며, 그리고 소림사에 무술 배우러 젊은이들이 왜 이렇게 많이 몰려드는지 등 숱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소림사 바로 옆에 있는 중국의 5대 악산 중 하나인 숭산에 갔을 때, 대법왕사에서 템플스테이 하는 프랑스 사람과, 숭산서원 앞 4,500년 된 측백나무에 얽힌 얘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국제전화가 걸려 왔다.
임병욱 흥사단 회장님이었다.
“넵, 김지욱입니다. 지금 여행 잘 하고 있습니다. 히히.”
“잘 하고 있다니 다행이네. 요 며칠간 생각 좀 해 봤나?”
“뭘 말입니까?”
“뭐는 뭐야, 빨리 귀국해서 흥사단 일 보는 것이지?”
“아이고, 참. 저는 능력이 안 되어서 못 한다고 했잖습니까?”
“능력이 되고 안 되고는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고, 언제 베이징으로 들어오는가?”
“베이징은 오늘밤 열차로 들어가면 내일 도착합니다만···.”
“그럼, 그 나이에 힘든 공부한다고 중국에서 낑낑대지 말고, 내일 베이징 도착하면 바로 짐 싸서 귀국하길 바라네.”
실랑이는 계속되고 있었다.
국제전화였지만 임병욱 회장님은 수화기를 내려놓을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외국인과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전화 받더니, 통화가 계속되자 옆에서 지켜보던 벗씨가 한 마디 거들었다.
“귀국한다고 해요. 회장님도 사정이 급하니까 국제전화를 두 번씩이나 하지요. 당신도 이 나이에 멀리 중국에서 유학한다고 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는 않아요. 중국어 공부한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옆에서 눈치를 주며, 마지못해 요청에 응하라는 벗씨의 눈신호에 마냥 버틸 수만 없었다.
“알았습니다. 그럼, 공부 중단하고 들어가기는 하는데 삼고초려 한 것으로 해 주실래요? 하하하!”
임병욱 회장님의 설득에 내가 겨우 동의하는 제스처를 보이자 임 회장님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뜻으로 목소리가 밝아졌다.
“삼고초려가 아니라 십고초려라도 하겠다. 삼고초려는 이미 한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지난번 상하이에 있을 때 일부러 찾아갔지, 며칠 전에 전화하고 지금 또 전화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어쨌든 십고초려 한 것으로 할 테니까 여행 무사히 마치고 바로 귀국하기 바라네. 고마워.”
전화는 내가 예스라고 대답하자마자 바로 끊겼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이제부턴 내 마음의 준비가 문제였다.
이 일을 어찌 할고···.
2011년 11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