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야생. 마주할 수 없는 대립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자유롭게 활보하는 도시의 비둘기와 목걸이가 걸려 항상 주시되는 지리산의 반달가슴곰. 둘 중 누가 더 야생적일까요? 라는 질문에 단순 공간으로만 논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은 경계없이 펼쳐져 있는 것인데, 도시라는 공간이 주는 인상에 사로잡혀 그 사실을 잊었다. 도시에서도 틈이 생기고 시간이 확보되면 야생의 모습은 자리잡는다. 문득 어스름한 저녁에 집 앞의 나무에 앉아 나를 뚜렷히 쳐다보았던 부엉이🦉가 떠올랐다.
야생이라는 말의 '들 야野'자는 마을里이 들어선 들판을 뜻한다. 원래는 '수풀 림林'자와 '흙 토土'자로 구성된 '들 야埜'자로써 숲(林)이 우거진 땅(土), 즉 아직 농경지로 개간되지 않은 교외의 들녘을 말했다. 이후 소리부 인 '나 여予'자가 더해져 '들 야壄'자가 되었고, 다시 '들 야埜'자가 '마을 리 里'자로 바뀌어 '들 야野'자가 되었다. 그것은 그 당시 이미 그런 교외 지역(野)은 더는 개간되지 않아 숲으로 무성한 땅(埜)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마을(里)로 변했다고 한다.
숲이 무성한 땅이 사람이 사는 마을이 된 것이다. 사람은 문명을 만드는 특이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관건은 어떤 문명을 만들 것인가 다. '들 야野'자는 '고을 읍邑'자와 대칭되어 성 밖의 주변지역을 말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들 야野'자에는 거칠고 야생적이라는 뜻이 생겼고, '야만(野蠻)', '야심(野心)' 등의 단어가 만들어졌다. '고을 읍邑자'는 성(口) 아래에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다. 사람이 사는 공간에 위계적 질서가 반영되어 있다. 그 위계적 질서가 그대로 확장되면 야野는 거칠고 야생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사람은 하늘땅과 어울려 살 때, 사람다울 수 있다. 하늘땅 없이 여기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문명과 하늘땅과 더불어 만들어가는 문명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무리 막으려해도 다 막을 수 없는 것이 야생이라면, 더불어 살아감을 생각하는 것은 마땅하다. 이미 살쾡이, 너구리, 꿩, 족제비, 고라니, 송골매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이야기 나누어준 성민규 님이 도시의 어느 공간에서 야생을 발견하며 느낀 설렘을 나도 잘 느끼고 싶다. 그리고 온생명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계를 만들어가야할 또 하나의 이유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