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새롭게 읽기’ 후기
1. ‘누가-행전은 초기 기독교 운동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수용한 신약 문서들에 속한다.’는 말은 아주 현실적이었다. 그것을 팍스 로마나와의 ‘타협’이라고 표현하셨지만 로마라는 제국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야 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 구별된 삶, 즉 거룩한 삶을 많이 얘기하면서 그렇게 사는 듯이 말하지만 사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에 아무 거리낌없이 살아가고들 있지 않나? 자본주의 사회를 완전히 벗어나서 산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최선이 아니면 차악이라도 택해서 살아 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 마음이 그당시 사회의 유력인사들 즉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로마인들에게 교회가 문을 좀더 열어주는 길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님의 인생 여정을 잠깐 설명하시면서 더 마음에 와 닿았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들은 그걸 최선이라고 생각하는게 문제라는 지적도 잊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시차 만큼이나 그 뜻이 변질된 것 또한 사실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는 타협(?)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나?
2. 기독교에는 ‘독특한’ 것이 있다고 하셨다. 그때 내 머리 속에는 ‘성육신’ ‘유일신’이라는 단어가 스치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다른 것에 비해 훨씬 ‘배타적’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만 맞고, 우리만이 길이고, 우리만이 특별하다…..등등
예) 부터님 오신 날 조계사에서 5시간이나 찬양과 죄와 지옥을 외친 기독교인들에 대한 뉴스
그 배타성이 객관적인 사실은 아니며 단지 주관적인 주장일 뿐이다. 거기에 대해 겸손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참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러면서 예수님만이 오직 하나님인가? 예수님의 인성에만 집중한다고 해도 예수님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나에게 많은 도전이 되었다. 그제서야 예수님이 사람이시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라는, ‘예수님은 신이시기에 그렇게 하셨지.’라고 변명할 수 없다는 이전의 말씀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첫댓글 위에 지적하신 오늘날의 "우월적이고 배타적이고 전투적인 크리스쳔"의 모습은 "이방인, 빈민,장애인,불신자들"을 섬기신 역사적 예수의 삶과는 많이 동떨어진 모습이라는데 공감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이시기에 우리가 예수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
란 말씀이 여운깊게 남네요.
초기 복음서 기자들이 왜 그렇게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려 했는지 알게 되네요.
어쩌면 신과 인간이 철저히 분리돼야 한다는 헬라사상과 영지주의적 유대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 스스로 고난을 극복해나가야만 했을텐데, 예수의 인성이 오히려 "신과 함께" 고난을 극복할 힘과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이지만 인간이신 예수가 세속(세상)에 내려와(당시 이원론적 헬라사상에 의하면 절대 불가능한) 신성을 더럽혔다는 반대파의 질타를 당하면서까지 인간들과 함께 계셨다는 교훈(로고스의 성육신)을 통해 우리가 예수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