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막막하다면 함께!
#내 낡은 서랍 속의 엉킨 실타래
대학시절 나에게 가장 어렵고 중요한 고민의 주제는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 가였습니다.
선교단체 활동을 열심히 했었어요.
리더도 해보고, 일 년 휴학하고 리더를 섬기는 리더도 해보았지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선교단체에서 하는 이런 저런 강의도 많이 듣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확히 다 알 수는 없어도, 내가 모르고 있던 역사적 사실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직감했고, 정치와 경제는 다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너무나 뒤틀려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지요.
그러나 어려움은 거기서 시작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풀기 어려운 질문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내 서랍 속에 엉킨 실타래가 한웅큼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막막한 마음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이런저런 씨름을 시작했습니다.
선교단체 후배들을 만나면 함께 공부해야 한다며 떠들고 다녔지요.
자기도 잘 모르면서 있는 것 없는 것 다 끌어다가 설득하곤 했었어요.
무엇이든지 일단 알아야겠다는 마음에 이런 저런 책들을 찾아 읽어보고, 강의도 들으러 다녔습니다.
그럴 때마다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닫고,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공부를 해보아도 내가 모르는 것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앞에,
그리고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하여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앞에 막막했고, 이런 사태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기독청년아카데미에 처음 발을 내딛은 건 후배들과 함께 참여한 농활이었습니다.
어렴풋이 가장 효과적인 공부는 몸에 새기는 공부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함께 간 친구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강한 인상을 남긴 시간이었습니다.
공부는 관념의 탑을 높이 쌓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만남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매우 즐겁고 유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운 것이지요.
그런 진지함과 유쾌함이 좋아 이후에도 기청아와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왜 우리는 포기하게 될까?
자기 삶을 진지하게 잘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누구나 청년의 때에 서랍 속에 있는 엉킨 실타래를 발견하게 됩니다.
엉킨 실타래를 만나는 것 그 자체는 결코 절망할 일도 아니고, 우울한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도약과 성숙을 위한 기회가 되지요.
그런데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청년들은 그 실타래 앞에 우울하게 주저앉아 체념하는 경우를 자주 접합니다.
저 역시 그랬고요.
왜 그 순간을 새로운 도약과 성숙의 기회로 만들지 못하고 체념하게 되는 것일까 질문해봅니다.
청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 앞에 체념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자기 과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해답은 쉽게 주어질수록 가벼워지고, 생명력을 잃기 쉽습니다.
오히려 넘어서기 어려움은 과제의 무거움이 아니라 자신의 과제를 함께 풀어갈 수 있는 인생의 선배들과 친구들이 없다는 사실과 그런 관계의 장이 없다는 사실에 있는 것 같습니다.
#체념을 넘어 배움과 삶을 순환시키는 관계
돌아보면 기청아에서 만났던 공부들이 내가 고민하고 있던 질문에 완벽한 답을 제공해 주었던 기억이 컸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가진 막막함을 ‘원샷 스트레이트’로 뻥~ 하고 날려주는 경험 말이지요.
그렇다면 거기서 어떤 힘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던 것일까 묻게 됩니다.
저는 그것이 기청아가 함께 공부하는 동지를 만날 수 있고, 그 관계로 인해 배움을 삶과 순환시킬 수 있는 장이 되어 주었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던진 질문에 명쾌하게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함께 고민하고 씨름하고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찾아가기 위해 함께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제 고민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 씨름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순간순간 게을러지고 싶고, 대충 얼버무리고 싶은 순간에도 우직하게 씨름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힘을 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관계의 장이 있을 때 배움을 삶과 순환시키는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물론 기청아의 강좌들을 또 하나의 인문학 상품을 소비하는 것처럼 만나고 떠나는 사람들은 경험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참여해 본 사람이라면 누군가에게 늘 질문을 받고, 서로의 삶 가운데 배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눠봤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강좌 자체도 이러한 순환을 촉진시키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책을 함께 읽고 저자를 만나보기도 하고, 현장을 직접 찾아보는 기행을 떠나기도 했지요.
그 역동성이 나로 하여금 창백한 관념에 머무르지 않도록 다그쳤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경험이 지금의 저로 하여금 동생들이나 친구들을 만날 때 기청아를 소개하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간혹 이런 저런 질문이나 어려움을 가지고 만날 때면 필요한 조언과 함께 기청아 브로슈어를 손에 쥐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여기에 너의 고민에 대한 답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너와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고, 또 나 말고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고 싶은 마음을 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혼자 고민하고 생각하다보면 정작 싸워야 할 것과 싸우지 못하고 허깨비와 싸우다 힘을 다 써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결국 체념한 채로 이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가는 것을 많이 보았고 스스로도 경험했었지요.
홀로 씨름하면 내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렵지만 함께 지혜를 모으면 세상을 흔들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아직도 답하지 못한 스스로의 과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즐겁고 고마움으로 걸어갈 수 있는 이유는 함께 할 동지들이 있고, 또 함께 설 수 있는 든든한 토대가 있는 사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과 유쾌하고 즐겁게 배우고 실천하며 새로운 삶 살아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