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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0절부터 읽어 가면서 해설의 말씀을 이어 주시겠습니다."
탈출 14,10
파라오가 다가왔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눈을 들어 보니,
이집트인들이 그들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몹시 두려워하며 주님께 부르짖었다.
여기서 우리말 문법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데, 히브리말 문법은 뭔가 이야기를 전할 때 접속사,동사,주어 방식으로 나옵니다..
~~했는데 말이야. 그래서 말이야. 그렇게 됐고. ㅡ 그런데 말이야 .
우리 말에서 그런 전체적인 흐름을 끊고 딱 새로 시작하는 방식은 어떻게 할까요?
우리말 이야기 안에서는 '한편' 이런 정도의?
어순을 통해서 지금까지 이어진 것과는 다른 새로운 장면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부분이 우리말 성경에서는 파라오가 다가왔다(탈출 14,10)..라고 쓰였습니다.
그런데 이 '다가왔다' 라는 동사가 일반적이지 않고 특이한 형태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이 생각하기에 여기서는 파라오가 직접 다가온게 아니라,
주석가들이 본 '파라오가 다가왔다'에 대한
1) 파라오가 자신의 군대를 다가가게 했다.(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게 했다)
2) 특이하게도 이 동사가 몇몇 경우에는 '제사 드린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파라오가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당시에 제사를 드린 이유는?
전쟁을 하기 전에 이기게 해달라고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냈고, 또 구약성경에 보면 궁중 예언자의 축복을 받으면서 그 축복과 함께 전쟁터로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부분에서도 이스라엘을 덮치기 전에 간곡하게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신부님은 1번으로 봐야 할지 2번으로 봐야 할지 모르시겠다고....하시며 어떤 쪽 얘기를 하더라도 그 증거가 불충분합니다.
이 동사가 많은 경우에 발견이 되지 않아서 더욱 그러하고 다른 주석가들의 1번과 2번의 견해들이 있습니다.
혹시 세번째로 좋은 생각이 있으셔서 신부님께 따로 얘기해 주시면....^^
10절에서 '주님께 부르짖었다' 는?
단지 놀라서 소리내 부르짖는 것을 넘어서 "기도한다. 탄원한다" 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르짖음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탈출기 전반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탈출 2,23-24 에서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너무 커다란 억압앞에서 부르짖자,
하느님이 하늘에서 듣고 성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셨다..
사실 이 탈출기 시작의 모든 내용이 그 억압과 착취에 대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으로 부터 하느님의 개입이 시작된다..라는 것과
그리고 여기서 다시 한번 그런 부르짖음이 생긴다. 라는 겁니다.
나중에 설명해 주시겠지만은 참 재미있는게,
이스라엘이 갈대 바다를 통과해서 나오는 그 사건을 몇명의 주석가들이 "생명이 태어나는 장면" 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즉 여성들이 해산하는 장면....과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고, 그 여성들이 해산을 할때 부르짖음(??) 그리고 여성들의 해산 뿐만 아니라,
아기도 태어나서 울음을 터트리는(??)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의 에피소드를 얘기해 주셨는데요..
실제적으로 여성들이 해산하는 고통보다도 아기들은 태어나면서 2~3배 더 큰 고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 아기들의 용기있는 행동에 칭찬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지만 이 부분에서 부르짖음은 기쁨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공포에 부르짖음입니다만, 무언가 새로운 사건에 조짐을 알리는 부르짖음으로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에게 말합니다.
탈출 14,11-12
그들은 모세에게 말하였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하면서 우리가 이미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
질문이 세가지가 나옵니다.
신부님이 직역하시면,
14,11-12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도대체 없는가?
네가 우리에게 한 이것들은(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들을 이집트로부터 나오게 한것
우리들이 이집트에서 너에게(말) 했던 그 말이
이것이 아니었던가?
첫번째 질문은 수사적인 질문입니다.
(엄마들이 얘들에게 말할때 "엄마가 이렇게 애기했어 안했어?" 라고 했을 때 얘들은 '했어요.' 라고 나올수 있는)
두번째 질문은,
네가 우리에게한 이것은(도대체) 무엇인가?
⇒ 우리를 이집트로부터 나오게 한 것
뭐하려고 우리를 이집트로 나오게 했어??
세번째 질문은,
우리들이 이집트에서 너에게(말) 했던
그 말이 이것이 아니었던가?
⇒ 우리가 이미 이렇게 될거라고 얘기 했는데 왜?? 그렇게 했어..
라는 내용의 세가지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언어의 유희가 들어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히브리말 동사는 이 앞부분에서 파라오가 다가오고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뒤로 다가오는데 , 그 다가온다.라는 동사와 여기서 말하는 '묏자리' 라는 명사가 아주 비슷하게 들립니다.
다가온다는 동사는 까랍(קרב) 으로 발음 되고
묏자리는 까바르(קבר) 라고 발음이 됩니다.
이것은 약간의 언어의 유희입니다.
이집트는 장례문화가 발달 했습니다.
피라미드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미이라가 떠오릅니다.
이집트가 갖고 있는 부활 신앙도 있는 겁니다.
시체를 썩지 않게 한 이유중에 시체가 다시 살아날거다..라는 원시적인 형태에 부활신앙도 그러한 장례문화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는가?' 라고 물어봤을 때는
장례문화가 잘 발달한 이집트의 상황을 전제로 하는 역설적인 빈정거림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인간의 탄생 뿐만 아니라 그가 정말 축복을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 를 보는 것은 그가 어떤 장례를 거쳐서 끝났는가" 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보다 보면은 그러한 것들을 아주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그는 몇살까지 살다가 그다음에 꼭 어디에 묻혔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심지어는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야곱은 '막펠라'에 묻힙니다.
요셉은 '스켐'에 묻힙니다. 그리고 모세는 ??
아론은 호르산에 묻힙니다. 그리고 모세도 누보산 그 어딘가에 묻혔다..라고 나옵니다.
그가 어디에 묻혔는가? 에 대해서, 왜 구약성경에서 집착하느냐 하면??
그 안에 그 사람이 받은 축복에 내용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그가 축복을 받아서 장례가 잘 치뤄졌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아주 부정적인 형태에, 어떻게 보면 하느님의 저주(?) 라고 생각되는 그 저주는 뭐냐??
그는 죽었는데 어떻게 죽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사라졌다...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신명 28,26 ; 2열왕9,10; 이사 14,19 에서...장례에 관해 나옵니다.
장례
º 신명28,26 : 너희 주검이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의 모든 짐승의 먹이가 되어도, 그것들을 쫓아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º 2열왕9,10 : 이제벨은 이즈르엘 들판에서 개들이 뜯어 먹고, 아무도 그를 묻어 주지 않을 것이다.
º 이사 14,19 : 너는 사람들이 꺼리는 유산아처럼 무덤도 없이 내던져져, 구렁의 돌바닥으로 내려가는 살해된 자들, 칼에 찔려 죽은 자들로 옷처럼 뒤덮이고 발에 짓밟히는 송장처럼 되었구나.
이 비슷한 내용을 마르 12,1-12에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를 통해,
어떤 주인이 포도밭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나중에 소출할 때가 되서 종들을 보내니까 그 포도원 소작인들이 그 종들을 잡아 때리거나 내쫓거나 심지어는 죽이기도 하였다..하여 포도원 주인이 ' 내 아들을 보내면 알아 주겠지.' 하고 비정상적인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가니, 소작인들이 '저자가 바로 상속자다!' 라고 하면서
마르 12,8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장례도 치뤄주지 않고 던져 버렸다고 나옵니다.
그 소작인들이 그 아들에게 얼마나 엄청남 범죄를 저질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두번째 질문
네가 우리에게 한 이것은(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들을 이집트로부터 나오게 한것...
이 대목은 그 앞에 5절에 나왔던 파라오와 그 신하들이 하던 자책과 문장의 구조가 동일합니다.
탈출 14,5
'우리를 섬기던 이스라엘을 내보내다니,
우리가 무슨 짓을 하였는가?'
- 파라오의 자책-
우리말로는 보여주기 어렵지만 히브리 말로는, 그 문장의 구조가 정확히 동일합니다. 같은 질문으로, 파라오가 그 신하들이 자책한다면은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가 네 말을 듣다니!!' 라고 자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세에게 책임을 묻는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세번째 질문
우리들이 이집트에서 너에게(말) 했던
그말이 이것이 아니었던가?
우리가 이미 다 말하지 않았느냐? 라는 그와 같은 내용을 전합니다.
그들이 하는 주장은? 모세에게 자신들을 그대로 놔두라고, 우리 안나가겠다고 이미 말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더 낫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문제는 뭐냐??
탈출기 내에서 그들이 모세에게 그런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우리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인간사이에도 친구들끼리 무슨 일을 하다가 뭔가 잘못되면 그 중에 한명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야! 내가 그랬잖아~~ 하지말자고..'
그런데 그런말을 한적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너가 언제 그랬어? ' 라고 하면서 친구들끼리 비슷하게 싸우는 패턴이 있습니다.
한적이 없는 사람들이 이제와서 자신들이 위기에 빠지니까, 자신들이 그랬다고 얘기하는 거다..라고 볼수도 있고,
또는 그렇게 얘기한적이 있는데...
텍스트가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주지 않는 경우일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갖고 있는 텍스트만으로는 그들이 이집트에서 모세에게
"우리 안나갈래요~~" 라고 했던 경우가 발견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대충 모세에게 그들이 불평한 내용은,
파라오가 그들의 노동의 강도를 높이자, 조장들이 모세에게 와서 차라리 당신들이 야훼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은 우리가 이미 그런말 하지 않았느냐?'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나오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렇게 광야에 나와서 모세와 함께 약속의 땅을 가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 하고 있지 않는 겁니다.
그들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바에야 차라리 이집트의 종살이가 더 낫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런 노예 생활이 자신들에게는 더 나은 것이다.
우리가 이 부분을 깊이 묵상 해 볼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노예생활이라는 것은? 어떻게 정의 할 수 있을까요?
현대 사회 철학자들이 자기 노예화라는 말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한두번에 걸쳐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노예 제도화에서 누군가의 노예로 살았지만,
요즘엔 노예제도는 없지만 스스로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는 견해로,
" 자영업 하시는 분들, 마트하시는 분들...편의점 하시는 분들, 일주일에 하루도 못쉬죠? 지금 오신분들 중에서 일주일에 하루는 정말 하느님 안에서 푹 쉽니다~~
그런 분, 손한번 들어보세요. 네~ 이럴줄 알았써요 ㅡ,,ㅡ
몇명 밖에 못들잖아요???
나머지 우리들은 끊임없이 뭔가를 하지 않으면은 불안한 겁니다. 신부님 세대에 친구들을 보면은 항상 느끼시는 것이 아! 우리세대가 다 워커홀릭이다 ! 뭔갈 하지 않으면은 불안해요 ~~~ 그리고 잘못하는 것 같아요.
남들이 10시간 일하면 나는 11시간 일하고, 그렇게 해서 성공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것과 같습니다.
그냥 푹 쉬고, 잘 놀고 그러면은 불안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젊은이들이 사실은 정상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는데? 우리들은 젊은이들을 볼 때? 못마땅한 겁니다.
우리 눈에는 그 젊은친구들이 맨날 놀고 먹는 것처럼 보여요~~ 오히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고 있는 것인데요.
우리가 잘못 따르고 있는데, 왜 우리처럼 살지 않느냐고
우리 세대는 하루 종일 일해서 녹초가 되서 잠자리에 푹 쓰러질때
'아 ~~ 오늘 열심히 살았어..' 하면서 행복한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은데 있는 힘을 다해서 일어나서 하루 4시간 밖에 안자고 십년동안 일해서 성공했습니다! 이런게 성공신화가 되는 ..
인간의 행복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고?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관해서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부님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노예 생활을
"반성 없이 그저 열심히 사는 삶..."
이라고 하시며 이게 정말? 옳은 길인지? 이것이 정말 ? 하느님의 뜻인지?
에 대한 반성없이 열심히 사는 삶.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좀 건강하고 올바른 도덕적인 독재를 해줬으면 하는 것을 바라는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서양 영화중에서도 영웅영화에서는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것을 해주었으면 하는 그런 것들이 현대적인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노예의식이 아닌가? 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우리는 윤리적 반성을 해야 합니다.
아, 내가 이와 같은 것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정말?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인지? 그렇지 않은지 거기에 대해서 사유하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비판해 볼 수 있는 그 능력이 우리를,
자유인으로 삶으로 살아가게 하는 동력입니다.
데카르트 라는 철학자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코키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사유, 반성, 비판, 의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이것을 복음적으로 사유하고 반성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들은 나는 그렇게
'나는그리스도인으로서 성찰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나는?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합니다.'
라는 고백으로 우리들이 데카르트이 명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사상가 중에 한명이죠? 위대한 여성 사상가 중에 한명으로 손꼽는 사람중에 하나가 한나 아렌트(1906~1975)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독일 태생으로 유다인 여성 사상가, 2차 세계대전을 사상적으로 성찰하였고
저서로는 < 폭력의 세기> < 예루살렘의 아이하만> 있는데
특히나 <예루살렘의 아이하만> 이라는 작품에서
' 아! 우리가 알고 있는 악이라는 것은 의외로 평범한거다. 악의 평범함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왜냐면 아이히만, 이라는 사람이 매일 정시에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하고, 출근을 하고 월급받는 만큼 성실히 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서 성실히 일했느냐? 나찌를 위해서 성실히 일한 겁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맺고 그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에 관해서는 성찰하지 않고 열심히 산 것입니다.
아이히만이 재판장에 나와서 그 얘기를 합니다.
"나는 성실한 생활인이었다. 나는 부정을 저지른적도 없고 뇌물을 받은 적도 없고, 내손으로 누굴 죽인적도 없다. 하지만 나는 정권에서 월급을 주고 나한테 시키는 일을 성실하게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는 그와 같은 그 법정 증언을 들으면서 한 편으로는 아! 악이란 것이 얼마나 평범한 것인가? 라는 것을 얘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히만은 유죄라고 얘기합니다. 왜냐? 자신이 하고 있는 그 성실한 삶이 옳은지를 사유하지 않은 것이 유죄!!
ㅡ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죄에 혹시 나도 참여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것을 돌아봐야 합니다. ( 자신도 윤리적 반성 없는 삶을 살고 있지 않는지 돌아봐야...)
창세기 부터 탈출기 해방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자유롭게 살아라! 라는, 하느님에 자유로운 부르심은 우리를 생각하며 살라고 하신 부르심으로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겐가 복종하지 말고 살아라! 라는 것은 다른표현으로는
'너가 너의 삶의 주인으로 삶을 선택하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런 삶에 짐을 감수해야 하는 자유인으로 살아라. 라는 겁니다.
성경 안에서 그것이 드러나는 가장 핵심적인 대목은? 신명기 11장입니다.
신명 11,26- 28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듣지 않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나, 너희가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면 저주가 내릴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과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역사는 결국 신명기에 이 말씀을 알아 듣는다면, 누구에게 달려있는 겁니까?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라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미사를 드릴 때에 시작부분에서 바로 그와 같은 참회를 하는 것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하지말아야 될것들을 한것과 해야 될것들을 하지않은 것..
그러므로 지금 굉장히 무겁게 도덕적인 무게를 실어 드렸다면,
반대로 좀 가볍게 짐을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참회 예절을 하면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라는 말로 성찰을 합니다.
그건 다시 말해서 내가?
"내가 좋은 생각을 함으로써 세상은 이미 변하고 있어..."
우리들이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좋은 생각만 하면 뭐해? 하지 않으면~~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에 무게를 담고 있지 않은데요. 내가 좋은 생각을 하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은 더 좋은 세상이 되고 있다. 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그 어떤 기쁨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몇주 전에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는데,그리고 본당에서도 이런 말씀을 자주 드리는데.."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우리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 가느냐에 따라서는 우리의 선택? 우리의 책임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에 뜻이였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설혹 인간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설혹 인간이 악행을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구원의지를 결코 굽히거나 없애 버리지 않으신다. 라는
따라서 구약과 신약에 있는 사건을 통틀어서 우리가 읽어 본다면은 큰 대목안에서 그 두가지에 의지가 서로 갈등을 벌이고 있는데,
첫번째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vs 하느님의 구원의지 입니다. 이 두가지 의지가 만나서 행복한 그림은 그려내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그런 죄와 죽음의 역사를 선택하는 그런 대목을 성경 안에서 우리는 만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의 구원의지에 갈등으로 우리가 성경에 있는 텍스트를 읽을 수 있겠다. 구약이라면은 이스라엘과 하느님,
신약이라면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그런 갈등들. 또 그것을 뛰어넘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정의라는 은총들...이런 얘기를 자주 하시니까. 어떤 분이
'신부님, 그럼 왜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을까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고 우리들 한테 리모트콘트롤 하셔서 나쁜짓 하면은 아프게 못하게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 얘기를 자주 질문하시는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우리에게 강아지 인형하고 강아지하고 선택하라고 하면 우리는 과연 어떤것을 선택할까요?
살아있는 강아지죠? 강아지들은 우리말을 잘 듣지 않아도 강아지를 선택합니다.
인형과는 나눌 수 없는 것들을 살아 있는 강아지와는 나눌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유대담, 연대감,이라고 하는데 신부님은 사랑이라고 얘기하신다고 ....
하느님이 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느냐?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자유를 주셨다. 따라서 그것이 어떤 신학적인 명제이든,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느냐면..
신과 인간의 관계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빼놓고
궁극적으로 어떠한 것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만나는 많은 하느님의 모습들,
또 신학적으로 정의된 여러 가지 신관들..하느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들.
그 모든 것에 바탕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라는 그것을 빼버린 다면 그 어떤 것도 설명하기가 어려운 그것이 바로 우리들에 신앙의 체험이 아닌가? 라고 하셨습니다.
탈출 14,13-14
그러자 모세가 백성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오늘 너희가 보는 이집트인들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너희는 잠자코 있기만 하여라."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한 모세의 질문이 세개 였듯이,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는 답변도 역시 세 가지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한 3가지 답변 -
■ 자신의 위치에 서라
■ 구원을 보아라
■ 가만히 있어라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 질문에 자신을 변호하거나 응답하지 않고 명령하는 세가지에 핵심에 우리들이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갖고 있는 공포를 모세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위치에 서라.라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명령은 두 가지 입니다.
두려워 말라!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 서라.. 이 명령은 중대한 결정에 순간 지도자가 백성에게 또는 장군이 병사들에게 하는 명령처럼 들립니다.
서라
º 신명 31,14 :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자, 네가 죽을 날이 가까웠다. 여호수아를 불러 만남의 천막 안에 함께 서라. 내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겠다."
º 1사무 10,19 : 그런데도 오늘 여러분은, 온갖 재앙과 재난에서 여러분을 구해 주신 여러분의 하느님을 배척하면서 '안되겠습니다. 우리에게 임금을 세워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소. 그러니 이제 지파와 씨족별로 주님 앞에 나와 서시오.
명령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것 같습니다.
"서라" 싸울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언가 전쟁이 시작하는 것처럼 같은데 뒤이어 등장하는 명령은 나가서 싸우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늘 야훼가 이루는 구원을 보라는 겁니다.
앉아서 보면 잘 안보이니까 서서, 멀리까지 보라는 것입니다.
결국 30절까지 읽게 되면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죽어있는 이집트인들을 보게되고 야훼가 이집트인들에게 행사한 커다란 권능, 야훼의 큰손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본다고 애기하고,
반대로 모세는 이스라엘이 다시는 이집트인들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는 말로 계속 엮어 이어가는...) 얘기합니다.
그리고 오늘이 이집트인들을 보는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계속해서 오늘이라는 시간이 두번에 걸쳐서 반복이 됩니다.
이 오늘을 통해서 앞으로 일어나는 사건에 현재성이 강조 되고 있고, 그리고 이와 같이 다시는 이집트 인들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모세의 예고를 통해서
탈출 10,29
모세가 대답하였다. "말씀하산대로 저도 임금님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않겠습니다."
라고 애기하는데 우리에게도 그 제목을 상기시키시는데, 실제로 갈대 바다 사건이후 이집트는 탈출기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14절에서 이스라엘이 무엇을 보게 될지에 대해서 서술합니다.
야훼는 너희들을 위해 싸울 것이고 너희들은 가만히 있을 것이다. 이 문장에서 야훼와 이스라엘의 역할이 엄격하게 구별되고 대조됩니다.
이제 갈대 바다 사건 안에서 야훼는 한명의 전사(戰士)처럼,
신명 1.30 : 신명 3,22 여호 24.3 이스라엘은 가만히 서서 보고 있으면 됬는데, 야훼 하느님께서 싸워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을 것이다." 는 표현은 이중적입니다.
야훼는 싸우고 너희는 가만히 있을 것이다.
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 전대목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막 부르짖었을 때 부르짖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라가 너무나 가슴아프게 들었던 내용이라서 대한 민국에서 우리에게 다가온 큰 문제중에 하나는, 어떤 위험이 다가왔는데 방송으로 누군가가 '아, 지금 어떻게 어떻게 처리되고 있으니까 가만히 있으십시오. 라고 한다면은 대한 민국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이게 정말로 우리에게 커다란 문제로, 커다란 상처를 남긴 사건이 아닐까?
만약 우리들의 자녀들이 우리에게 전화가 와서 무슨 사고를 당하고 있는데 방송에서 가만히 있어라..하면은 '방송에 따라서 가만히 있어라" 하지 않을것 입니다.
그 신뢰가 무너져 내린 겁니다.그것과 관계가 되어있는 유** 분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정부에서 경찰에서 그분이 유** 분이라고 발표를 했는데 대한 민국 사람중에 70%가 믿지를 않는 겁니다. 그런 시스템이 가져야 될 신뢰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이 국민들에게 왜 ? 정부가 발표하는데 믿지 않느냐? 불순분자 아니냐? 그런식으로 국민들을 야단칩니다.
사실은 이렇게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 버린 지도자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다 국민들에 신뢰를 잃어 버렸을까? 에서 반성해야 하는 대목에 오히려 국민들을 야단치는 이런것들에 관해서 정치 지도자건, 경제 지도자건, 아니면 교회 지도자건,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그런분들이 함께 자신들를 성찰해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정안에서는 우리들도 가정의 지도자들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충분한 신뢰를 얻고 있습니까?
생각해 볼 것들이 몇가지가 있습니다.
탈출기 14장에서 세번에 걸쳐 주님의 지시가 모세에게 내려
탈출 14,1-~ 탈출 14,15~ 탈출 14,26~ 에서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로 세번에 걸쳐서 이를 통해 전체 사건을 주도하는 것은 야훼인데,
그 야훼가 탈출기 14장에서 주님을 위한 목적은
주님 영광을 드러내는 것, 이집트인들이 '내가 주님임을 " 을 알게 하는 것
알게 되는 2가지 목적입니다.
앞의 13장에서는 야훼가 이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가는 목적이 이스라엘인들이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위해서 라고 했는데,
14장에서는 이집트인들이 '나는 야훼다.' 라는 것을 알게하고 야훼의 영광을 드러내는 조금은 이 전체적인 사건의 진행이 갖고 있는 목적에 이중성을 우리가 여기서 알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멘~!! 고맙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