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가 변하면 내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존재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온전하다' 그토록 존재를 찾고 찾았는데
첫시간에 '생각의 큰 전환' 이 올 수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공부시간이면 존재가 자유롭다가 다음날이면 생각이 밀려와 혼란스럽다.
하루는 자유롭다가 바로 다음날 경직되다니 .. 어찌할 바를 몰랐다.
걱정되었다.
애쓸 것 없다. 이대로 온전하다.
칭찬, 비난에 얽매이지마. 내안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면 돼. (마:6:16-18)
머리로는 알겠다. 가슴도 시원하다. 그런데 생각은 이전살던방식대로 가득차있다.
자연스레 비워지는건가? 노력해야하는 건가?
내가 이대로 온전 괜찮다. 부족함 없고.
품어지고 수용받은 존재- 분명한 믿음에 거함.
마 11:28-30
싫은 소리 듣지 않으려 바등바등하고, 두려움이 있을 때 내 결핍을 채우려는 성실함.
내 얘긴데? 하며 들었다. 내 속을 훤히 비추듯 시원했다.
너희는 피곤하고 지쳤느냐? 종교생활에 탈진했느냐? ..(쉼, 자유롭고 가벼운 삶)
마을에 온지 2년 지나간다.. 피곤하고 지쳤다.
잘 보이고 인정받으려 애쓰고 힘주었는데, 그것 놓게 되었다.
완전히 놓진 않았다. 놓는 시작일 뿐..
한 언니와 생각에 부딪힘이 늘 상처받았다. 생각했다. 나를 괴롭게하고 혼내는
서툰 말들이 내 존재가 문제가 있다고 받아 힘들었다. 행동을 바꾸어나가면 되는 것을.. 몰랐다.
*조화롭게 살아가려면 -내 계획,틀,습관 바꾸어 맞춰 살아가야한다는 것 알려주셨다.
화가 내안에 있었다. 그 아우성으로 2년간 나를 괴롭게 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정리하며 만나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두렵고 긴장하게 하는 무서운 존재라고 생각해왔는데
담담했다.
긴 얘기 끝에 나와 다른 사랑(말)의 표현이라 어스름하게 느껴졌다. 그 사람의 방식, 내가 원하는 방식에 꼿혀
바꾸려 싸웠다. (들리지 않았다) 왜 그것과 싸웠을까? 그 싸움이 힘겨워 탈진했다.
40년 세월은 자아를 증명하려 애쓰고 치열하게 쉼없이 살았고, 마을에 와서는 사랑받는지 확인하려 날 괴롭게 했다.
허무했다..
나를 소중히 여기고 방치해두고 고통속에 두지 않고 살펴
하나님이 오셔서 죽기까지 사랑스러운 존재라 말해주셨다.
나를 소중히 여기고 고통속에 두지 않고 살펴 줄꺼야
이사야 50:4-9
윤주야 오늘도 잘해보자!
질문:
1. 이렇게 다짐하고 바로 다음날 이전 생각방식으로 돌아가는데, 그땐 어떻게 해야하나요?
실제로 비난받으면 상처를 받잖아요. 아프고.. 그러니 피하거나 도망치는데
그 때 앞에서 가만히 바라보나요?
존재가 예수의 피로 영향받지 않는다. 가 주체 인 것 같은데, 이전의 자아(생각방식)가 너무커서 이걸 덮어요.
극으로 왔다갔다 운동을 해요.
2.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무었인가요? 얘기해주셨는데, 놓쳤어요.
짜증나 지가 뭘 안다고 그래? 가 올라올 때 어떻게 해야하나요?
이 심리 설명하며 알려주셨는데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아니라구요.
첫댓글 1. 누군가 비난 한다고 그게 바로 상처가 되는 건 아니에요.
비난 받으면 안된다. 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내 자아의 집착이 나를 상처주는 거에요.
(예수님은 분명히 선행을 하며 인정받으려 하지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불순종 하니까 스스로 괴로워지는 거에요)
이 옛 사고방식대로 살면 너무 힘들고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는 것이니
그 사고방식이 나를 상처준다는 것을 보세요. 그것을 보시면 돼요.
2. 다른 사람 원망하고 흉보고 싫어하느라 늘 수고가 많지요?
그 수고와 무거운 짐 그만 두는 게 온유와 겸손이에요. ㅎ
이제 그만하세요. 스스로를 괴롭게 할 뿐이니까.
늘 내 문제만 보는 것, 다른 사람 티가 아니라 내 눈의 들보만 보는 게 온유와 겸손입니다.
윤주님
이치를 머리로 잘 이해하는 것도 좋지만,
윤주님은 우선
꾸준히 마음 모아 기도하면서
내가 얼마나 사랑받으며
그리스도의 공로로 내가 얼마나 온전한지
몸소 아는 것을 우선하세요~
마음을 바꿔달라, 이전의 자가를 없애달라 요청하지 마시고
마음과 생각이 어떻든(그놈들은 원래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지금 내 존재에 눈 뜨는 것에 집중하세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