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행전의 저자가 로마와 갈등은 피하려는 경향이 있고 이방인이 다른 복음서보다 두드러져 보이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마태와 세부적인 내용이나 뉘앙스에서 차이를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의도한 것에 주목하며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그동안 전통적 신앙을 오랬동안 가지고 살아온 배경이 있어서인지 강의를 들으며 여러 의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아마도 제가 이 강의를 통해 기독교를 처음 접했다면 보통의 현대인의 경험에 부합하기에 오히려 쉽게 받아들였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두가지 정도 질문이 있습니다.
1. 바울과 예수의 가르침 사이에 거리가 있어보인다는 질문을 드렸었는데요, 바울이 직접 썼다고 여겨지는 7개의 편지를 훑어보면서 저에게는 바울의 예수 상이 전통적 기독교 신앙의 예수 상에 훨씬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가 신앙의 대상이 되어갔다고 하는데 바울 서신에서 바울에게도 이미 예수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히려 바울의 예수상은 저에게는 크로산이나 마커스보그의 예수와는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그의 사후 거의 동시대에 신앙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예수에 대한 신앙은 예수의 직계 제자들에게까지 소급이 되는 것인지요? 바울의 편지는 50년대 쓰였지만 바울 자신이 예수 공동체에 들어간 때가 예수 운동의 상당히 초기라면 복음서들이 그보다 훨씬 후대에 쓰이긴 했어도 초기 예수공동체와 예수에 대한 신앙은 비슷하게 공유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바울과 최초의 예수운동 사이에서 이미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까요?
2. 부활을 은유로 보는 것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잘 해소가 되지 않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서사는 은유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하더라도 고린도전서 15장이나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내용은 은유로 의도하지 않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부활을 육체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감화받은 종교적 심리적 현상을 표현한 것이라면 고전15:15에 나오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없다면" 같은 구절이 너무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죽은자들의 부활의 의미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부활 논쟁을 보면 바리새인들도 부활을 은유로 이해한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당시 복음서와 바울 서신을 읽었다면 그 부활을 크로산처럼 은유로 읽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바울 자신도 바리새인이었기에 부활을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종말의 때에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았을까요? 바울이 크로산처럼 부활을 이해하고 가르쳤다면 복음서의 부활 논쟁처럼 유대교 안에서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지 않았을까, 크로산의 의도는 바울과 당시 유대인들의 부활에 대한 인식과 별도로 현대인들은 부활을 은유로 읽어야 한다는 입장일까 여러가지 의문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