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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의 자손들 : 탈출 32,25-29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조금 되집어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고 광야로 나와서 먹을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께 불평을 하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셔서 물도 얻고 먹을것도 얻고, 그다음에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이러면서 시나이 산까지 옵니다.
물론 그전에 갈대 바다를 건너는 이야기가 있겠습니다. 갈대 바다를 건너고 나서 광야에서의 이야기 그리고 나서 시나이 산까지 와서 시나이 산에서 여러가지 전승이 복잡하게 있는 이야기긴 하지만 두 흐름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었다.
그 다음에 그 계약에 있어서 여러가지로 제의적인 면도 있고 여러가지 면들이 있었지만 하지만 모든게 순조롭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그 율법을 지키겠노라고 약속을 합니다.
전체적인 율법의 정신이 하느님의 열 가지 말씀, 십계명,
열가지 말씀들 안에서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정신들이, 우리식으로 얘기하면 일종의 율법의 영성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 어떤 정신들이 열가지 말씀 안에서 전해졌고 거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예" 라고 또 얘기했고 그리고 나서 조금은 더 자세한 법의 규정과 그들이 지켜야 할 계명에 관해서는 20장부터~ 23장까지에서 계약의 책이라는 법전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서 전달되었고 거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 아! 나는, 그것을지키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원로들이 그 시나이 산에 하느님을 직접 만나러 올라가서 하느님의 어떤 발치 아래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그것으로서 계약이 끝나는 겁니다.
결혼식으로 생각하면 결혼식 끝나고 피로연까지 잘한 것입니다. 아, 그리고 나서 어떤 일이 생기는가? 그리고 나서 사실은 하는님과 모세의 관계에서는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증언판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증언판은 하느님이 써서 모세에게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이 자기 스스로에게 법적인 굴레를 씌우는 겁니다.
반대로 증언판이 갖고 있는 신학적 의미는 그냥 법적인 의미를 뛰어넘어서 돌판에 새겨주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잊지 말아라! 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파피루스 와 같은 것에 써준 것은 마음대로 고치거나 변형할 수 있는데 돌판에 새겨진 것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을 잊지 말아라! 라는 것..
나중에 그래서 에제키엘 예언서나 예레미야서에 가면은 돌판에 써줘도 너희가 기억을 못하니까 이제는 너희 마음에 새겨 주겠다. 너희 심장에다가 새겨주겠다. 라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배려. 이런 상황이 시나이 산에서는 전개되고 그것을 위해서는 모세는 40일동안이나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곳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증언판을 받기위해서 하느님과 함께 있는데, 다른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더 이상 체험하기 좀 어렵고 그 다음에 모세도 사라지자,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론에게 가서 그냥 그들이 알고 있던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를 이끌 그 신을, 우리를 인도할 신을 당신이 만들어야 겠다고 하니, 아론이 '금붙이들을 가져다 주십시오.' 라고 하니까 그걸 가지고 송아지상, 그런 젊은 황소의 상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서 그들이 조금은 안심하게 되고
그리고 이제는 축제를 벌입니다.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면서, 그런데 모세가 다시 내려와서 한편으로는 심판하는 것,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죄 지은 이스라엘 백성을 죄로부터 정화하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끝난줄 알았는데 이제 오늘 읽게 될 부분에서 아! 그렇게 해가지고 금송아지 상을 다 부셔서 빻아가지고 가루로 만들어서 마시고 나서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제의적인 부분이 끝난거고 이제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심판의 다음 단계 또 다른 단계를 25절에서부터 만나게 됩니다.
탈출 32,25 직역
그리고 모세는 보았다. 그 백성을
그는 풀려있었다.
여기서 그는, 그 백성을 의미합니다.
탈출 32,25 직역
왜냐하면 아론이 그들을 풀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적대자들 내에서 비웃음이 될 정도로
이 부분을 주교회의 성경은 탈출 32,25
모세는 백성이 제멋대로 하는 것을 보았다.
즉 풀어놓았다는 건데, 여기서 풀려 있었다는 말은,(묶여 있지 않고 풀려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 풀려있었다 : 묶여있지 않고 풀려 있었다.
따라서 어떤 짐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노예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우리가 어떤 그림으로 보면 무언가 묶여 있어야 되는 존재인데 그렇지 않고 풀려 있었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 즉 풀려있었다는 것은
▶ 풀려있었다 : 율법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함
그리고 제멋대로 하다. 라는 표현을 듣는 순간, 우리들은 판관기가 생각나야 합니다. 판관기에 보면은 계속해서 '그때에는 아직 왕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제멋대로 하였다.'라고 성경은 일관성 있게 번역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왕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풀려 있었다, 우리 말로 조금더 의역한다면은 방종한다. 는 그런 자유의 부정적인 사용입니다.
올바로 질서잡혀있지 않은 모습, 창조신학적인 의미에서 질서의 반대적인 말은 혼돈(Chaos)이 있었습니다.
우선 여기서 풀려있었다는 모습은,
① 첫 번째로는 그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묘사함
② 또는 율법에서 금지하는 우상을 만드는 범죄적 행위를 말함
12절에서는 야훼가 이집트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에게 "당신이 그렇게 하시면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조롱할 겁니다." 라는 이야기를 12절에서 했는데 여기서는 역시 그 비웃음 이라는 테마가 등장하는데 그들의 풀려있는 모습을 보고 적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비웃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적대자들 내에서 비웃음이 된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책임은 지도자인 아론에게 있습니다.
우리 관점에서는 '좀 비웃음이 되면 어때?'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고대 근동이나 구약의 세계 안에서는 그가 어떤 평판을 받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성모님의 노래에서도 보면은 '당신은 복되다고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이게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좋은 평판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성경의 세계 안에서는 누군가가 복받은 것은? 그 사람이 복받을 만한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아! 신이 그 사람을 축복했대." 그러면은 사람들은 ' 아! 우리는 그 사람의 삶을 모르지만 신은 그 사람을 다 알고 있는데..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니 그 사람 참 잘살았구나. 훌륭한 사람이구나.' 라고 얘기 할 것입니다.
반대로 '불행하여라.'에서는 타인의 불행을 구약의 세계관애서는 '아! 그사람 우리가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줄 알았는데 잘못 살아온 모양이야.' 라고 얘기할 수 있는 모습, 그런 평판의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모세가 보았는데 그 백성이 그 적대자들에게 비웃음이 될 정도로, 적어도 그 적대자들에게 앞에 나온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제는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한 그 모습입니다.
▶ 25절 :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스라엘의 모습
탈출 32,26 직역
그리고 모세는 섰다
그 진영의 문에
여기서 진영이라는 것은? 천막 여러개가 둥글게 모여서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12지파에서 70개의 가문이니까, 70개 정도의 천막이 12개 정도의 집합으로 둥글게 모여 있는 그와 같은, 그러면서 그 주위가 그냥 열려있는 둥근 모양이 아니라 닫혀있는 둥근 모양으로 그 진영 안에 들어오기 위한 입구가 하나에서 두개 정도 있는 모습을 머리로 상상하게 됩니다.
탈출 32,26 직역
그리고 그는 말했다
누가 야훼에게 (속하는가) 나에게
표현이 이것 밖에 없어서 (속하는가) 라고 얘기했고 덧붙여서 나에게 라고 했는데 그때에는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탈출 32,26 직역
누가 야훼에게 (속하는가) 나에게
⇒ 야훼에게 속하는 (야훼의 소유인) 사람은 나에게 와라.는 뜻입니다.
탈출 32,26 직역
그리고 그에게 모였다.
모든 레위의 자손들이
다른 사람들은 모세에게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다가 이제 화들짝 놀래는 상황이고,
아! 정말 야훼에게 속한 사람이고 그는 나에게 와라!
야훼에게 속했다는 것은 우리들의 의미로 생각한다면 가톨릭 교회 안에서 쓰는 성별 이라는 의미로 알아 들을 수 있겠습니다.
세상에 속했는가? 천상에 속했는가? 에 뜻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야훼에게 속한 그는 나에게 와라!
모세는 왜 진영에 문에 섰을까?
텍스트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짐작하는 것은 문에 서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도망 못가게 막고 있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는 고대 근동에서 재판이 열리는 장소가 문 입니다.
여러가지 기능중에 하나입니다만, 성문 앞이 사람들이 모여서 정보도 교환하는 곳이고 시장도 됩니다. 물물교환도 일어나고 그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니 만큼 재판도 일어납니다.
구약 성경을 읽으시다가 성문 앞에서, 라고 생각하시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장터에다가 재판에 개념을 함께 포함시켜서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도주하는 사람들을 모세가 막기 위해서 진영의 문에 섰을수도 있고, 또는 재판을 하기 위해서 진영의 문에 섰을 수도 있습니다. 앞선 내용에서 아론은 금을 가진 사람, 즉 그에게 금이 속한 사람을 찾았다면 여기서 모세는 야훼에게 속한 사람을 찾습니다.
레위의 자손들이 그에게 모이는데 모세와 아론역시 레위의 자손입니다.
탈출 32,27 직역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말했다. 야훼 이스라엘의 엘로힘
너희들은 차라 각자 그의 칼을
그의 둔부 위에
너희들은 지나가고 돌아와라
문에서 문으로 그 진영안에
그리고 너희들은 죽여라. 각자 그의 형제와
각자 그의 이웃과 각자 그의 친지를
그 시작 부분에서 모세가 레위의 자손들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했다. 아훼 이스라엘의 엘로힘" 이것은 예언자들이 야훼의 말을 전하며 사용하는 하나의 고정된 문학 양식입니다.
야훼는 이렇게 말했다. 또는 야훼 이스라엘의 엘로힘은 이렇게 말했다. 탈출기는 야훼가 모세에게 이 말을 했었는지 확인시켜주지 않습니다. 본래 예언자가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야훼 하느님이 예언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테 텍스트는 그것을 확인해 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실제로 말했는지 말하지 않았는지, 하지만 이런 경우가 모세에서 뿐만 아니라 야훼가 예언자들에게 말하는 장면은 생략되고 예언자들이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장면은 구약에서 다른 예언자들의 경우에도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 24장, 판관기 6장 과 같은 곳에서 우리는 같은 현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문법적으로만 본다면 여기서 야훼와 이스라엘의 엘로힘은 동격입니다.
하지만 탈출기 32장의 문맥에서 이스라엘의 엘로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핵심적입니다.
탈출기 3장에서 이스라엘의 엘로힘은 야훼인가? 아니면 금송아지인가? 이게 32장의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4절과 8절에서 언급된 것처럼 수송아지 상과 야훼 중 누가 이스라엘의 엘로힘인가? 다른 대목에서도 그와 같은 관심이 확인됩니다.
이스라엘의 엘로힘
º 탈출 20,2 :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십계명의 대목에서 야훼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선언하고 그 선언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탈출 20,2 직역: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야훼 너의 엘로힘이다.
다른 어떤 것이 너희의 신이 아니라 나 야훼가 너희들의 엘로힘이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백성의 방향으로 보자면 내가 너희를 보호해 주고 지켜 준다.라는 뜻이고 반대로 얘기하면 너희는 나를, 나만을 섬겨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만 제사를 드려야 한다.라는 배타적인 관계를 표현합니다.
º 신명 6,4 : 이스라엘아, 들어라!(셔마 이스라엘)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야훼 우리 엘로힘은 한분이신 야훼이다.)
신부님의 번역은? 야훼는 우리 하느님이고 야훼는 한 분이다.
아무튼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야훼에 대한 선언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저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탈출 32,27 직역에서,
너희는 지나가고 돌아와라는 말은 한 번은 갔다가 한번은 돌아와라. 그래서 '갔다 와라.'라는 우리식으로 얘기하면 "야, 거기까지 갔다 와. 어디 누구한테 갔다 와." 이와 같은 표현입니다.
마치 보초가 순찰을 하듯이 왔다 갔다. 하라는 그와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순찰하면서 발견하는 모든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것이 모세의 명령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문장을 그냥 우리가 문장 그대로 알아듣는다면, 순찰하면서 보이는 족족다 죽여라!라는 그런 약간의 잔인한 뜻으로 이 문장을 이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탈출 22,19절은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자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탈출 22,19
주님 말고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자들은 처형되어야 한다.
이는 배교의 경우를 뜻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처형의 대상으로는 형제, 이웃, 친지가 열거되는데 여기서 유대감이 가장 강한 것은? 형제입니다.
형제라는 것은? 피를 나눈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용어로 형제라고 얘기했을 때는 적어도 4촌 정도는 되어야겠습니다. 적어도 할아버지 대에서는 같은 할아버지를 만나는 그와 같은 가족입니다.
반면에 이웃은?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친분이 깊은 친구를 뜻하고 나아가 친지는 잘 알고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을 총칭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번역했지만 오늘날 언어로 의역한다면은 형제, 자매 또 피를 나눈 친척이 첫 번째 의미일 것이고 두 번째는 가까운 이웃 친구, 이와 같은 의미일 것이고 세 번째로는 지인 정도에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이렇게 죽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야훼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송아 지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탈출 32,28 직역
그리고 레위의 자손들은 하였다
모세의 말씀에 따라
그리고 쓰러졌다 그 백성 중에서
바로 그날 3천 명 정도
의역하자면,
그리고 바로 그날 그 백성 중에서 3천명 정도가 쓰러졌다.라는 내용입니다. 적어도 탈출기가 기억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 숫자는 60만 명입니다. 거기서 3천 명이니까 0,5% 정도 되는 숫자가, 따라서 숫자로 보면 그렇게 큰 숫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이미 이스라엘 전체 숫자를 60만 명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3천 명이라고 얘기를 했으니까 수송아지 사건의 직접적인 관련이 있던 사람들의 숫자로 3천명 정도를 예상하는 것 같습니다.
또는 그런 사건을 대표해서 3천명 정도가 죽었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천이라는 특별한 숫자에 특별한 신학적 의미가 있는지 탈출기 내에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신부님도 성경 안에서 3천이라는 수에 어떤 의미가 부여되어 있나? 하고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셨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의미를 찾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60만 명에 비해서 3천이라는 숫자는? 그렇게 크지 않게 피부로 느껴진다.라는 정도로 우리가 숫자를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탈출 32,29 직역
그리고 모세는 말했다
너희들은 가득하여라 너희들의 손 오늘 야훼를 위한
키 각자 그의 아들과 형제에
그리고 주기 위해 너희들 위에 오늘 축복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저희한테만 어려운 게 아니라 주석가들 한테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희 성경은 29절을 여러 주석가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탈출 32,29 직역
오늘 너희는 저마다 자기 아들이나
형제에 대한 대가로 주님을 위한 직무를 맡았다
그분께서는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기를 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 아들이나 형제를 죽였고 그것은 주님을 위한 직무였고 그들이 그런 주님을 위한 직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축복한다.라는 뜻으로 우리말 주교회의 성경은 이 문장을 번역했습니다.
신부님도 거기서 많이 달라지지 않고 약간 달라진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레위의 자손들에게 명령을 하는 겁니다.
'손을 가득하게 한다'는 것은? 성별 예식에서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은 신품 성사에서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손을 가득하게 한다,
성경은 이를 직무를 맡기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성별 예식이니까 그런 성스러운 직무가 레위인들에게 주어진다.라는 표현인 겁니다.
그렇다면 레위의 자손들이 처형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별 예식이라는 제의를 위한 제물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런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 그들이 성별 예식을 거행하였고 그것을 통해서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레위인들에 직무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지파 안에서 어떤 직무, 역할을 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사제적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광야로 돌아다닐 때는 계약 궤를 보호하는 일을 합니다.
▶ 레위인의 직무 : 사제직, 계약의 궤를 보호하는 일
설사 다른 민족들과 전쟁을 해도 레위인들은 전쟁하러 나가지 않고 계약 궤를 보호하는 그와 같은 일을 합니다. 나중에 이스라엘로 들어와서는 레위인들은 역시 같은 그런 사제적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런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니까 그들은 자기 땅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 몇 개는 주자." 이런 식의 내용들을 여 호수 아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만 근본적으로는 자기 땅을 갖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생계는? 다른 지파에서 자신들의 소출에 1/10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먹고살 수 있게 해 줍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것들이 확정되기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오히려 설명하고 있는 것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이 25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뭐냐면 어떻게 해서 레위인들이 그런 지위를 얻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그런 원인 담을 우리는 이 안에서 알아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키, 라는 접속사를 어떻게 알아 들어야 할지 애매합니다.
① 인과적으로 이해하는 것,
각자 아들과 형제를 처형했으므로
너희들은 너희들의 손에 가득하여라. 야훼를 위해서
② 시간적으로 이해한다면,
각자 아들과 형제를 처형했을 때
너희들의 손을 그렇게 가득해졌다
③ 양보적으로 이해한다면,
각자 아들과 형제를 처형했다 할지라도
너희들의 손은 야훼를 위해 가득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사가 쓰인 것은 명령형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너희들의 손이 야훼를 위해서 가득해져야 한다
▶ 가득하여라 : 명령형 동사 사용
너희들의 손이 야훼를 위해서
가득해져야 한다는 표현이고 이것은 제의적인 면에서 그들을 성별 하는 뜻이고 그와 같은 과정안에서 각자 그의 아들과 형제에게 동사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콘텍스트, 문맥으로 봤을 때는 그 형제들을 처형한 것을 하나의 제의적 과정으로 이해한 것 같다.라고 여기까지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느냐?
주기 위해 너희들 위해 오늘 축복을
즉, 그 모든 것들을 위해서 레위인들은 오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신품 성사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데 그 은총을 받아서 인간적으로 성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은총을 받고 그 은총을 받은 사람은 그 직무를 수행하는 것들이 신품 성사에 있듯이 여기서도 그들이 이제부터 레위인으로서의 직무를 받는데 그것을 위한 축복을 오늘, 그들이 그의 형제와 아들들을 처형했을 때,
참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법은 살인한 사람은 사제가 될 수 없습니다.
▶ 탈출 32,29절은 레위의 자손들을 향한 행위를 사제적 직무로 해석하면서 그 직무는 한편으로 야훼를 위한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행위가 레위의 자손들 스스로에게도 축복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몇 가지 점들을 되짚어 봅시다.
25절에서 풀려있었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히브리말로 파라으(פרע)라고 발음합니다.
파라오,פרעה 와 비슷합니다.
따라서 자음으로 보면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 안에는 좀 언어의 유희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풀려있었다. 마치 파라오가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마치 갖고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것처럼, 부정적인 의미에서에 풀려있음과 파라오 사이에 비슷한 발음에 언어의 유희를 우리가 조금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5절에서 비웃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똑같은 단어가 2 사무에서 하느님의 계약 궤, 증언의 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다윗이 춤을 춥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미칼이 비웃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2 사무 6,16
º 주님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갈 때, 다윗 임금이 주님 앞에서 뛰며 춤추는 것을 사울의 딸 미칼이 창문으로 내려다 보고, 속으로 비웃었다.
그런데 16절만 이런 의미인데, 2 사무6,20에서는 조금 다르게 표현합니다. 미칼은
2사무 6,20
사울의 딸 미칼이
다윗을 맞이하러 나와서 말하였다.
"오늘 이스라엘 임금님이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듯이,
자기 신하들의 여종들이 보는 앞에서 벗고 나서니, 그 모습이 참 볼 만하더군요!"
다윗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일종의 영적인 엑스타시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옷을 벗고 춤을 추는 건데, 그런데 그것을 미칼은 보고서 비웃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춤을 추는 것은 이스라엘의 제의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방의 사제들이 제물을 바치는 모습입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계약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갈 때 굉장히 기뻐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칼의 비웃음입니다.
그러고 나서 결국은 미칼은 벌을 받았습니다. 조금은 옛날 전승의 흔적을 우리는 2 사무 6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명 33,8-9에서 보면은 레위에 대한 축복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레위를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툼밈과 우림이라는 것은 사제 복장 우에다는 장식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툼밈과 우림을 가지고 점을 친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재구성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레위에 사제직에 관한 내용입니다.
위의 마싸와 므리바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바탕이 돼서 전한 마싸와 므리바의 이야기입니다.
레위의 부모도 부정하고 형제도 외면하는 아들들도 아는 척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야훼 하느님에 대한 레위의 열정을 얘기하는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약을 준수하기 위해서... 우리한테는 굉장히 생소합니다.
하지만 구약의 백성에게는 '아! 하느님을 향한 율법에 대한 충실함이 어느 정도까지 가 있어야 하느냐? 이 정도까지는 가 있어야 한다.'는 그와 같은 표현입니다.
탈출기 32장과 신명기 33장에서 레위에 대한 텍스트 안에서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까, 우리가 좀 알아듣기 힘든 몇 가지 문제들이 해명이 됩니다.
신약성경에서 보면 가장 유다인들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복음서가 있다면은 마태오입니다.
루카는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서이고 마르코 복음서는 아마도 로마에 있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해서, 물론 마르코 복음서는 이방인이 섰여 있는 공동체입니다.
요한은 나중에 상당이 후기에 쓰인 것이고 마태오는 굉장히 오래된 복음서의 흔적을 갖고는 있는데 하지만 유다인들을 향해서 쓴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서에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텍스트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마태 10,37-38
마태오 복음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아들이나 딸을, 이렇게 얘기합니다만, 이것은 유다 전통이라고 하면 당연히 나올 수 있는 그와 같은 문장입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사가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마지막 문장인,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
따라서 유다 전통에서 일반적인 이야기를 자신의 독자인 유다인들의 귀에 한번 던져 놓은 다음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것과 같은 문체를 가지고 마지막에다가 배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오복음사가의 특징입니다.
유다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체험을 통해서 우리가 새로이 생겨난 그런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전환해내는 것이 자주 등장하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논리 전개의 방식입니다.
마태 12,48-50
예수님이 유교적인 관점에서 효자였냐? 불효자였냐? 이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들이 가졌던 그 열정을 예수님이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역시 요청하는 그들이 갖고 있는 그런 생각.
레위인들이 갖고 있던 율법에 대한 그와 같은 열정, 하느님에 대한 충실함을 이제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가족이 된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 형제자매들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슷한 레위인들에게 내린 축복을 그리스도인들도 받습니다.
마태 19,29
º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그 공동체 안에서 형제자매로 살아가야 하면은 이 정도는 해야 된다.라고 얘기하면서 구약에 있는 레위인들에게 요청되었던 그와 같은 신앙을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요청하고 레위인들에게 주어졌던 그 축복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같이 부여되는 비슷한 대칭되는 틀을 우리는 마태오복음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실,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느님에 말씀을 이런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 네 친족과 네 아비와 너의 족속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어떤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그와 같은 것들을 떠나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그런 부르심을 우리는 아브라함의 부르심, 제자들의 부르심, 마태오의 예수의 말씀 안에서 공통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신부님도 이 구절을 보시면서 유교적인 효와 유다적 방식에서 오는 차이에서 이해가 조금 어려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민수 5,6에서 피느하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영원한 사제직을 야훼로부터 약속받는 그와 같은 장면이 민수 25,1-18 이스라엘이 피오르에서 우상을 섬기다. 에서 서술됩니다. 그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 하나를 창으로 죽입니다. 왜냐? 그 이스라엘 사람이 미디안 여자를 하나 데려왔기 때문입니다.
그 직전 장면에서 이스라엘이 프오르, 라는 곳에서 바알의 멍에를 메는 죄를 짓게 됩니다. 그렇게 미디안 여자를 데려온 이스라엘 사람을 대표로 창으로 찔러 죽임으로써 일종의 속죄 예식이 벌어지게 되고, 그 창으로 찔러 죽인 그 피느하스는 속죄 예식을 거행한 사제로 인식이 되면서 그가 영원한 사제로 약속받는 민수 25장의 장면입니다.
구약 성경 안에서 초기에 형성되는 여러 가지 과정들은 우리들이 그렇게 알아듣고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유다 전통도 이것을 기억할 뿐이지 오늘날 유다인들 전통 안에서 사제가 되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고 나서 사제가 된다. 이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표현이 갖고 있는 그러면서 그 안에서 하나의 원인 담처럼 설명되는 그들이 가졌던 원시적인 그런 어떤 신앙의 표현 방법,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들이 가졌던 어떤 특별함에 대한 고백을 우리는 알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첫댓글 아멘~!! 고맙습니다~^^
아멘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