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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창작수필문인회 원문보기 글쓴이: 엄지바우(이봉길)
수필 쓰기 실전 3
수필의 구성
글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 구성이다. 서론‧본론‧결론, 서두‧본문‧결어 또는 도입부‧논의부‧결론부 등으로 말하고 있다. 글의 내용이나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문단의 시작, 중간과 끝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이는 글 전체의 구성을 말하지만 한 문단의 구성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이승훈의 ‘문단은 적절하게 발전되어야 한다.’에서 글의 구조에 대한 설명이다.
문단의 시작인 도입부는 흔히 <소주제문>이 이야기된다. 문단속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소개한다. 논의부에서는 이 소주제문에 대해 이야기하며, 결론부에서는 논의부에서 이야기한 것을 완성한다. 또 도입부에서 말한 중심 사상을 다시 언급할 수도 있다.
김태길의 ‘수필의 구성 요소’에서 말한 내용을 요약하면, 수필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아무리 짧은 수필이라도 ‘시작과 중간과 끝’에 이르는 통합의 질서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흔히 3단 구성이라고 말한다. 또한 漢詩의 기‧승‧전‧결과 같은 4단 구성, 프라이타그가 말한 발단‧상승‧절정‧하강‧대단원에 이르는 5단 구성을 말하기도 한다.
수필에서도 4단‧5단 구성을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보다도 3단 구성이면 족하리라는 생각이다. “미리 주어지는 질서는 질서화 하는 정신을 오히려 마비시킨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따라서 수필의 자유분방성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3단 구성의 형식이 좋을 것 같다.
수필의 시작은 스스로 이야기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하여 이것저것 떠오르는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것으로 ‘중간’을 이어 나가다가, 스스로 마지막에 이르렀다고 느껴지는 곳에서 ‘끝’을 맺으면 된다. ‘끝’도 단정이 아닌 끝이다. 결론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그 형식으로 볼 때 수필의 구성은 두 가지 전형으로 파악된다. ‘직렬구성’과 ‘병렬구성’이다.
(1) 직렬구성
내용의 전개가 한 가닥 위에서 유기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구성, 이를 기호로 나타내면 ‘A -> B -> C'와 같이 된다. ABC는 각각 한 작품의 부분들인데, 이들은 한 가닥의 선 위에서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즉, B는 A를 받으면서 C가 오도록 배치된다는 뜻이다.
① 나는 매화를 볼 때마다 항상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감정에 붙들리고야 마는 것을 어찌할 수 없으니, 왜냐 하면 첫째로 그것은 추위를 타지 않고 구태여 寒風을 택해서 피기 때문이요, 둘째로 그것은 그럼으로써 超地上的인, 非現世的인 인상을 내 마음 속에 던져 주기 때문이다.
② 가령, 우리가 눈 가운데 완전히 동화된 매화를 보고, 혹은 찬 달 아래 처연히 조응된 매화를 보게 될 때, 우리는 과연 매화가 사군자의 필두로 꼽히는 이유를 잘 알 수 있겠지만, 積雪과 寒月을 대비적 배경으로 삼은 다음에라야 만 고요히 피는 이 꽃의 한없이 장엄하고 숭고한 기세에는, 친화한 동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굴복감을 우리는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매화는 확실히 춘풍이 태탕駘蕩한 계절에 난만히 피는 농염한 백화와는 달라, 현세적인, 향락적인 꽃이 아님은 물론이요, 이 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초고礎高하고 견개狷介한 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중략)
③ 여하 간에 나는 매화만큼 동양적인 인상을 주는 꽃을 달리 알지 못한다. 특히 영춘迎春 관상용으로 재배되는 분매盆梅는 담담한 가운데 창연한 古典美가 보이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청고淸高해서 좋다.
- 김진섭 <매화찬>
①은 첫 부분, 곧 서두이다. 중심 소재인 매화가 제시되고, 그 매화를 볼 때마다 놀라운 감정에 붙들리게 되는 까닭이 둘 나타나 있다. 여기서 두 가지 까닭은 이 글(서두)이 제시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다음 단계에서 반드시 자세하게 풀려야할 것이다.
②는 ①에서 제시한 문제를 푸는 데 쓰여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독자는 지은이가 왜 매화를 볼 때마다 놀라운 감정에 붙들리고 마는지를(두 가지 까닭을) 소상하게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지은이가 만들어 놓은 정서의 호수를 헤엄치게 되는 것이다. 역시 ②는 ① 다음에 배치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③은 이글의 끝 부분, 즉 결말이다. 이 부분은 ②와 같은 과정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부분이다. 만일, ②와 같은 과정이 없이 ③이 배치된다면 그것은 한낱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이 수필은 ①->②->③의 삼단구성을 취한 예가 된다.
이런 삼단구성은 여러 가지 변형을 낳을 수도 있다. 즉 첫 부분이 생략된 것, 끝 부분이 생략된 것, 중간 부분이 둘이나 셋 또는 넷으로 분화되는 것 등이다. (이하 생략)
(2) 병렬구성
내용의 부분 부분이 꼬리를 물고 전개되는 것이 아니고, 부분 부분이 유기적인 관계가 없이 모여서 주제(또는 중심소재)에 봉사하는 구성을 말한다. 직렬구성이 ‘A->B->C'와 같은 구성이라면, 병렬구성은 'A+B+C->주제'와 같은 구성이다. 'A->B'에서는 B가 A에 유기적으로 이어지지만, 'A+B'에서는 A와 B가 독자적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B+A'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A와 B가 서로 바뀌더라도 그것은 수필의 주제(또는 중심 소재)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① 나는 우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지금 돈으로 오만 원쯤 생기기도 하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러면은, 그 돈으로 청량리 위생병원에 낡음 몸을 입원시키고 싶다. ... 그리고 우리 딸에게 제 생일날 사 주지 못한 비로드 바지를 사 주고, 아내에게는 비하이브 털실 한 폰드 반을 사주고 싶다.(중략)
② 나는 잔디를 밟기 좋아한다. 젖은 시새를 밟기 좋아한다. 고무창 댄 구두를 신고 아스팔트 위를 걷기를 좋아한다. 아가의 머리칼을 만지기 좋아한다. 새로 나온 나뭇잎을 만지기 좋아한다.(중략)
③ 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한다. 웃는 아름다운 얼굴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수수한 얼굴이 웃는 것도 좋아한다.(중략)
④ 나는 아름다운 빛을 사랑한다. 골짜기마다 단풍이 찬란한 만폭동, 앞을 바라보면 걸음이 급하여지고 뒤를 돌아다보면 더 좋은 단풍을 두고 가는 것 같아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중략)
⑤ 나는 이른 아침 종달새 소리를 좋아하며, 꾀꼬리 소리를 반가와 하며, 봄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즐긴다. 갈대에 부는 바람 소리를 좋아하며, 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중략)
⑥ ⑦ ⑧ 생략
⑨ 나는 삼일절이나 광복절 아침에는 실크햇을 쓰고 모오닝을 입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중략) 나는 신발을 좋아한다. 태사신, 이름 쓴 까만 운동화, 깨끗하게 씻어 놓은 파란 고무신, 흙이 약간 묻은 탄탄히 삼은 짚신,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다.
⑩ 고운 얼굴을 욕망 없이 바라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점잖게 늙어가고 싶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다.
- 피천득 <나의 사랑하는 생활>
이 수필에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줄거리가 없다. 다만, 토막말들이 모여 있을 뿐이다. 그래서 언뜻 보면 산만하다는 인상을 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뜯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①돈+ ②촉감+ ③웃는 얼굴+ ④색깔+ ⑤소리+ ⑥+⑦+⑧+ ⑨차림새->⑩대인관계
(인생에 대한 작가의 태도). 여기서 +는 단순한(유기적이 아닌) 결합을 의미하고,
->는 결론(주제)으로의 방향을 의미한다. +로 이어지는 부분은 경우에 따라 서로 자리를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토막말들은 단순히 모여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다.’는 주제를 향하여 질서 정연하게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일반적인 수필의 이론적인 구성을 알아보았다.
다음은 몇 가지 수필의 구성 형태를 살펴본다.
* 수필을 평가하려 하지 말고 그 구성만 살펴보기로 한다.
❑ 구성 1
①<들어가는 말/서두>
②<중심소재>
* 하나의 이야기/사건 중심(스토리텔링)
- 이야기 발단/소개
- 사건의 진행 또는 내용 설명
- 이야기의 끝/정리
③<결말 ‧ 마무리>
- 이야기의 요약/종합 ‧ 주제성 찾기
- 작가의 생각
❑ 구성 2
①<들어가는 말/서두>
②<에피소드 a>
- 주제와 관련 있는 짧고 간명한 예시
<에피소드 b>
- 두 번째 예시
* 각 에피소드는 한 개 또는 두 개 문단
③<결말 ‧ 마무리>
- 에피소드의 종합/공통성 ‧ 주제성 찾기
- 작가의 사상
❑ 구성 3
손광성의 ‘수필은 말맛으로 쓰고 말맛으로 읽는다.’라는 평론가들의
주장처럼 ‘묘사로 시작해서 묘사로 끝난다’는 그의 수필에서 찾아보는 구성
① 제재 즉 하나의 소재를 대상을 관조하는 표현으로 시작
② 소재를 관찰자 시점에서 요모조모 관찰하는 구성법(작가의 사유)
③ 말미에서는 1인칭으로 돌아와 자신을 은유하거나,
작가의 삶으로 들어온다.
문학작품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질서 있는 표현 행위에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서 ‘하나의 통합이 있는 극적 행동’이라고 말하며, “그 통합에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기 마련이다.”이라고 했다.
폰 루카치도 ‘사물의 질서 없이는 어떠한 문예도 존재하지 않는다.’
독자가 글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는 순서, 즉 글의 구성과 배열이
중요하다. 이는 글을 쓰는 데도 일종의 질서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구성 2> 예문
① 경복궁의 동‧서편 삼청동길과 효자로에는 높다랗게 자란 가로수가 궁궐의 기와 담장을 덮고 있다. 느티나무, 가죽나무, 은행나무 등 수령이 50~100년가량 된 나무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죽나무가 내 마음을 끈다.
가죽나무는 굵직하게 높이 자란다. 하지만 커다란 키에 널찍하게 자리 잡은 자태에도 결코 우쭐거리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곁에 다른 나무들이 자라는 공간은 비워주고 자신은 훌쩍 올라가서 곁가지로 은근히 그들을 감싸주고 있는 듯하다. ...
② a) 가죽나무 아래 서니, 예전에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선배가 생각난다.
처음 배속 받은 부서에서 직장병아리인 내게 얼굴에 잔주름이 가득하게 웃으면서 “굿 모닝!”하고 목청을 높여 솔(sol)톤으로 아침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잔뜩 움츠린 내 어깨를 큰 손바닥으로 탁 치곤하였다. ...
b) 몇 해 전 효자로의 가죽나무가 수난을 겪은 적이 있다. 아침 출근길에 갑자기 거리가 텅 빈 느낌이 들어 위를 쳐다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이 놀랐다. 경복궁 서편 담을 따라 난 효자로 양쪽에 늘어선, 하늘 가렸던 아름드리 가로수들이 하루아침에 밑동부터 흔적도 없이 베어진 일이 생겼다. ...
왜 그랬을까? 그 동안 효자로의 청기와집 주인이 바뀔 때마다 가로수를 다듬고 단장하기도 했지만, 가죽나무는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치 1번가에서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전쟁을 겪고, 혁명과 민주화 등 지난 100년간 이 나라의 역사를 지켜보아 온 나무들이 아닌가. ...
c)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에는 예전에 유명한 작가들과 시인, 극작가 유진오닐이 살았다는 최초로 지어진 아파트, 패친플레이스가 있다. 뉴욕에 갔을 때 그곳에 가죽나무가 있다고 해서 가보았다. 거기에는 낡고 오래된 아파트 앞에 굵기도 몇 뼘밖에 되지 않고, 키만 멀쑥하게 큰 몇 그루의 가죽나무가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우리 동네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생각하면서 얼마나 가슴이 뿌듯했는지 모른다.
③ 스스로 잘나지 못한 것을 알고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나무. 오늘도 도시의 이곳저곳 모서리 땅에서는 가죽나무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으며 ... .
요즘은 경복궁 담장 길을 걸으며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가죽나무에 안기듯 껴안아보곤 한다. 오래 전에 집을 떠나온 내게도 고향집과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이끄는, 남빛 하늘에 걸려있는 가죽나무의 검은 가장이가 있어 외롭지 않다.
- 이봉길, <효자로의 가죽나무>
<구성 3> 예문
①달팽이를 보고 있으면 걱정이 앞선다. 험한 세상 어찌 살까 싶어서이다.
개미의 억센 턱도 없고 벌의 무서운 독침도 없다. 그렇다고 메뚜기나 방아깨비처럼 힘센 다리를 가진 것도 아니다. 집이라도 한 칸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시늉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은 투명한 껍데기. 속까지 비치는 실핏줄이 소녀의 목처럼 애처롭다. 달팽이는 뼈도 없다. 뼈가 없으니 힘이 없고 힘이 없으니 아무에게도 위협이 되지 못한다. 하물며 무슨 고집이 있으며 무슨 주장 같은 것이 있으랴.
②a)그렇다고 감정마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민감하기로는 미모사보다 더하다. 사소한 자극에도 몸을 움츠리고 이마를 스치는 바람에도 고개를 숙인다. 비겁해서가 아니다. 예민해서요. 수줍어서이다. 동물이라기보다 식물에 가깝다.
b)누구를 찾고 있는 것일까?
달팽이는 늘 긴 목을 받쳐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그의 이웃은 아무데도 없다. 소라, 고둥, 우렁 그리고 다슬기 같은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이미 그의 이웃이 아니다. 아득히 먼 물나라의 시민들이다.
c) 어디 좋은 친구 하나 없을까?
d) ..................
③여름도 다 끝나려는 어느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달팽이의 이상한 몸짓을 보았다. 억새풀의 제일 높은 끝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위태롭게 맺혀 있었다. 목은 길게 솟아올랐고, 조그만 입은 약간 벌어졌으며, 꽃의 수술 같은 두 개의 눈은 긴장되어있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의 어떤 가수처럼, 나뭇가지를 떠나려는 순간의 새의 자세처럼 보였다. 가늘고 긴 목에서 벌레 소리 같은 어떤 슬픈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달팽이는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투명한 달빛이 조그만 몸을 비추고 있었다.
밀폐된 유리벽의 저편에서 키 작은 한 남자가 울고 있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 손광성 <달팽이>
①바다는 물들지 않는다. 바다는 굳지도 않으며 풍화되지도 않는다. 전신주를 세우지 않으며 철로가 지나가게 하지 않으며, 나무가 뿌리를 내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품안에 진주조개를 품고 식인상어를 키우더라도 채송화 한 송이도 그 위에서는 피어나지 못한다. 칼로 허리를 찔려도 금세 아물고 군함이 지나가도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바다는 무엇에 의해서도 손상되는 법이 없다. 사람들이 국경선을 긋지만 지도 위에서일 뿐이다. 무적함대를 삼키고도 트림조차 하지 않았다.
②어떤 지배도 인정할 수 없는 바다는 무엇에 대한 자신의 군림도 원치 않는다. 그는 항상 낮은 곳에 머물며 모든 것은 평등의 수평선 위에서 출발하기를 바란다. 바다는 기록을 비웃으며 역사를 삼킨다. 땅은 영웅들의 기념비로 더럽혀졌지만 아직 바다는 그런 것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
바다는 언제나 뒤척이고 한숨짓고 몸부림친다. 상승과 추락, 승리와 패배, 욕망과 좌절, 그 두 사이를 일상의 우리들처럼 반복한다. 밤마다 고민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다. 바다는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 가식과 허세로 장식하지 않으며 가면을 벗고 순수를 드러낸다.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인 것처럼 그 앞에서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
③여덟 살 때 내가 본 최초의 바다는 하나의 경이였다. 어느 새 늘 함께 하고 싶은 갈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제 노년의 고갯마루에서 지금 나는 다시 나의 바다를 본다. 바다는 그의 젊음으로 내 나이를 지우고 그의 커다란 눈물 속에 나의 작은 눈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침내 바다는 그의 품안에 나의 존재마저 말없이 보듬는다.
- 손광성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