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시인의 두통대처사례)
두통으로 고통받은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한번 두통이 시작되면 이삼 일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진통제도 듣지 않았다.
병원에 한 달 넘게 입원도 했고 뇌와 관련된 모든 검사를 받았으나 원인을 찾지 못했다.
결국 정신병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나 스스로 내린 결론은,
중력이 맞지 않는 행성에 불시착한 것이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대학교 때는 더 심해져서 정신착란과 환청으로 이어졌다.
우울하고 암울한 청춘이었다.
자취방 월세를 내지 못해 학교 캠퍼스나 지하도에서 노숙하면서 두통은 긴 어둠의 터널이 되었다.
이토록 고통받는 머릿속 나는 대체 누구인가 의문을 갖게 된 것이 그 무렵의 일이었고,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출구는 뜻밖에도 간단히 찾아왔다. 거의 축복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때 나는 인도 푸나의 명상센터에 있었는데 전과 마찬가지로 두통이 극심하던 아침,
스승이 문득 두통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이 한때 심한 두통으로 시달렸다면서 스승은 말했다.
"두통이 오면 내가 아프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참나를 말함)
그냥 두통이 왔다고 말하라.
아픈 것은 내가 아니다. -(나와 참나인 나자신을 분리해서 생각)
머리가 아픈 것이다. -(머리는 에고인 몸이지 나 자신은 아니다.)
두통이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 두통을 바라보는 나로 남아 있으라.
두통과 하나가 되지 말라. -(두통은 에고이지..나자신이 아니다.)
두통은 왔다가 갈 것이다.
나는 그 오고 감을 바라보는 자일 뿐이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여겼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반복해서 생각하니
두통과 나를 분리시키는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두통이 일어나면 '아, 두통이 왔구나. 어서 와.
이곳에 두통이 있지만 나는 아프지 않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러자 신비하게도 전처럼 심하게 고통스럽지 않았고 통증이 오래가지도 않았다.
내가 마음을 열고 환영하자 두통은 공격할 의지를 잃은 듯했다.
그리고 얼마 후 기적처럼 사라져 아주 드물게만 찾아왔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실제의 두통이 아니라 ...
두통과 자신을 일체화시킨 일이었다. (나의 몸과.. 나자신을 동일하게 보면 안된다.)
살아 있는 한 언제든 두통이 올 수 있는데도 나는 매번 '두통이 나에게 일어났다.
이것은 문제이며, 아픈 것은 나이다.'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 자기화가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실제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 만들었다.
조금만 아파도, 조금만 다쳐도 '나'의 소멸 위기에 긴장했다.
누군가의 비난, 크고 작은 상처들, 성취와 상실이 매 순간 습관적인 자기화를 거쳐 '나의 일'이 되었다.
우리는 '나'라는 단어와 생각을 빼고 하루를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미국에 선을 전파한 스즈키 순류 선사는 나날의 삶에서
우리 생각의 99퍼센트가 자신을 향해 있다고 지적한다.
'나는 왜 고통을 겪는가? 나에게 왜 문제가 생기는가?'
그리고 우리는 희망한다. '이런 문제 많은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러나 벗어나야 하는 것은 나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모든 문제의 자기화로부터이다. 동일시이다.
이 자기화가 모든 문제의 시작이고 자기화의 멈춤이 모든 문제의 종식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의 자기 동일화가 불행과 고통의 주된 원인이기 때문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영적 교사들인 조셉 골드스타인, 잭 콘필드,
샤론 샐즈버그, 수리야 다스 등의 스승으로 알려진 방글라데시 출신의
아나가리카 무닌드라에 대한 일화가 있다.
그는 불교도였기 때문에 언제나 불교 성지를 보고 싶어 했다.
그가 늙었을 때 제자들이 더 늦기 전에 그를 모시고 인도를 여행했다.
하루는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무더위에 마실 물도 없고 기차는 다섯 시간 연착했다.
제자들이 노쇠한 스승의 상태를 염려하자
무닌드라는 말했다.
"이곳에 더위가 있지만 나는 덥지 않다.
이곳에 목마름이 있지만 나는 목마르지 않다.
이곳에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일이 있지만 나는 성가시지 않다."
무닌드라는 죽음까지도 그렇게 맞이했다.
"이곳에 죽음이 있지만 나는 죽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음이 창조한 자기화로부터
벗어났을 때 그 '배고프지 않은 나', '아프지 않은 나', '죽지 않는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새로운 탐구의 출발이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의미를 숨기고 있다.
두통은 나에게 오랫동안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아픈 사람인가? 내 몸이 나인가?
아니면 변화하는 내 마음이 나인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자가 나인가?
photograph_Shiva Ryu 글 류시화