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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하느님의 응답 : 탈출 33,10-17
탈출 33,10 직역
그리고 모든 백성은 보곤 했다 / 구름기둥을
(구름기둥이) 자리 잡는 동안 / 그 천막의 입구에
그리고 모든 백성은 일어서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절하곤 했다 / 각각 자신의 천막 입구에서
여기에서도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연필로 8절의 일어서곤 했다. 와 10절의 일어서곤 했다를 줄을 그으시라고 하셨습니다.
위의 문장에서는 신부님이 직역하셨는데 히브리 말에서 '일어서곤 했다'는 보조동사로도 쓰입니다. 꼭 일어서는게 아니라 뭐뭐하기 시작했다. 라고 얘기하는 따라서 8절에서는,
모든 백성은 천천히 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나갈 때 그 천막 백성은 천천히 나가곤 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그리고 모든 백성은 절하기 시작했다,라는 뜻으로 이 일어선다라는 말에 동사를 보조적인 의미로 알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천막에서 그들은 절을 했다.
왜? 절을 했을까요? 구름기둥과 함께 야훼 하느님의 현존이 천막 안에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으니까 그들이 거기에 절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성전에 들어갈 때 감실을 향해서 인사를 하듯이,
전례적으로 참 재밌는 토론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제대일까요? 감실일까요? 성전이라는 개념 안에서 사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제대입니다.
그런데 감실은 사실, 어떻게 보면 없어도 됩니다. 미사 때 성체 다 나누어 주고 성체가 없어요. 그럼 항상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감실은? 없어도 됩니다.
따라서 감실의 위치는? 성전을 지을 때 좀 자유롭다고 합니다. 구석이건 중앙이건,
하지만 제대의 위치는?
모든 성당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자리 잡게 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평소에 성당에 들어가게 되면은 제대의 불은 꺼져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그 불은 감실에 켜져있습니다.
신부님은 건축에 측면에서는 제대가 제일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소에 미사를 드리지 않는 조용한 성당에 들어갔을 때, 하느님의 현존이 가장 도드라 지는 곳은? 감실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미사가 시작하면은 제대의 촛불이 켜집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이곳에 계십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때에는 제대가 당연히 성전에 가장 중심이 된다고 합니다.
탈출 33,11 직역
그리고 야훼는 말씀하곤 했다 / 얼굴들이 얼굴들에게
마치 말씀하듯이 / 각각 자신의 이웃들에게
의역하자면, 얼굴들이 얼굴들에게 ⇒ 얼굴을 마주하고
의역하자면 야훼는 말씀하곤 했다. 자기 옆사람에게 얼굴을 마주하고 말하듯이
탈출 33,11 직역
그리고 그는 돌아왔다 / 그 진영으로
하지만 그의 시종 / 여호수아는 빈 - 눈(눈의 아들) / 젊은
위에서 그는 모세입니다.
여호수아는 빈- 눈(눈의 아들) / 젊은
에서 사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그냥 풀네임으로 보는게 낫겠다고 하셨습니다. 라덴의 아들 이라고 하지 않고 '오사마 빈 라덴' 이라고 부릅니다.
누군가를 얘기할 때 그 아버지의 이름과 붙여서 얘기하는 것이 고대 근동 지역의 누군가를 호칭하는 그와 같은 방식인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좀 특이하십니다. 요셉의 아들 예수(요수아 빈 요시프)라고 부르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이거나 나자렛 예수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이 의도적으로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들인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수아 빈-눈은 젊었다는 것입니다. 젊다는 것은 두가지 뉘앙스를 갖고 있습니다. 다 자랐는데 완전히 성인이 되지는 않은, 그러므로 주로 조수의 역할을 합니다.(복사의 역할)
모세는 진영을 떠나서 돌아왔지만 그의 시종 여호수아는
탈출 33,11 직역
떠나지 않곤 했다 / 그 천막의 가운데로부터
오늘날 제일 중요한 이유중에 하나가 그 어떤 것을 성당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건이 성전을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본당 신부님입니다. 본당에 신부님이 없으면 그곳은 일반적인 표현으로 경당,이라고 합니다.
교리 신학원에도 4층에 가면은 경당이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그 많은 신부님들이 계시는데도 본당신부님은 안계십니다. 따라서 신학교 성당도 경당입니다.
본당신부님의 가장 1차적인 책임은 성전을 지키는 것입니다.
▶ 몇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탈출 33,7 절에서 만남의 천막이 야훼를 찾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하지만 8절부터 11절은 모세가 만남의 천막에 오가는 곳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만남의 천막에 오면 구름기둥이 등장하고 하느님이 오시는 그런 신적 현현과 연결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만남의 천막을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방문을 했을 때 신적 현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텍스트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세가 오면 구름기둥도 왔다. 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 전통은 여기서 이 만남의 천막을 모세의 거처로 해석합니다.
이게 과연 옳은지는 알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텍스트에서는 그리고나서 모세는 진영으로 오고 여호수아는 그곳을 지켰는데, 천막 자체를 유다 전통을 모세의 거처로,
이 천막은 탈출 25장~40장을 통해 만들어질 성막의 전형입니다. 따라서 성막이 만들어 지기 전에 있었던 야훼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날 수 있는 그와 같은 공간입니다.
민수 2,17
그 다음에는 만남의 천막과 함께 레위인들의 진영이 다른 진영들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출발한다. 이렇게 진을 치는 순서대로 출발하는데 저마다 자기 깃발 아래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
둥그렇게 진영들이 있고 가운데 만남의 천막, 그리고 만남의 천막을 지키는 그런 레위인들이 진영을 이루고 또 이동할 때도 그렇게 이동하는 것입니다.
민수 3,6-10
"너는 레위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여, 그들을 아론 사제 앞에 세워서 그를 시중들게 하여라. 그들은 성막의 일을 하여 만남의 천막 앞에서 아론을 위한 임무와 온 공동체를 위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레위 지파의 특별한 임무)
그들은 또한 만남의 천막에 있는 모든 기물을 보살피고 성막의 일을 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너는 레위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붙여 주어라.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뽑혀 나에게 바쳐진 이들이며 아론에게 주어진 이들이다.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임명하여 사제직을 수행하게 하여라. 속인이 다가왔다가는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남의 천막안에는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제사드리는 사람은 다 가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민수3장의 내용을 보면, 아! 이것은 레위인들만, 또는 아론과 같은 사제들만, 가까이 갈수 있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시나이산에서 처럼 속인은 만남의 천막에 접근할 수 없다는 금령으로 이 대목을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2사무7,6
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 나는 천막과 성막 안에만 있으면서 옮겨 다녔다.
라고 나탄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다윗에게 야훼하느님께서 '내가 언제 너에게 집지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느냐?'
▶ 따라서 만남의 천막은 이 문장만 보게되면 하느님이 거처입니다.
2사무 6,17
다윗이 미리 쳐 둔 천막 안 제자리에
주님의 궤를 옮겨 놓았다
따라서 다윗이 쳐둔 천막의 1차적인 기능은? 계약의 궤를 염두해 두고 그와 같은 천막을 생각하는 것이고 여기서 모세가 얘기하는 만남의 천막은 나중에 기원을 보고 보고 보게 되면은 다윗의 시대에 아직 성전이 지어지기 전에 계약의 궤가 이동하면서 언급되었던 그 천막과 동일한 천막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볼수 있습니다.
정작 우리가 탈출기에서부터 만나게 되는 성막은 훨씬 더 큰 규모로 지어지는 그 성막은 열왕기나 다윗이야기나 그 이야기에서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솔로몬이 임금이 되면서 다윗이 계획했던 성전을 짓는데 그 성전이 뭐하고 유사하겠습니까? 탈출기에서 등장하는 성막과 아주 유사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을 저희는 만나게 됩니다.
탈출 33, 9에서 구름기둥이 천막의 입구에서 자리 잡는다고 되어있는데 반면에 탈출 40,38은 탈출기의 마지막 절입니다.
탈출 40,38
그 모든 여정 중에 이스라엘의 온 집안이
보는 앞에서, 낮에는 주님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그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선 정작 천막에 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다음 구절들에 나오는 만남의 천막에 대한 묘사는 탈출 33장과 유사합니다.
민수 12,5
주님께서 구름 기둥속에 내려오시어 천막 어귀에 서시고, 아론과 미르얌을 부르셨다.
그런데 민수 12장까지 갔으면 성막은 이미 완성됐습니다. 이미 완성되서 레위기 민수기를 지나서 민수 10장에서는 이제 성막을 걷어가지고 이스라엘 민족들이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도 천막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신명 31,15
그때에 주님께서 구름 기둥속에서 천막 안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천막 어귀 위에 머물러 있었다
라는 천막에 관한 내용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또 하나 주석가들이 흥미롭게 생각하는 여호수아에 관한 이야기인데, 여호수아의 본래의 이름은 호세아 였습니다.
여호수아
º 민수 13,8 에프라임 지파에서는 눈의 아들 호세아(여수아 빈 눈)
º 민수 11,28 그러자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였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레위지파가 아니라 에프라임 지파입니다. 이것이 주석가들의 눈에 띄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걸까? 그런데 에프라임지파라고 하면은 우리가 딱 생각나는 것은? 나중에 왕국이 갈리고 나서 그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리고 나서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강력한 지파가 에프라임지파였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을 아예 에프라임이라고 부릅니다. '에프라임아! 에프라임아!' 부르면서 에프라임을 중심으로 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갈등을 얘기할 때도 에프라임과 유다의 갈등을 얘기하는 , 여호수아는 이런 에프라임지파의 속합니다.
그런데 그 여호수아가 어떻게 만남의 천막을 지키는 그런 사제직에 준하는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는지 텍스트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32장에서 금송아지 사건 때 레위지파가 모세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그 레위지파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도 되지 않습니다.
민수 27,21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 임명되지만 사제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음을 명시합니다. 민수 27장을 잘 읽어 보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도자지만 사제적 역할 만큼은 따로 수행하는 사제가 따로 있습니다.
탈출 24장 , 32장, 33장 등에서 여호수아는 모세의 조수와 같은 역할을 하고 탈출 17장에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는 전쟁을 이끌기도 합니다.
민수 11,28 여호수아에 관해서 얘기하면서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온 그와 같은 여호수아에 관해서 소개를 합니다.
모세의 청원, 그러면 그것과 곧장 이야기가 붙어있으면 될텐데, 그런데 지금 그 이야기를 가르고 만남의 천막이야기가 들어 왔습니다.
더군다나 만남의 천막은 전체의 이야기의 시간적 흐름에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즉 따로 분리되어 나와있었습니다. 뭐뭐하곤 했다. 뭐뭐 하곤 했다.로서
일반적인 히브리 말의 이야기를 하는 텍스트라면은 완료형, 완료형, 완료형, 완료형 이렇게 쓰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미완료, 미완료, 미완료로 쓰였으니까 그 텍스트를 집어 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본래의 이야기인 완료형 동사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만남의 천막이야기가 왜 하필 거기에서 시간적 흐름을 무너뜨리면서 거기에 껴 있을까?
신부님의 생각은? 아! 이제부터 야훼와 모세가 하는 이야기는 만남의 천막에서 했던 대화라는 그와 같은 야훼와 모세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마치 옆집 사람에게 이야기 하듯이 그렇게 함께 이야기하는 만남의 천막이 이 이야기 전체에 하나의 장소적 배경이라는 그것을 탈출기의 편집자는 암시하려고 그렇게 시간적인 흐름을 깨면서 까지 만남의 천막을 이곳에 집어 넣은 것이 아닌가? 라고 추측을 하신다고 설명하셨습니다.
탈출 33,12 직역
그리고 모세는 말했다 / 야훼에게 / 보십시오
당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 나에게 오르게 해라 / 이 백성을
그러나 당신을 나를 알도록 하지 않았다
(누구를) 당신이 보낼 것인지를 / 나와 함께
그런데 당신은 말했다 / 나는 너를 알고 있다 / 이름으로
그리고 너는 발견했다 / 호의를 / 나의 양 눈에
여기서 재밌는것이 아까도 신부님이 동사를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시작할 때 이야기 하는 당신은 말하고 있습니다. 라고 모세가 말할 때, 당신은 말했습니다. 가 아니라 당신은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얘기하면은 현재 분사가 쓰인 것입니다.
you 're talking, you're speaking 그러니까 지금 현재를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는 한참 건너 뛰어서 만남의 천막이야기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기서 왜?? 완료형으로 얘기하지 않고 당신을 말했습니다.라고 애기했으면 될걸 이 백성을 오르게 해라. 당신을 말했습니다. 라고 애기하지 않고 분사를 썼는가? 이건 아마도 지금 이 문장이 갖고 있는 12절이 본래에 이야기 안에서는 탈출 33,1절과 연관되는게 아닌가?
그리고 야훼가 모세에게 말했다. 탈출 33,1 올라 가라, 이곳으로부터 너와 그 백성은 ⇒ 탈출 33,3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러자 탈출 33,12 그 야훼의 말씀을 들은 모세가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말했다 / 야훼에게 / 보십시오
당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 나에게 오르게 해라 / 이 백성을
그러나 당신을 나를 알도록 하지 않았다
(누구를) 당신이 보낼 것인지를 / 나와 함께
그런데 당신은 말했다 / 나는 너를 알고 있다 / 이름으로
그리고 너는 발견했다 / 호의를 / 나의 양 눈에
백성을 올라가게 했습니다. 야훼가 함께 보낸 사람은 적어도 어디로 갈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라는 야훼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한데 긍정적일 경우와 부정적일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배반한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웃으로, 우리는 나쁜 사람들을,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것을 알고 있어요.
나쁜 이름도 기억하고 있고 좋은 이름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중립적입니다만, 야훼가 좋은 의미로 모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을 두번째 문장에서 설명 되고 있습니다.
- 너는 발견했다 호의를 나의 양 눈에,
이 문장을 우리말로 의역하면 나는 너를 좋아해, 너는 내 맘에 들었어. 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내용에서 야훼가 모세를 이름으로 알고있다. 이런식의 표현은 등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야훼의 호의를 발견했다. 는 표현도 조금은 생소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만남의 천막이라는 곳에서, 앞선 대목에서 있었던 어떤 일들이 전제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우리가 해 볼수 있습니다. 아무튼 텍스트 상으로 앞에는 어떤이야기와 연결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탈출 33,13 직역
그러니 이제( 정말로) 내가 발견했다면 / 호의를 / 당신의 양 눈에
내가(제발) 알도록 하십시오 / 당신의 길들을
그리하여 내가 당신을 알도록 / 내가 발견하기 위하여 / 호의를
당신의 양눈에 / 그리고 보십시오 / 이 민족은 당신의 백성이라는 것을
그냥 이렇게 보면, 이게 도대체 무슨뜻이야? 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석가들도 이 부분을 힘들어 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것은?
당신의 길들을,
1. 모세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한 길들을 뜻할 것이고
2. 단지 “길” 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토라를 의미하는 겁니다.
하느님의 율법이라는게 결국 이스라엘이 살아가야 할 길입니다. 길은 토라에 대한 은유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길들, 인데 그 복수형을 이상하게 본 그리고 그 길들을 알도록 해달라는 모세의 요구가 문맥에 맞지 않는다고 이미 옛날 사람부터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라메어나 그리스 말로된 고대어 번역본들 중에 어떤 번역본들은 여기서
당신의 길들을 에서 길들을 빼고 얼굴 또는 모습 이라는 뜻에 다른 단어로 대체합니다.
따라서 내가 알도록 해주십시오. 당신의 얼굴들을, 당신의 모습을
12절과 연관시켜서 생각한다면 모세의 요구는 누가? 자신과 함께 백성을 인도할지를 분명히 알려 달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13절a 의 전반부에 마지막 부분에서
내가 발견하기를 위하여 호의를 당신의 양눈에 라고 모세가 말하는데 이미 12절 마지막과 13절 시작 부분에서 동일한 표현이 이미 반복됩니다.
모세는 이미 야훼의 호의를 발견했는데 왜 또 한번 그 호의를 발견하려고 하는 것일까? 모세는 호의 중독자입니다.
아마도 전제된 야훼의 호의는 충분하고 완전한 꼴이 아니라는 것이 12절과 13절의 행간에 담긴 뜻일것 같습니다.
정말로 완전히 호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모세가 야훼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당신을 알도록
당신의 길들을 알아야지 내가 당신을 알수 있고 당신을 알아야지 내가 완전한 의미에서의 당신의 호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어떤 흐름으로,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탈출기 전반에 계속 반복되는 겁니다 .
하느님이 이집트에서 열가지 재앙을 일으킨 것은 그리하여 이집트가 야훼 하느님을 알도록, 하느님이 이집트를 떠나고 나서 갈대 바다에서 까지 왜 이스라엘을 시험했습니까?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알도록, 그것이 중요합니다.
또 하나 13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세가 하느님한테 강요합니다. 보십시오 이 민족은 당신의 백성입니다. 탈출 32,7절에서 야훼는 이스라엘을 너의 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대로 탈출 33,1절에서는 이 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여기 13절에서 모세는 그 점을 교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나의)의 백성, 이 백성도 아니고, 이스라엘은 당신의 백성입니다. 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탈출 33,14 직역
그리고 그는 말했다 / 나의 얼굴들이 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쉬도록 할 것이다 / 너를 위해
우리말 성경에서는 얼굴이라고 번역하고 단수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은 얼굴들, 로 번역하고 복수 취급을 하셨는데, 히브리말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얼굴에 단수형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입장도 틀린게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얼굴은 항상 복수 취급합니다. 그런게 몇가지 있습니다.
하늘, 이라는 말을 샤마임(שמים) 이라고 하는데 쌍수형입니다.
예루살렘도 예루 샬라임 이라고 해서 쌍수형입니다.
따라서 어떤 명사는 단수형이 분명히 존재할텐데 단수형은 쓰이지 않고 복수형만 쓰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물( 마임, מים)을 얘기할 때는 히브리 말에서 항상 단수형만 등장합니다.
얼굴( 파님, פנים), 히브리어에서 마지막으로 임, 님으로 끝나면은 두개가 있는 쌍수형이거나( 젓가락 한벌) 또는 복수형 인데 얼굴이 그런 경우입니다
신부님이 왜 복수형을 사용했을까? 를 상상해 보셨는데 물은 두 가지 형태의 물이 있습니다. 바닷물과 시냇물이 있듯이,
얼굴같은 경우에도 여러 표정의 얼굴을 갖고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복수형으로 쓰인것으로 생각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나오는 얼굴들은 지속적으로 복수형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나의 얼굴들이 갈것이다. 라는 것을
나 자신이 갈것이다. 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영어로 고대어 번역본을 번역하면은 I myself 이런식의 번역이 등장합니다.
반대로 현대어 번역본들도 이것, 나의 얼굴들이 갈것이다. 가 번역하기가 어려워서 my presence 나의 현존이 갈것이다. 라고 의역했습니다 .
하지만 33,18절부터 23절의 내용을 감안한다면 야훼의 얼굴들은 야훼 자신을 뜻하게 됩니다.
나의 얼굴들을 야훼 자신으로 알아듣는 다면, 이로써 3절에 있었던 야훼의 결정이 번복되는 겁니다.
‘ 나는 너희랑 같이 가지 않겠어.’ 라고 얘기했다가 ‘ 아 그래 너가 그렇게 얘기한다면 할수없네 내가 가야지…
이런 식의 어감입니다.
아마도 4절에서 ~6 절에서 언급된 그런 장식, 패물의 벗어 버림과 12절과~13절에 등장하는 모세의 요청이 야훼의 결정에 까지 영향을 준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얼굴들이 가는 목적은?
그리고 내가 쉬도록 할것이다. 너를 위해
쉰다는 표현은 육체적 휴식뿐만 아니라 신적 인도와 보호룰 뜻합니다
신명기 3장 12장 25장 여호수아기는 1장 22장을 볼수 있습니다.
예언서에서 쉬도록 한다. 라는 말이 등장하면은 “달래다.” 라는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에제 5장, 16장, 21장 24장 즈카 6장 같은 곳에서 이런 동사가 사용이 됩니다.
탈출 33,15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얼굴들이 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를 올라가게 하지 마십시오. 이곳으로부터
계속 중복이 됩니다. 앞에서도 호의나 패물을 떼는 것이 중복이 되었듯이 계속해서 이중 전승의 문제가 생깁니다. 모세의 이 언사는 탈출 32,32절을 상기 시킵니다.
탈출 32,32에서 모세가 자신과 이스라엘의 운명을 연대했다면, “이 백성들을 버린다면 나도 당신의 생명의 책에서 지워버리십시오...”라는 이야기를 했던 그 대목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여기서는 야훼와 이스라엘의 연대를 주장합니다.
가나안으로 떠나던 아니면 시나이 산에서 남던 이스라엘은 야훼가 있는 곳에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마치 룻기에서 룻이 나오미에게 '당신의 하느님이 나의 하느님이고,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갈것이고...우리가 떠나던 남던 당신이 있던 곳에...일종의 연대성으로 이 구절을 이해합니다.
탈출 33,16 그러면서 일종의 모세의 논거로, 약간의 수사적 의문문이 등장합니다.
탈출 33,16 직역
그리고 무엇으로써 알려지겠습니까 / 이제 / 내가 발견했다는 것을
호의를 / 당신의 양 눈에 / 나와 당신의 백성이
여기서 확장이 됩니다. 모세만 호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까지도 호의를 발견해야 합니다.
탈출 33,16 직역
우리와 함께 당신이 걷는 것으로써가 아닙니까
그리고 (무엇으로써) 우리가 구분되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우리, 나와 당신 백성이, 모든 백성으로부터 땅의 얼굴들 위에 있는…
또 얼굴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비슷한 용어들이 다양한 문장 안에서 다양한 의미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질문은? 무엇으로써 알려지겠습니까? 그리고 무엇으로써 구분되겠습니까?(질문은 2가지)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한가지 입니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 걷는 것으로써,”
그러면서 모세가 발견한 하느님에 호의가 이제는 모세와 당신 백성이 발견하는 호의로 확장되고 그렇게 확장된 그 백성이 다른 백성으로부터 어떻게 구별되겠는가? 이 땅에 있는 많은 백성으로부터 어떻게 구별되겠는가?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걷는 것으로써 구별됩니다.
문법적으로만 보면 문법적인 틀이 깨지고 있는데, 어느 문법학자가 보면 그거 틀린 문장이야 할 수 있는, 하지만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은 그 의도를 우리가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모세와 하느님의 관계가ㅡ 이제 모세와 이스라엘의 관계로 확장이 되고 그러면서 그 야훼 하느님이 궁극적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걸어가야 한다는 그와 같은 요청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탈출 33,17
그리고 야훼는 말했다 / 모세에게
역시 이 말씀(일) 도 / 네가 말씀한 / 내가 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발견했다 / 호의를 / 나의 양 눈에
그리고 나는 너를 알고 있다 / 이름으로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12절 마지막 부분에서
탈출 33,12
그런데 당신은 알았다 / 나는 너를 알고 있다 / 이름으로
그리고 너는 발견했다 / 호의를 / 나의 양 눈에
따라서 12절~ 17절을 같이 놓고 봤을 때 12절에서 있었던 내용이 마지막 17절에서 발견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중간에 14절과 15절을 보면서 얼굴들,
이 13절과 16절에서는 호의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12절~ 17절을 쭉 보면은 맨 테두리에 있는 것은?
나는 너를 알고 있다 이름으로, 그리고 그 안에 등장하는 것은, 호의 그리고 제일 중심에서 등장하는 단어는 얼굴들 이라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내적 논리를 망가트리고 있지만 하지만 단어들이 등장하는 것들은 균형이 맞춰져 있습니다. 가운데는 얼굴들, 그걸 둘러 싸고 호의, 그리고 그것를 둘러 싸고 이름.
하지만 이것은 문학적인 구조 안에서 구조가 재밌게 맞춰져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반면에 오늘날의 주석학자들은 그러니까 그런 구조를 맞추기 위해서 내용적으로 많은 것들이 흐트러져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12절~ 17절을 재구성 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오늘날의 독자들이 새로운, 읽기 쉬운 내용으로 이것를 바꿔 볼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시도가 당연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12절부터 ~ 17절에 있는 것들을 퍼즐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새로이 조합함으로써 12절~ 17절을 일관성 있는 한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시도해 보시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적어도 4~ 5가지 의견이 있어서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전체적인 내용을 이렇게 읽으면 조금은 매끈하게 이야기의 흐름이 잡힙니다. 라는 시도를 한번쯤 해보시기를 권하셨습니다.
지금있는 12절~ 17절안에서도 충분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야훼 하느님은 모세를 이름으로 알고 있고 야훼 하느님은 모세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호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야훼의 얼굴들이 이스라엘과 함께 가는 것을 통해서.....
그래서 얼굴. 호의. 이름 이런것들이 전체적인 텍스트 안에서 균형을 맞추어서 배치되어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첫댓글 아멘~!! 고맙습니다~^^
아멘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