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에요. 찬양 가사에도 많이 나와요. 은혜는 어려움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때 사용하기도 하고,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사용하기도 해요. 또 내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사용하기도 하죠. 특히 수련회나 예배에서 설교를 듣고 위로를 받았거나, 무언가를 깨달았을 때 은혜 받았다는 표현을 해요.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저는 주로 개인의 신앙적 범주에서 은혜를 사용했네요.
반면 노아와 마리아를 통해 드러난 은혜는 공동체적인 것이었어요. 방주를 만드는 일은 굉장히 고된 일이었고,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임신한 것은 위험한 일이라 고난을 입은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하지만 성경은 이들의 공생애적인 삶을 은혜 입은 것이라 말해요. 노아와 마리아의 순종은 모든 생명에게 유익을 끼쳤어요. 강의를 들으면서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부르심을 받은 것과, 또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 곧 은혜이구나 깨닫게 되었어요.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 정도로만 생각해왔어요. 마리아의 찬가도 그냥 쓱 읽고 지나가는 본문이었죠. 마리아의 찬가에서 마리아는 가난하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있어요. 공평과 정의가 사라진 시대를 애통해하는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어요.
여기까지의 강의 내용은 나눔을 적기가 수월했는데 이후 내용부터는 마음과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아 글을 마무리 짓는 것에 애를 먹었어요. 며칠 동안 하루에 몇 번씩 글을 썼다 지웠다 반복했어요. 첫 강의 때부터 '참된 나'는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설교시간에 희생과 섬김에 대한 설교와, 나는 죽고 예수님만 나타나야 한다는 설교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나를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목사님의 강의에서 '참된 나'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그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저는 농촌에서 살고 있어요. 농촌교회에 다니다 보니 60-70대 어르신들과 주된 관계가 형성되었어요. 저희가 섬기게 된 교회는 농촌 교회인지라 가부장적인 문화가 지배적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남편도 저도 이러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교회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혼란스러울 때가 많아요. 처음 몇 년 정도는 교회에 적응하고, 어르신들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행복했어요. 그래서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에서 움츠려들고 있는 남편과 저를 발견했어요. 그리고 마을에 이사오는 젊은 분들이 교회에 나오면 저희처럼 교회를 불편해하시더라구요. 그래서 교회 문화를 바꿔 보려고 계속 노력해 봤지만 쉽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진짜 '나'의 모습은 가부장적인 문화를 가진 교회 공동체에서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져요. 진짜 나의 모습과 우리 가정의 일상을 보여주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부정적인 평가나 반응이 돌아오곤 해요. 남편과 제가 각자의 직업을 갖고 성실히 일하며, 살림을 함께 해나가는 평범한 일상일 뿐인데 교회 공동체가 바라보기에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닌가 봐요. 그러다 보니 진짜 나의 모습은 감추게 돼요. 자꾸 감추다 보면 뭐가 진짜 나의 모습일까? 혼란스러워요. '참된 나'는 관계 속에서 발견된다고 강의 때 말씀해 주셨는데... 제가 맺고 있는 교회 공동체에서는 '참된 나'를 발견하기가 어려워요. 사람들이 요구하는 모습에 맞춰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어요. 과연 이게 교회일까? 교회가 뭘까? 고민이 돼요.
획일화된 모습을 요구하는 사회처럼 교회에서도 성도는 목회자에게, 목회자는 성도에게 획일화된 모습을 바라는 것 같아요. 목회자와 성도로서의 이상적인 모습이 존재하죠.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에서 진실한 만남이 가능할까 의문이 들어요.
서로의 존재가 정직하게 만날 수 없으니 교회에 있으면 더 외로운 마음이 올라오기도 해요. 그러다 보니 관계에서 벽을 치고 성을 쌓게 돼요. 일상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기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대화를 해요. 기쁨으로 했던 섬김과 희생이 가부장적인 문화에서는 당연시되는 일이다 보니, 억압과 강요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공생애적인 삶을 살았던 노아의 모습을 보면 성을 쌓고 있는 나의 모습은 부끄러워요.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나의 모습이 어색하기도 하고, 뭔지 모를 죄책감도 들어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 가정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이런저런 고민을 1년 정도 했어요. 남편도 저도 전통적인 기존 교회에서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다른 대안은 무엇일까? 어디로 가야 할까? 앞으로 무엇을 하며, 누구와 함께 살아야 할까? 헤매고 있어요. 고민하다가 회피하다가, 다시 고민하고..
그래서 그런지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이 남일 같지 않게 느껴졌어요. 애굽이 잘못된 걸 알면서도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애굽을 선택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됐어요. 하지만 현실적인 땅을 추구한 롯의 처참한 모습을 보며 각성할 수 있었어요.
하나님이 주실 약속의 땅은 소돔에 비해 모호하지만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추구했어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정했어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철저히 구분할 수 있었어요. 이러한 아브라함을 보면서 어디로 갈지를 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정체성을 확실히 아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부르심을 확고히 새기는 것이 마음의 할례인 것을 기억해야겠어요.
롯은 소돔을 선택했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을 돕고 뜻을 펼치려고 애썼어요. 하지만 롯은 혼자서 분투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무력했어요. 저에게도 이러한 무력함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롯처럼 혼자서 고민하다 보니 제자리걸음일 때가 많아요. 용기를 내어 함께할 수 있는 지체들을 만나 지혜를 얻고 힘을 얻어 제 삶이 한 걸음씩 변화하길 바라요.
첫댓글 사랑님 나눔 읽으니^^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네요!!ㅎㅎ 배움을 통해 느낀것을 나누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세희님! 저도 꼭 뵙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연락주신 덕분에 다시 힘을 내서 나눔 올릴 수 있었어요~ 다른 분들의 나눔을 읽고, 저도 나눔을 하면서 복잡했던 생각과 마음이 조금씩 선명해짐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사랑님이 고민하시는 바가 요즘 청년들이 교회에서 고민하는 것과 매우 비슷하네요~
청년들과 나누어도 많은 공감이 되겠어요 ^^
그리고 언제 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나서 교회와 참나에 대해서 얘기해요~
댓글을 이제서야 봤어요! 저도 목사님과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 이런 고민을 하는 제가 스스로 이상해보일때도 많았는데, 누군가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니 뭔가 위로가 됩니다!
뒤늦게 읽었는데 너무 공감되는 바라 댓글을 달지 않을 수가 없네요ㅠㅠ 롯에게서 느낀 점, 무력감, 회피 고민의 반복 모두 공감되어요ㅠㅠ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은 다르지만요. 저도 언젠간 만나서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바라요!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돌이표같은 내 모습에 무력해졌는데 마음을 나누는 것 만으로도 힘이 나네요! 꼭 만나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