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집은 오며가며 자주 보고, 오떤 공간인지 한번쯤 꼭 들려보고 싶었는데, 사회선교학교에서 통일의 집 방문한다해서 반가운 마음에 아내와 아이와 함께 신청했다.
문익환 선생님 자녀 문영금 선생님이 정성스럽게 공간과 자료를 설명해주셨고, 가을 선생님은 나와 아내가 집중할 수 있도록 아이를 돌봐주셨다. 아내와 번갈아가며 아이를 돌볼 계획이었는데 정성과 환대가 참 고마웠고, 덕분에 모임이 집중할 수 있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통일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위해 살아온 선생님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다. "선생님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어떤 것들이 선생님을 이루어 왔을까?" 라는 자문에, 선생님을 깊이 알지 못하지만, 이번 방문을 계기로 아래 3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1. 나고자란 명동마을
을사조약 이후 선생님 집안(문익환 선생님의 할아버지)은 김약연 집안, 윤동주 집안 등과 140여명 정도가 집단적으로 북간도로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고 사람을 키운다. 명동이라는 이름처럼 동방을 밝히기 위해, 뜻으로 세운 마을 공동체이다. 교육과 독립운동이 중요하다고 보고, 마을농지에서 나오는 수입의 1/3을 생계에, 1/3을 교육에, 1/3을 독립운동에 지출했다고 한다. 이처럼 뜻으로 세워진 명동마을에서 문익환 선생님은 나고, 어린시절을 보냈다. 명동마을에 흐르는 주체성, 공의 추구, 민족교육의 뜻과 기운 속에서 자란 것이다.
2. 뜻으로 함께하는 관계
유신독재의 서슬이 퍼랬던 시절, 우리말성서번역에 매진하고 있던 선생님은 친구 장준하의 죽음을 계기로 민주화운동 전면에 나서게 된다.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3.1민주구국선언 초안을 작성하고, 이를 수정, 보완하여 동지들과 함께 1976년 3월 1일에 명동성당에서 발표하게 된다. 함석헌, 김대중, 윤보선, 안병무, 김지하, 함세웅 등이 선언문에 함께했다. 동 선언문은 유신체제 최대의 반정부선언문이었으며, 서명한 사람 대부분은 잡혀들어가 실형선고를 받았다. 선생님은 홀로 고군분투 한다기보단 공의를 위해 자기 십자가와 남의 십자가까지 지려고 하는, 뜻으로 함께하는 관계가 있었다.
3. 박용길 선생님
박용길 선생님은 문익환 선생님을 1938년 일본 유학 시절 처음 만나 1944년에 혼인한다. 남녀가 혼인해서 함께 살면 서로가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문익환 박용길 선생님 부부는 어떠셨을까?
"신랑이 신부방에 들어가듯 감옥으로 가게하라. 두려움을 작게, 기대는 크게 지니고서" 이 간디의 글귀를 박용길 선생님은 직접 붓글씨로 써서 늘 거실 벽이 붙여놓고 계셨다고 한다. 두 분이 서로 어떻게 지내셨는지를 이 글귀와 행위가 응축적으로 보여준다.
이상 문익환 선생님이 문익환 선생님이 될 수 있게 한 것으로 첫째, 나고자란 명동마을, 둘째, 뜻으로 함께하는 관계, 셋째 박용길 선생님을 꼽아보았다.
오늘 날은 일제강점, 유신독재과 같이 죄악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나, 가랑비에 옷 젖듯 교묘히 영이 침식되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더욱 정신차리고 살펴야하는 시대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나를 속이고, 속이고 있는 사실도 모르고, 남도 속일 수도 있다.
앞서 꼽은 바와 같이, 세속에 물들지 않는(나아가, 시상을 변혁시키는) 공동체, 뜻으로 만나는 관계, 뜻으로 함께하는 배우자는 지금도 여전히, 오히려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된다.
생각없이 살면 하나님 모신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살면서, 세상과 세속에 속절없이 당해버리기 일수이기 때문이다.
뜻으로 함께하는 마을과 관계는 참 고맙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간디의 저 글귀가 나와 아내, 자녀의 고백이 되길 바라고, 문익환 선생님 뜻 이으며 한반도의 봄과 평화를 일궈가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