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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 수콧 - 에탐
탈출 13,17-22
용어에 관한 말씀을 드리자면은 교황님을 부를 수 있는 데는 여러가지 호칭이 있습니다.
교황님이 자기 자신을 부를 때 '로마의 주교' 또는 '종들의 종' '베드로의 후계자' '그리스도의 대리자' 쓸수 있는 호칭들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를 때는 교황님~
교황 프란치스코, 이와 같은 호칭을 사용합니다만,
교종 혹은 법황 이런 호칭도 역시 가능합니다. 교종이라고 부를때 '종'자는 이조시대의 임금님들을 부를 때 세종, 성종, 이와 같이 부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으뜸. 우두머리라는 의미입니다.
'교종 프란치스코' 라고 부르는 게 가장 알맞지 않는가?
또는 반대로 교황님은 교회의 우두머리기도 하지만 바티칸이라는 작은 시국( 도시국가)에 통치자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다스린다는 황제, 교황이라는 용어가 알맞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말 어감에서는 (신부님도 신자분들에게 교종, 교황, 이란 용어를 다 쓸수 있습니다. 라고 하시는데)
교종님은 다소 어색하신 듯 합니다.
그렇지만 성서 백주간 시작하시면서 말의 의미,
성경과 성서 라는 용어가 있는데 그 두 용어 중에 맞고 틀리는 게 있는데 아니라 (어떤 것은 있어야 하고 어떤 것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 성경이라는 각각에 용어가 갖고 있는 어감과 거기에 적합한 뜻이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그것을 적합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교회의에서 나온 그 하느님 말씀은 제목이 "성경" 입니다.
왜냐하면 전례때 사용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원천으로 그 하느님의 말씀을 사용하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성서 백주간" 입니다. 주교회의에서 성경이라고 했으니 "성경 백주간" 이라고 해야 합니까?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성서 백주간 입니다.
왜냐?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책으로 읽고 그런 책안에서 묵상하고 그 그룹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는...
따라서 교종. 교황. 로마의 주교. 베드로의 후계자. 그리스도의 대리자. 이와 같은 호칭들이 그 의미에 맞게 사용되면은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종들의 종' 이 말은? 멋있는 것 같애...그러면서 본당에서 다른 신자분들과 얘기하면서 '종들의 종, 나 마리아는....' 라는 얘기 하시면 안됩니다!!!
이 호칭은 교황님만 쓸수 있는 호칭입니다.
우리들은 그냥 종입니다..^^
신부님에게는 여러 장면이 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교황님께서
"여러분들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국가적인 또는 제국주의 적인 폭력적인 그와 같은 것을 가장 극도의 형태로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냈습니다." 라는 애기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우리 사회 안에서 어떤 여성이 폭력을 경험합니다. 그럼 그것을 털어놓고 고발 할 수 있습니까? 요즘에는 용기 있게 고발 하는 분들이 있지만 ,
대부분 감추자 하면서 감추는 ...
그걸 고발하면 사회가 그 여성을 바라보는 모습도 좀 이상하게 보는 면도 있습니다.
나에게 다가올 이상한 시선들 불이익 이런것들에서 자신이 당한 그와 같은 일을 감추는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 자신의 존엄성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그 할머니들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 나는 그런 제국주의의 폭력안에서 이와 같은 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고발합니다. 라는 마음으로 거기에 와서 떳떳하게 이것은 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밝히고 그 앞에 와서 앉아 있는 것, 그것이 얼마나 용기있는 일인지... 그것이 얼마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인지...에 관해서 교황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서 신부님은 굉장히 감동하셨다고 합니다.
사회 교리에 중요한 가르침 중에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것이 교회 가르침에 중심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뜻이냐?
가난한 사람들의 존엄성만을 교회가 그런 사회 교리를 통해서, 사회적 가르침을 통해서 지켜내야 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다 존엄한 겁니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약하신 분들과 소외를 먼저 당하신분들의 존엄성이 지켜진다면 그 사회의 모든 사람들의 존엄성은 지켜지는 것과 다름 없다..라는 이해 위에서 우리들은 교회 사회교리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교회가 갖고 있는 인권의 문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누려야 할 인권이(권리) 있습니다. 존엄한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권리가 있는데, 그 권리가 그가 만약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어린이라는 이유로 또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지켜지지 않아서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학생의 인권, 어린이들의 인권도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보편적 그 권리위에서 그것들이 지켜져야 한다.
그 권리가 여성이라고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인간이 누려야 될 그 권리를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누려야 된다(여성 인권의 문제입니다)
그 권리가 장애인들이라고 해서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
또는 동성애자들이라고 해서 그와 같은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엄한 인간으로서 나 자신이 누려야 될 그와 같은 권리가 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스스로를 존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말씀에 긍정의 마음이 든다면 다행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꼭 자기 자신이 해야될 중요한 성찰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안에서 신부님께서 많은 분들을 만나보시면 스스로에 존엄성에 대하여 본인 스스로가 내리누르시는 것 같다고 하십니다.
"나는 가진게 없어서... 나는 배운게 없어서.... 나는 사회적으로 그러하니까..."
우리들 스스로에 존엄성이 누구에 의해서 훼손되는 것입니까?
바로 나 자신에 의해서 훼손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 앞에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 중에 핵심적인 죄인 것 같습니다.
우리들 모두를 존엄한 인간으로 창조하셨는데..
우리들 모두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창조하셨는데....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를 업신여기고 우리들 스스로에 존엄성을 훼손하고 스스로 누군가에 노예로 살아가는 스스로 그 무엇인가에 종으로 살아가는 그런 자유를 두려워 하는 삶을 선택하는, 잘못된 선택..
그것으로부터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해방하신다..라는 메시지를,
우리는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 모습 안에서 우리들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고 어떤 자유를 누려야 하고
그 안에서 내가 지켜내야 할 나 자신의 존엄성, 그리고 내가 지켜야 할 내 이웃의 존엄성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묵상과 함께 탈출기를 읽어가시면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굉장히 많은 성찰거리를 주는 그런 텍스트로서 탈출기를 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다루실 주제는? 탈출기 13,17-22의 제목을 붙이기가 애매하셔서 그냥 지명만 적으셨다는....^^
이집트 - 수콧 - 에탐
이집트를 탈출하고 수콧을 거쳐서 에탐까지 가는 이스라엘의 모습 이라는 제목입니다. → 탈출기 세번째 부분의 시작
그런에 이게 신부님이 탈출기를 이해하시는 구분 안에서는 세번째 파트에 시작입니다.
그 첫번째 파트는 부르심에 얘기셨습니다.
탈출기 첫번째 부분
1.부르심 : 탈출 1,1-6,27- 모세가 받는 부르심이 그 핵심입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파라오에 의해서 그들이 받는 그 억압들
그다음에 모세의 탄생에서 부터 이트로의 딸과 결혼하는
그리고 모세가 하느님의 산에 와서 거기에서 부르심을 받는 장면들
그리고 부르심을 처음으로 가서 수행하지만은 파라오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억압하는 것을 가중시킴으로 인해서 오히려 그 조장들에게 항의와 불평을 받는 장면들
그리고 마지막 아론과 모세의 족보...이것이 첫번째 파트였습니다.
탈출기 두번째 부분
2. 탈출/해방 탈출(6,28-13,16)
탈출기 두번째 부분에서는 우리가 이게 언제 끝나나 싶을 정도로 지루하게 읽어온 재앙의 이야기가,
그래서 이제 모세가 파라오에게 가서 하느님의 표징을 보여주는데 모두 열가지 표징이 있는데 그것이 조금 문학적으로 틀을 나누다 보니까,
세가지. 세가지. 세가지. 나뉘더라.
그리고 마지막 파스카, 재앙의 이야기
파스카 사건과 함께 여러가지 축제의 이야기가 함께 덧붙여여 있는 이야기들 그리고 마지막 파스카 사건 끝에 파라오가 모세를 불러서
" 야...당장 나가라." 그러니까 그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이 먹기위한 빵의 반죽이 채 부풀어 오르기도 전에 그것을 통째로 지고서 이집트를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는 탈출기 세번째 부분
탈출 13,17-18,27 이집트 땅을 떠난 이후의 이야기 입니다.
지역적으로 보면 이집트 땅을 떠나서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딜까요?
경계를 나서면서 이집트 땅을 나선 그 다음은 어딜까요?
그다음은 광야! 라는게 시작되고,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땅을 나서면 바다가....(북쪽으로 가긴 어려우니까요)
우리나라는 한반도인데 사실 우리의 삶은 섬처럼 느껴집니다. 바다를 거쳐야지 갈 수 있는...
탈출기 세번째부분은
3. 광야의 이스라엘 : 탈출 13,17- 18,27
이집트 - 에탐 - 갈대바다 그리고 갈대 바다의 기적에 이야기 그리고 갈대 바다를 지나서 수르 광야, 마라, 엘림(쓴 물), 엘림, 신광야(만나와 메추라기), 르피딤(마싸와 므리바) 그리고 마지막 이트로가 모세를 방문하고 거기서 모세가 이트로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그와 같은 장면까지가 3부에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탈출 13,17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때, 하느님께서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지나는 길이 가장 가까운데도, 그들은 그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 '그들이 닥쳐올 전쟁을 내다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이집트로 되돌아가서는 안 되지.' 하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문제는 빨리 갈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가게 하지 않으셨다..
왜냐? 이집트 사람들이 마음을 돌릴까봐,
지도로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 영상 14분29초부터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고대 시대에 지중해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 팔레스타인 지역, 지금의 터키 지역 그때 사용되던 여러 도로에 그림입니다.
따라서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최단 거리는 요 거립니다.
나중에 역사서를 보면은 다윗이 왕국을 세우고 그전에 판관들의 역사, 다윗이 왕국을 세우는 역사, 이런 역사를 전후해서..다윗도 결국 필리스티아 사람인 골리앗을 물리치고 왕이 됩니다.
필리스티아는 지금의 가자 지역을 통해서 해안 지역에 살던 그 소수의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게되면
필리스티아인들과 전쟁을 해야하니까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되돌아 도망올까봐 이쪽이 아닌 아마도 지도상의 더 아랫쪽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라는 내용이 저희들이 지금 이 텍스트에서 읽는 내용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몇몇 역사적 문제가 있습니다.(나중에 말씀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본다면은,
모든 민족이 자신의 신과 만날때 통과의례(通過議禮)가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은 우리가 그리스도 신자가 되는데는 통과의례는 세례! 가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일반 종교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은 다음과 같은 통과의례입니다.
그 신을 모르는 사람들은 죽었고, 이제 세례를 통해서 새로 태어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어떤 표징을 사용하죠?
세례때 '물' 이라는 표징을 사용하고 물은 성경에서 세 가지 표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 정화, 죽음 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도 하느님의 백성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통과 의례를 겪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물을 건너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을 건넘, 죽음을 건너간다...
그 물을 건너기 직전까지는 항상 어떤 유혹, 어떤 위험이 있습니다. 즉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 회귀하는, 이집트의 폭력을 통해서 또는 이스라엘 백성에 어떤 잘못된 공포같은 것을 통해서
하지만 물을 건너고 나서는,
이집트는 없고 하느님과의 관계만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갈대 바다 사건이 지나고 나서는 이집트라는 단어 자체가 등장하지 않고 이스라엘은 그것을 건너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와 같은 새로운 지평을 나아갑니다.
물을 통과하는,
사회학적인 의미로 본다면은 그 물을 건넘으로써 더이상 이집트의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이다.
라는 정체를 얻게 됩니다.
이게 문제가 있습니다. 몇몇 신학자들이 얘기하는 거라서 신부님도 조금은 조심스러우신...몇몇 신학자들은 마치 어머니의 몸에서 얘기가 태어나는 것과 같다.
물을 건너는데 마치..그런데 막 태어난 아기가 성숙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걸음마 하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말을 배우느라 실수도 하고 여러가지 실수들을 통해서 천천히 성장해 나가는( 한번도 넘어지지 않고 걸었다는 아기가 없는것처럼,) 또 넘어진 아기가 절망해서 다시는 걷지 않으려 하는 모습도 못 본듯 합니다.
갈대 바다를 지나면서는 '갓난 아기가 넘어졌다가 일어서는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사건으로, 전체적인 신학적인 전개로 보아야 한다는 신학자들의 견해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17절에서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때,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옛날 옛날 한 옛날에 ..." 라는 시간적인 정보를 주고
"어느 왕국에서.." 라는 공간적인 정보를 주고
그리고 여기서는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때.." 여기에는 암시적으로 공간적인 정보와 시간적인 정보가 숨어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필리스티아인의 땅을 지나는 길이 가장 가까운데도,
여기서 약간 번역상의 문제가 있는게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지나는 길이"
라고 번역할 수 도 있고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통하는 것이"
라고 번역할 수 도 있습니다.
필리스티안인들의 땅을 통해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이 가장 가까운데도..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는데 신부님은 후자를 따르는 것이 더 요 텍스트에 올바른 의미가 아닌가,, 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번역하신 신부님께서는 전자로 번역을 하셨습니다.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인도하다' 이것은 성경 안에서는 의도적인 그와같은 표현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4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의 배우자를 골라라, 하면서 엘리에제르를 파견합니다. 엘리에제르가 이사악의 배우자를 찾이 위해서 가다가 레베카를 만나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인도하다
º 창세 24,27 : (엘리에젤) "나의 주인에게 당신 자애와 신의를 거절하지 않으셨으니,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주님께서는 이 몸을 내 주인의 아우 집에 이르는 길로 이끌어 주셨구나."
º 창세 24,28 : 그분은 저를 이렇게 바로 인도해 주시어 주인님의 조카딸을 주인댁 아드님의 아내감으로 찾아내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나는 잘 몰랐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셨구나.라는 그와 같은 고백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이 자신의 수난과 부활에 관해서 이야기 하자, 베드로가 "아, 그러시면 안됩니다.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랬다가 예수님께 성서의 전대목을 통해서 가장 실랄한 비속어를 듣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라는 ..
그게 그리스말로 '사탄아 휘파게 오피소무' 라는 표현으로 '사탄아 내뒤로 가라' 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내가 갈 길은 내가 가니까, 너는 내 뒤를 따라와라~라는 겁니다. 'follow me' 하는 것입니다.
내 뒤를 쫓아와라! 하느님께서는 길을 아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뒤를 쫓아간다..라는 겁니다.
나중에 광야로 나아가서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맞서 갑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앞서가는 그와 같은 '인도한다' 는 내용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이 부분에 밑줄을 그어주시면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닥쳐올 전쟁을 내다보고 마음을 바꾸어 이집트로 되돌아 가서는 안 되지..하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굉장히 의인화된 표현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나오는 내용에서 그와 같은 대목들이 등장합니다.
전쟁 (민수 14,3)
주님께서는 어쩌자고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오셔서
우리는 칼에 맞아 쓰러지고
우리 아내와 어린것들은 노획물이 되게 하시는가?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시나이 계약 후 광야로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철이 덜 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걱정하는 것은 그곳으로 보냈다가는 얘네들이 정말 돌아오겠다..그러니까 조금 돌아가서 그런 위험이 없는 또는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올 수 없는...그것이 바로 갈대 바다의 역할입니다.
갈대 바다를 건너면은 이집트로 갈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시저가 한 말 중 ' 나는 루피콩 강을 건넜다.' 한번 건너면은 그 다음부터는 물릴 수 없는...
그 갈대 바다의 사건이 갖는 것은 이집트에 대한 야훼의 권능이 드러나는 그와 같은 사건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탈출 13,18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백성을 갈대 바다에 이르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전열을 갖추고 이집트 땅에서 올라갔다.
여기도 앞선 것과 마찬가지로 갈대 바다에 이르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셨다. 인데 실제적으로 직역을 해보면,
길?
i) '갈대 바다의 광야의 길' (직역)
인데 이것을 번역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직역외에도 세 가지 정도가 더 있다고 합니다.
ii) '갈대 바다의 광야를 통해서'
iii) '갈대 바다로 가는 광야의 길'
vi) '갈대 바다로 가는 광야를 통해서'
신부님이 가장 합리적으로 보는 것, 그곳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에 있는 광야를 통해서(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갈대 바다로 가는 광야를 통해서 돌아가게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전열을 갖추고 이지트 땅에서 올라갔다..
다소 의역이 된 내용입니다. 여기서 전열을 갖추었다. 라는 그와 같은 대목은 여호수아기에서 같은 번역을 이렇게 했습니다.
전열을 갖추고
조금은 애매한 번역인데, 그 안에는 사실은 어떤 단어가 숨어있냐면?
어원적으로 보면 '다섯' 이라는숫자가 숨어 있습니다.
따라서 학자들 마다 번역하는 방법이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다섯째 세대'
어떤 사람은 '다섯 가족들'
어떤 사람은 '다섯 무기들'을 가지고..
이런식으로 번역을 하는데 신부님이 보시기에 가장 합립적인 것은?
"전열을 갖추고" 는 50명 단위로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본당에서 도보로 성지 순례를 가는데, 우리가 지도자라면 '본당에 다 모여서 출발 합시다!' 라고 할까요?
아니죠! 어떻게 하겠습니까?
구역별로, 반별로, 묶어서 출발을 시킬 것입니다. 그러한 질서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신부님이 생각하시기에 출발을 했는데 50명 단위로 묶어서 인솔자가 인솔할수 있다는 겁니다.
그와 같은 단위로 질서 있게 그렇게 이집트 땅에서 올라갔다.
군대로 따지면은 중대보다 작은 부대 단위로 움직이는 따라서 어디가서 싸움을 할 때도 전열을 갖추는 그와 같은 그림으로 이 표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들입니다.
사무엘상권 8장, 신약에서도 로마의 제도에도 열사람부터 시작합니다. 십인대장, 백인 대장, 천인 대장 정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50인정도..
사무엘하권 15장에서도 쉰명, 열왕기 상권에서도 50명
이 50과 함께 기억해야 할 숫자는 12입니다.
50× 12= 600 그래서 더 큰 단위는 600이라는 단위가 나옵니다.
600 이라는 단위도 군대의 조직에 단어입니다.
탈출 13,19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요셉이 '하느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 입니다.
그때 여기서 내 유골을 가지고 올라가십시오.' 하며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엄숙히 맹세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창세 50,25-26 의 요셉의 유언을 보면 방부 처리에 하고 관에 넣어 이집트에 모셨다..왜? 모시고 가기위해서
여호수아기 24,32 에서 보면, 이 부분은 모세오경이 끝난 후 다음 텍스트입니다.
신부님께서 계산해보신 결과 63세 때 여호수아기를 하실 수 있다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집트에서 가지고 올라온 요셉의 유골을 스켐에, 야곱이 스켐의 아버지 하모르의 아들들에게 돈 백 닢을 두고 산 밭에 묻었다. 그곳은 요셉의 자손들의 상속재산이 될 곳이다.
야곱은 다윗이 묻히는 막펠라, 헤브론 지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이 아니라 요셉은 스켐입니다. 야곱과 요셉에 같은 곳에 묻히지 않았다.
왜??
라는 질문과 함께 지명을 기억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히타이트 사람에게 막펠라의 밭을 사듯이 야곱도 스켐의 아버지에게 하모르의 아들들에게 ..
막펠라과 스켐 지도로 보자면( 영상 33분 45초에 함께 하세요^^)
이스라엘이 솔로몬이후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왕국이 둘로 나뉩니다.
그 다음에 북이스라엘에서는 예로보암이 솔로몬때 밑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북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그리고 나서 왕이되는데, 그 지역이 바로 스켐입니다.
따라서 스켐은?
북이스라엘에 중심입니다.
그 다음에 예로보암이 ' 아! 사람들이 전부다 유다로 내려가서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를 지내면 안되겠다.' 라고 얘기하면서..성소를 두 군데를 만듭니다.
하나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경계지역인 베텔
북이스라엘의 최고 남단인 베텔,
그리고 맨 북단인 단에도 성소를 만듭니다.
또 그리고 이 양쪽에다가 신상을 가져다 두는데 그게 바로 금송아지입니다.
스켐 - 베텔 - 단, 정도를 기억합니다.
예루살렘에 아랫부분에 헤브론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은 남유다에서 중요한 성조였고, 반면에 요셉은 북이스라엘에서 중요한 성조였습니다.
그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통해서 시작된 서로 다른 전승들(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 요셉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보존해온 전통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유배후에 하나로 묶여서 우리는 하나로 읽고 있지만 그 본래의 전통들은 이런 두 나라에 서로 다른 신학적인 틀 위에서 조금은 다른 출발을 갖고 있다가 나중에 유배후에 신명기 학파, 제관계 학파에 의해서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로 묶이게 되었다...는 것으로
정확히 어떻게 구분되어지는 것에 관해서는 사실은 잘 알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본래의 이야기들이 두 국가로 나뉘었던 그러면서 두 국가에 신학들 또는 이데올로기들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던 이야기들이 유배를 거치고 또 유배 후에 하나의 텍스트로 편집. 종합되었다는 밑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탈출 13,20
그들은 수콧을 떠나 광야 가장자리에 있는 에탐에 진을 쳤다.
일관성이 있는 보도처럼 등장합니다.
민수 33,5-6 에서도
이스라엘은 라메세스를 떠나 수콧에 진을 쳤다....
이러한 지리적 정보를 계속해서 줍니다.
그렇다면 탈출 13,20에서 광야 가장자리에 있는 에탐이 의미하는 것은?
이집트를 떠나면은 광야입니다.
이집트를 떠나 서 있는 광야, 이집트와 광야가 붙어있는 그 중간에 (우리 같으면 비무장 지대와 같은 ??) 애매한 지역
에탐이라는 곳은?
광야도 아니고 이집트 밖에 있지만 광야는 아닌!!
그와 같은 지역입니다..항공사진을 보여주십니다( 영상 38분 0초부터요)
조금더 명확해 집니다.
아프리카 북단의 모습과 이집트입니다
그리고 흐르고 있는 나일강, 그리고 보이는 홍해 바다..
홍해에는 두 가지 만이 있는데, 수에즈 만과 아카바 만이라고 부릅니다.(기억하셔야 합니다!)
수에즈 만과 아카바 만이 있고 홍해바다 가 있습니다.
노란 부분은 사막이고 시나이 반도는 거뭇거뭇 보이고 이집트로 올라가서 약간의 푸른빛이 보이는...하지만 나일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 사이는,
시퍼렇습니다..! 무언가 자라고 있다는 소립니다.
이곳을 나일 델타 라고 부릅니다.
나일의 삼각주 지역,
이집트를 떠나 그 광야에서 아직 광야를 들어가지 않은 지역이니까?
에탐은 요기어디? 여기 어디? 지명일 것 같다고 학자들은 생각합니다.(영상 39분 30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탈출 13,21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진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 서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그들을 비추어 주셨다.
이제 처음으로 이집트를 나온 상태에서 야훼라는 주체가 등장합니다.
이전까지는 하느님, 하느님(엘로힘) 이라고 나오는데..
야훼는 백성들을 앞장서서 갑니다. 인도하다는 단어와 조금 다른 단어가 쓰입니다. 훨씬 신학적인 단어입니다.
앞장서다
º 신명 1,30 : 너희 앞에 서서 가시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이집트에서 하신 것과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워주실 것이다.
º 신명 1,33 : 너희가 천막을 칠 곳을 찾아 주시라고, 또 너희가 갈 길을 보여 주시려고, 밤에는 불속에서, 낮에는 구름 속에서 앞장서 가시는 주님을 너희는 믿지 않았다.
º 신명 31,8 : 주님께서는 친히 네 앞에 서서 가시고, 너와 함께 계시며, 너를 버려두지오 저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니, 너는 두려워해서도 낙심해서도 안 된다.
구약의 하느님도 신약의 예수그리스도도 앞장서 가시는 분이시다.
그 앞장서서 가시는 길이 구약의 백성에게는 약속의 땅으로 이르는 길이었고,
신약의 백성에게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 뒤를 우리도 따라 가야 합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서....
열심히 가다보면은 마지막 목적지는,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결국 하늘나라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번역은 이렇게 했지만 (탈출 13,21) 구약에서느 잘 쓰이지 않는 현재 분사가 쓰입니다.
신부님께서 번역하신다먼, '비추어 주셨다' 라고 번역하기보다는 현재 진행형의 의미를 되살려서
낮에는 구름 기둥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그들을 비추셨다.(비추신다) 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생동감 있는 번역을 구약의 본문 텍스트는 의도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느님!(야훼)
그런데 구약에서 보면은 초월적 신관과 내재적 신관의 두 모습이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항상 성경의 신약도 발전하면서,
처음에는 내재적 신관이 문제가 없었는데 나중에 하느님의 유일신관과 함께 하느님의 초월적 신관이 아주 자리 잡으면서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이런 텍스트들이 고쳐 써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민수 20,16 에서 천사를 보내시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더 발달한 신학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읽고 있는 탈출기의 이 이야기는 조금더 원시적인 형태로
'하느님께서 기둥을 지시고 기둥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직접 이끄시는 조금? 은 더 원시적인 텍스트를 만나고 있습니다.
탈출 13,22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
같은 내용이 시편 78,14 와 느헤 9,12에서도 등장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º 시편 78,14 낮에는 구름으로 밤이면 불빛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
º 느헤 9,12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이끄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이 가는 길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참으로 인상깊은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현존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고 그들의 길을 밝혀 주셨다..그들이 어디로 가야할 지 알게 해 주셨다. 라는 겁니다.
이 텍스트가 가장 강력하게 선포되었던 때는 언제일까요?
유배가 끝나고 돌아갈 때 사람들이 '아! 거기를 어떻게 돌아가...? ' 그랬을때 이 텍스트가 가장 잘 사용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두려워 하지 마라. 내가 너희를 인도해 주겠다." 라는 말씀으로....
+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