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통신 50보> - 상하이통신을 마치며···.
“여보, 축하해!”
“뭐가?”
“당신 뜻대로 공부 그만하고 귀국하게 되어서···.”
“그건 당신이 축하받을 일이지, 내가 왜 축하받아?”
“나는 축하받을 일은 전혀 없어. 내가 좋아서 온 것이니까···. 그간 당신은 마음고생 많았잖아. 오기 싫은 유학 따라와서 주거 환경도 안 좋은데 눈치 보며 중국 생활하느라···.”
“그렇다고 나도 축하받을 일은 아니고, 하여튼 우리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어서 기분은 무진장 좋아.”
“그러니까 축하해!”
“그럼, 당신은 기분이 어때?”
“난, 섭섭한 게 너무 많지. 당신부터 시작해서 주위의 많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3년 작정하고 온 것인데 2년도 다 못 채우고 떠나게 되어서···.”
“그래도, 아직 젊은데 오라는 데가 있는 게 좋은 것 아니야?”
“난 이제 직장 욕심 없는 거 당신도 잘 알잖아? 봉사하며 살겠다는 내 심정···. 그러니, 유학생활 다 마치고 가도 봉사할 곳은 얼마든지 생기지 않을까?”
“난 봉사활동 같은 거 싫거든요. 떳떳하게 일하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게 좋지. 일하면서 충분히 봉사활동 해도 얼마든지 기회는 많으니깐···.”
“하여튼 난 걱정이 태산 같아.”
“왜?”
“내가 돌아가서 그 막중한 흥사단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어?”
“그야, 당신 정도면 충분히 할 수 있지.”
“난 자신 없어. 흥사단 일을 해 본 적도 없고···.”
“해 본 적이 왜 없어.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30년 넘게 흥사단 활동을 했으면 충분하지.”
“그거야, 활동은 해 왔지만 흥사단 실무를 모르잖아, 실무를···.”
“실무가 뭐 따로 있나? 성공적인 회사 생활 수십 년 경력은 뭐 그냥 지나갔나?”
“회사 일하고 흥사단 일하고 똑 같나?”
“똑 같지. 뭐가 달라. 게다가 또 그간 당신이 4~5년 동안 흥사단에 집중적으로 봉사하면서 일 많이 해 봤잖아?”
“그건 그냥 도와준 일이고. 본격적으로 일을 다잡고 앉으면 모르는 게 너무 많지.”
“별 걸 다 걱정한다. 평소대로만 해도 잘 할 수 있으니 미리부터 걱정하지 마소.”
“난 걱정이 많이 되지. 흥사단 업무가 복잡하고, 흥사단 본부와의 관계도 있을 테고, 관계되는 바깥의 기관들도 많을 거고, 공무원들도 많이 알아야 할 텐데···.”
“하여튼 당신은 그게 문제야. 미리부터 걱정이 뭐 그리 많아. 일단 부딪히고 나면 차츰 해결이 될 텐데···.”
“난 안 그래. 공부까지 중단하고 들어가는데 이왕 시작하는 거면 남들이 원하는 만큼 성과를 보여 줘야지.”
“알았어. 알았어. 그건 그렇고···. 내일 귀국하게 되면 이제 <상하이통신>도 오늘부로 끝이네? 산학연구원과 흥사단의 애독자들이 많이 시원섭섭하겠구만···.”
“뭐 그럴까봐···. 산학연구원은 3명 정도 애독자가 있었는데, 흥사단도 많아 봐야 대여섯 명 정도? 그러고 보니 이들 소수만을 위해 나도 끈질기게 글을 써 왔구만···. 하하하.”
“내가 볼 땐 독자들을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당신, 아니 우리 둘의 멋진 기록물이 아닐까?”
“하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네. 우리가 언제 이렇게 멋진 외국생활을 또 해 보겠어. 그리고 그걸 기록으로 남겨서 나중에 되새김질 해 본다면 정말 아름답고, 추억어린 이야깃거리들이 될 거야.”
“맞아, 이렇게 유학생활을 마치게 되지만, 그리고 또한 <상하이통신>을 마침 50보라는 꺾어지는 숫자로 마치게 되지만, 나중에 돌이켜 보면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평가하게 될 거야.”
“<상하이통신 50보>라···. 정말 대단한 대 장정이었다, 그치? 이 중에는 공부 얘기, 유학생 얘기, 중국여행 얘기, 중국인 얘기, 중국의 도시 얘기 등이 무수히 담겨 있는데, 돌이켜 보면 정말 기록을 잘 남긴 것 같아. 돌아가면 우리 이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한 권씩 나눠주자. 히히.”
“그간 글 쓰느라 수고 했어. 그리고 불평만 하는 나를 끝까지 참아주면서 좋은 경험 많이 하게 해 줘서 고마워잉!”
“에이, 뭐 그런···. 돈도 벌지 않고 이렇게 고생만 시킨 내가 미안하지.”
“여보, 한국에 돌아가면, 우리가 여기서 사귄 중국인과 한국인들을 대구로 초대해서 서로의 인연을 이어가도록 할래?”
“오, 드디어 이제 당신도 내 의견에 찬동하는구나. 내가 추구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거든. 얼마나 좋아. 세계인과 교류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사는 게···. 따봉!”
“나도 따봉!”
“그나저나 이렇게 돌아가면 우리 아이들이 놀랄 텐데···.”
“놀라겠지. 다래는 아부지인 당신의 큰 꿈을 늘 지지한다고 말해 왔는데···.”
“바다는 또 어떻고, 그간 바다한테 제일 미안했어. 대학교 입학하는 거 보고 우리가 중국으로 도망 와 버렸으니 밥 한 끼도 제대로 못 해 먹였는데···. 하여튼 이번에 귀국하게 되면 둘째인 바다한테 잘 해 주자. 같이 살면서 밥도 안 해 주고 중국 와 버렸다는 것이 항상 미안했거든···.”
“그 덕분에 독립심은 많이 키워줬다고 생각하자. 대학생 정도 되면 원래 독립생활을 해 봐야 되잖아. 우리 대신에 바다를 보살펴 준 친척들에게는 항상 죄밑이지만···.”
“지난번에 보니까 바다가 살이 쏙 빠져서 약간 안 됐기는 했어. 키는 멀대 같이 크면서 광대뼈가 드러날 정도였으니까.”
“하여간 한국 들어가면 우리 아이들한테 잘 해 주고, 친척들한테도 잘 하고, 주위 신세진 분들께도 보답해 드리자.”
“당신이 그렇게 말해 주니 정말 고마워. 우리가 이런 추억어린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거든. 돌아가면 잘 해 드리자.”
“알았어. 돌아가면 우선 건강진단부터 받아보고 일을 시작하더라도 시작하자. 일 시작하면 또 당신 건강이 제일 걱정 되거든.”
“고마워, 나도 이제 알아서 살살 할 테니 걱정하지 말어. 또 다시 스트레스 받고 건강에 이상이 올 것 같으면 바로 그만둘 테니깐···.”
“파이팅!”
“지아여우(加油)!”
2011년 11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